이승종의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재출간

(1) 이승종 교수님께서 『크로스오버 하이데거』가 새로운 출판사에서 수정/증보된 형태로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보내주셨다. 다음 학기부터 이승종 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어서 이 책을 틈틈이 다시 읽어보던 중이었는데, 마침 재출간 소식을 듣게 되어서 기뻤다. 특별히, 이 책은 내가 하이데거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주었고, 철학적 해석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상호보완적 관계에도 눈뜨게 해준 데다, 서강대 대학원 시절에 옆학교 이승종 교수님의 은밀한 팬(?)이 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해서, 나에게도 정말 의미가 있는 책이다.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18

(2) 박이문 교수님은 생전에 이 책에 대해 아래와 같은 추천사를 쓰셨다.

"나는 이 책이 한국 현대철학사에 오래 남아 진지한 철학도들에게 읽히고 논의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책의 중요성은 저자의 개성 있고 깊이 있는 사유에 있다. 이승종 교수는 이 책을 통해서 그가 명실공히 철학자임을, 즉 단순히 철학적 지식을 가진 석학이 아니라 사유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동의하든 않든 상관없이, 이승종 교수의 하이데거론을 통해 저자 자신의 주체적 사유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추천사의 첫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승종 교수님의 책은 하이데거에 대한 치밀한 주석과 설득력 있는 재해석이 정말 잘 조화되어 있는 대단히 모범적인 연구서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 책만큼 명료한 언어로, 꼼꼼하게, 포괄적으로, 개성 있게 다루는 연구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를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철학도들이라면, 결코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A급' 연구라고 자주 거론되는 텍스트들조차 이승종 교수님이 쓰신 책만큼의 엄격함과 명료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가령, 독일어권의 권위 있는 하이데거 연구자들인 푀겔러, 헤르만, 피갈은, 주석적으로 엄밀한 해설을 제시할 지는 몰라도, 하이데거의 사유가 현대철학에서 지니는 의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호그런드, 로티, 테일러, 브랜덤은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의의를 분석철학의 용어를 통해 명료하게 보여주지만,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는 특정한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다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한계를 지닌다. 영미권 하이데거 연구사에 길이 남게 된 드레이퍼스의 『세계-내-존재』조차 전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제1부에 대한 제한된 해설만 제시한다.

국내와 국외의 기존 하이데거 연구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승종 교수님의 책이 지닌 강점은 명확하다. 이승종 교수님의 책은 전기 하이데거가 놓여 있는 현상학적 배경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후기 하이데거가 고민한 기술문명에 대한 성찰로 차근차근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우선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사이의 차이가 대단히 꼼꼼하게 다루어지고(제Ⅰ부),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 하이데거의 사유가 수리논리학적 언어철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고(제Ⅱ부), 이러한 비판이 분석철학 전통이 고민해 온 형이상학과 진리론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제Ⅲ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의가 기술 환원론과 결정론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 논증된다(제Ⅳ부). 따라서 각 부분은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다루어지는 개별 주제들을 잘 보여주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전체 면모를 드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분석철학의 주제들과 하이데거의 사유 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3) 나는 드레이퍼스의 『세계-내-존재』가 영미권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필독서인 것처럼 이승종 교수님의 이 책이 국내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위 있는 연구, 학자, 학계, 전통이란 결코 연구자 한 사람만의 실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훌륭한 연구를 생산하고, 발굴하고, 지원하려는 학문 공동체 전체의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뛰어난 연구가 세대를 이어 계승되고 전파되면서 점차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이 훌륭한 연구가 잊혀지지 않고 계속 사람들 사이에서 학문 공동체 전체를 성장시키는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하이데거를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모든 국내 연구자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승종 교수님이 「대학지성 In&Out」 기사에 쓰신 첫 문단을 읽고서 학문 공동체 전체가 훌륭한 연구를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2010년에 출간한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는 연세대 학술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철학 학술지들과 『교수신문』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출판유통업체의 부도로 생각의나무 출판사가 책을 낸 지 1년 만에 문을 닫는 바람에 책도 함께 절판되었다. 16년을 공들인 연구 성과가 학문과는 상관없는 외부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게 현대사회의 불확실성인가. 저자라는 운전자가 막 주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의의 사고사를 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책이 그동안 절판된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출판사의 부도 때문에 이정도로 뛰어난 책이 고작 출간 1년만에 유통이 중단되어 10년동안 서점에서 찾아볼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새로운 출판사에서 수정증보판을 내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철학사에 오래 남아 진지한 철학도들에게 읽히고 논의"되어야 하는 책이 정말 소리소문 없이 사장되어버릴 뻔했다.

아무리 훌륭한 연구라도 해당 연구를 보존,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관심과 제도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 철학계는 이런 관심과 제도가 너무 약하다.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연구자 집단의 수가 애초에 적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긴 하겠지만, 국내 연구자들이 수행한 뛰어난 연구를 같이 읽고 공유하려는 문화가 퍼져 있지 않은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정말 주목받아야 할 많은 연구들이 학술논문 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 속에 묻혀버리거나,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오고 나서도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한 채 절판되어버리거나, 극히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읽히다가 다음 세대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느 순간 연구 전통이 단절되어버린다.

나는 이승종 교수님의 책이 다시는 그런 운명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도 하이데거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적 해설만 만연해 있는 국내와 국외의 연구 풍토에서, 이 책이 새로운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정표가 되어 오랫동안 학계에서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중심으로 하이데거를 읽는 연구자들이 생겨나고, '분석적 해석학'이라는 입장이 점점 발전되고, 하이데거와 해석학에 대해 이승종 교수님이 제시하신 입장을 공유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학파와 전통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당연히, 나도 그런 흐름 속에서 이승종 교수님의 하이데거 연구와 해석학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연구자들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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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승종 교수님께서 연세대 박사과정을 권유해주시기도 하셔서요. 조만간 그동안 있었던 일화들을 정리해서 올려 볼 예정입니다.

표지 디자인이 크몽에 3만원 주고 맡긴 퀄이라서 아쉽긴 하네요. 그래도 절판이라 못 샀었는데 좋은 소식입니다!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저도, 표지 디자인만큼은 예전 책이 훨씬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ㅠㅠㅠ 표지에서 뭘 표현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것 같은데... 아쉽네요ㅠㅠㅠㅠㅠ

선생님, 궁금해서 여쭙습니다만, 틸리히나 이승종 교수에 대한 가십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들이 집필한 저서에 대한 학문적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이승종 교수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이승종 교수님은 정말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동안 여러 학교 교수님들을 만났지만, 이승종 교수님만큼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 열린 태도를 지니신 분, 구도자적 자세로 철학을 연구하시는 분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승종 교수님은 저 책의 수익 전액도 난치병 아이들의 치료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셨습니다. "극단적 민족우월주의"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표현이 이승종 교수님께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가십거리가 이들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질문드렸습니다.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관해서는, 나치즘이 하이데거에 사상적으로 연관을 지닌다는 정황 증거에 대한 탐색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이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검은 노트』를 둘러싼 논쟁들이 있을 것이고, 보다 넓게는 하이데거로부터 전체주의적 사유를 읽어낸 레비나스와 아도르노의 독해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틸리히나 바르트의 신학과 이들의 사생활은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관한 연구처럼 학문 내적으로 연관을 지닌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거나, 그와 관련된 선행 연구들이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연관성이 입증되었나요? 아니면 양자의 관계는 하이데거-아렌트의 사생활과 이들의 철학적 연관 관계만큼이나, 아니면 쇼펜하우어의 괴팍했던 성격과 쇼펜하우어 철학이 지니는 관계만큼이나 사소한 관계인가요?

그리고, 학자의 외적 가십거리와 학문적 성취 간에 중요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 사실이고 그것을 주제화하고 싶었다면, 그와 관련된 논의를 소개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하이데거 철학에서 나치즘이 지니는 지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관한 의견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면, 저는 그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연구나 문헌을 거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화두를 꺼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지한 얘기가 아니라면 철학밈이나 유머글, 잡담 카테고리로 글을 써서 (물론 당연히 소모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사람들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편하게 얘기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존재와 시간』 서평에 "이분 완전 나치 아닌가요" 같은 한 줄 짜리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승종 교수님을 비난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앞뒤 문맥 없는 댓글로 괜한 스캔들을 뿌리시는 것보다는, "극단적 민족우월주의"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유머를 가장하여 근거 없는 인신공격이 이루어지는 형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정보들을 애초에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게 이승종 교수님 인격이나 학술적 업적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빙크님이 그냥 가십거리로 그런 것들을 던지면서 이승종 교수님을 웃음거리로 삼고 싶으시다면, 솔직히 저는 바빙크님의 태도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그런 행동들이 바빙크님의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하이데거를 나치라고 비난하든, 틸리히나 바르트를 불륜남이라고 비난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게 학술적으로 의의가 있다면 말이죠. 진지하게 관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으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

를 최소한이라도 가지고 오셨어야죠. 전문가처럼 APA나 시카고 스타일로 방대한 양의 참고 논문과 저서를 제시하지는 않더라도요. (저는 그걸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방금 하신 것처럼 잡지의 기사를 가져오거나, 여비서가 『교회교의학』의 집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같습니다. 무언가 주장을 하고 싶고 그게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으시다면, 그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를 드시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관한 것이든 뭐에 관한 것이든 말이죠.

무엇보다 그것이 "이분 완전 환 뭐시기 아닌가요", "이 양반이 유부녀를 어쩌고"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태도입니다. 맨 처음 댓글처럼 그렇게 댓글을 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댓글을 학자의 삶과 그 학문적 성취의 관계에 관해 화두를 던지는 행위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그저 유명인에 관한 가십을 소비하려는 행위로 생각할까요? 전 후자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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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한 마디를 던져보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비도덕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꽤 비난을 받을만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비도덕적인 사상이 행위로까지 이어졌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예를 들어 서정주가 아무리 훌륭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서정주의 시는 그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가치가 반감되죠.

하지만 『환단고기』 및 『천부경』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태도는 비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이는 일종의 '지구평평설'을 믿는 것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비도덕적이라기 보다는 비역사적 논증에 가깝죠. 여기서 비역사적 논증이라는 것은 역사학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과 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구평평설을 믿는 사람에게 비과학적 입장 혹은 비물리학적 입장을 가진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처럼 『환단고기』 및 『천부경』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 역시 비역사적 입장을 가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avinck이 어떤 입장을 가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는 이승종 교수님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치즘에 암묵적이든 적극적이든 동조했던 하이데거와 같은 방식으로 도매금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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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의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책 [우리 역사의 철학적 쟁점](소명출판, 2021), 422-423쪽에서 밝혔듯이 저는 환빠가 아닙니다. 같은 책의 393쪽에서 밝혔듯이 저는 국수주의자나 민족주의자도 아닙니다. 저런 명칭은 제가 추구하는 길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책에서 강단사학을 비판하다보니, 그리고 제가 강단뿐 아니라 재야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서도 사회를 보거나 발표를 하다보니 환빠로 비쳐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제가 발표한 글은 [환단고기]나 「천부경」과는 무관한 우리의 신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환단고기]를 비롯한 재야사서와 재야경전에 대한 비판의 글은 따로 준비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흑백논리가 아닌 보다 열린 장에서 사유하고 토론하고 싶습니다.

연세대 이승종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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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고려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남경한 이라고 합니다. 시간 날 때 쓴 사소한 댓글 하나에 이렇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연구에 대하여 많은 글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youn님이 소개해주신 글 덕분에 조금씩 읽어보고 있던 차였습니다. 선생님의 저서 목록을 보면 한국철학, 광범위한 의미의 동양철학에도 호의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습니다. 관련 전공자로서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댓글 중에 "저 책에서 강단사학을 비판하다보니, 그리고 제가 강단뿐 아니라 재야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서도 사회를 보거나 발표를 하다보니 환빠로 비쳐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제가 발표한 글은 [환단고기]나 「천부경」과는 무관한 우리의 신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환단고기]를 비롯한 재야사서와 재야경전에 대한 비판의 글은 따로 준비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은 아마 저의 댓글과 꽤 유관한 것 같아서 저도 이렇게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제가 위에서 선생님의 주장에 대하여 비역사적 논증이라고 평가한 근거는, 선생님께서 2009년에 『대동철학』이라는 잡지에 게재하신 「번역의 고고학을 위하여 ― 우리 상고사 연구를 위한 철학적 試論」이라는 논문의 내용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논문에서 『상서』「순전」에 나와 있는 "肆覲東后"라는 대목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상고사가 중화사상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한편 제가 위의 댓글에서 『환단고기』와 『천부경』 등을 언급한 까닭은 이 저서들이 유사역사학에서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위서이기 때문이고, 선생님의 논문에서 『환단고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태백일사』를 선생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태백일사』를 포함한 『환단고기』를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계신다고 추측하였습니다. (이 밖에 선생님께서는 『규원사화』 등도 거론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오래된 논문이라 그 사이에 선생님께서도 입장의 변화가 생기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제가 본 논문에 한해서 제가 위와 같이 생각한 근거들을 몇 가지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1. 단재 신채호의 고증

선생님께서는 논문에서 64쪽과 65쪽에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채호의 주장은 1930년대에 나온 것으로서 고고학적 발견과 엄격한 사료비판에 입각한 현재의 시점에서 봤을 때 신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젊은역사학자모임,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역사비평사, 2017의 2부에 언급되어 있으니 이것으로 갈음하고자 합니다.

  1. 어떤 텍스트를 신뢰할 것인가?

역사학에서는 기본적인 사료비판이라는 것을 합니다. 해당 사료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특정 기사를 검증하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규원사화』와 『태백일사』를 신뢰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인용하셨는데, 이 텍스트를 왜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규원사화』와 『태백일사』 모두 진서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로서 사학계에서는 이를 사료적 가치가 있는 텍스트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마 강단사학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시는 듯 하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어떠한 근거로 이 두 텍스트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상고사에 대한 엄밀한 검증을 추구하신다면 먼저 근거로 사용하려는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해당 텍스트에서 수록된 내용이 다른 텍스트의 내용과 정합적인지, 혹은 고고학적 증거가 동반되는지, 저본이 되는 판본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등등 기본적으로 사료로 인정받기 위해서 거쳐야 할 검증이 이뤄져야 독자는 해당 기록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만 하더라도 19~20세기 고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의고학파에 의하여 역사서로서 철저한 검증을 받았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역시 사학계에서 초기 기록에 대하여 지속적인 검증이 이뤄지고 있죠.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상서』의 「요전」만 하더라도 상당수의 내용은 상고시대의 기록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전목은 "우는 하의 시도, 설은 상의 시조, 기는 주의 시조인데, 여기서는 이들이 모두 순에 의해 동시에 관직에 있었던 인물로 변해있다. ... (중략) ... 이를 보면 이미 고대 중국에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규모를 갖춘 행정부가 갖추어져 있던 셈이다. 만약 요임금 시절에 중국의 중앙정부가 그렇게 이미 9관을 갖추고 있었다면 이하 하, 상, 주 3대와 춘추전국을 거쳐 진한에는 왜 모두 없었는가? ... (중략) ... 이점에만 근거하여 보면 순으로부터 진에 이르는 2천 년의 역사는 말할 방법이 없게 되고 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나는 「요전」이 전국시대 사람의 위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순이 9관을 임명한 사실 등도 모두 전국말기 사람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정부를 반영하는 것이다."이라고도 말합니다. (전목, 『전목 선생의 사학명저강의』, 이윤화 역, 신서원, 2006, 23-24쪽 인용) 이러한 입장을 고려해보면 『상서』의 기록조차 의심의 대상으로 놓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논문은 ‘철학적 시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실제로 주장하시는 바는 역사적 시론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의 기본적인 사료비판 과정을 거쳐야만 선생님의 주장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이 일종의 철학 커뮤니티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역사학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열린 장에서 토론을 하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얄팍한 식견으로 토론을 하기에는 부족하더라도 제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해드리고 싶어서 간략하게나마 글을 남겨봅니다. 커뮤니티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집에 와서 급히 글을 쓰느라 구색을 다 갖추지 못했는데요. 혹시 이 글을 보신 분들 중에서 추가적인 의문이 있으시다면 댓글이나 쪽지를 남겨주세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답변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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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논문을 비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논평에서 배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 논문에서 개진한 논증의 구조와 성격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논문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제 책 [우리 역사의 철학적 쟁점]의 1장에 편입이 되었으므로 책 버전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건은 『상서』 「순전」에 나와 있는 肆覲東后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는 원주민의 언어 ‘가바가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콰인의 문제의식에 견주어 접근하면 이해가 용이하겠습니다. 콰인은 원주민의 언어에 어떤 존재론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가바가이’가 달리 번역됨을 논증하고(번역불확정성론), 그 역도 참임을 논증합니다(존재론적 상대성). 그로부터 의미의 불확정성론과 지시체의 불가투시성을 이끌어냅니다. 저는 肆覲東后도 언술이 지칭하고 있는 시기의 동아시아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번역될 뿐 아니라 그 역도 참임을 논증하였습니다. 이는 제 책의 47-48쪽에서 제시한 역사철학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 논제의 한 사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상서』의 기록조차 의심의 대상으로 놓고 봐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저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는 제 책 1장 2절 「불신」과 3절 「추리」에서 상론했습니다. 기록의 지시체는 사실일텐데 기록과 사실은 미결정(underdetermination)의 관계 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사를 사실에 대한 과학이 아니라 해석학으로 봅니다. 우리의 강단사학이 견지하는 실증주의는 저러한 면(미결정성과 해석학)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을 대지와 세계와의 투쟁으로 이해한 바 있는데 역사에서는 사실이 대지에 해당할 것입니다. 실증주의는 대지로서의 사실이 지니는 은닉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肆覲東后 논증에서 [태백일사]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음을 명시했습니다(제 책의 76쪽). 제 논증의 결과가 저 문건에서 주장한 번역과 일면 부합한다는 점이 저 문건이 진서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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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왜 '역사적 시론'이 아닌 '철학적 시론'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논지를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 역사의 철학적 쟁점』에서 보완된 부분은 따로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이 들어서 다시 글을 남깁니다.

  1. 의미의 불확정성

肆覲東后의 번역 문제에서 "의미의 불확정성론과 지시체의 불가투시성을 이끌어 냅니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는 의미의 불확정성 덕분에 동아시아의 경전 해석학이 다양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전 해석의 다양성은 그만큼 동아시아 사유가 풍부해질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저 역시 이점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1. 『상서』의 성격과 기록의 지시체 문제

그러나 "기록의 지시체는 사실일텐데" 이 대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상서』가 가진 독특한 성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상서』를 철저한 역사서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서』는 역사서의 성격 뿐 아니라 경전이라는 성격도 가집니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경전이란 일종의 진리를 담고 있는 있는 텍스트 일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사실이라기 보다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공유한 일종의 가치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仁, 義와 같은 것들이죠.

제가 알기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역사'와 경전의 영역이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동아시아 역사서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역시 자신의 저서를 역사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동아시아의 텍스트를 경전(經), 역사(史), 철학서(子), 문집(集)으로 구분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일반화된 시기는 꽤 후대입니다. 『한서』 「예문지」를 보면 『사기』는 춘추류에 속해 있었습니다. 한대까지만 하더라도 경학과 사학은 구분되지 못한 것이죠. 『사기』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구자들이 역사학적 태도를 가지고 접근할 뿐입니다.

『상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상서』를 마주할 때 그것의 지시체가 무엇일지에 대하여 최소한 두 가지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상서』의 특정 대목의 지시체는 사실이다. 두 번째, 『상서』의 특정 대목의 지시체는 사실이 아니다. 저는 "肆覲東后"의 지시체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고 봅니다.

覲의 주어는 암묵적으로 요 혹은 순으로 상정됩니다. 「순전」 자체가 원래 「요전」에 붙어있었으나 후대의 누군가(많은 사람들은 매색이라고 추측합니다)가 이를 위조하는 과정에서 「요전」 의 후반부를 따로 독립해서 별도의 챕터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覲의 주어는 요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요이든 순이든 간에 선생님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순전」이 요 혹은 순의 실제 행적 즉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전제가 먼저 성립해야 합니다. 그래야 肆覲東后의 지시체는 요 혹은 순의 행적이 되겠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 肆覲東后의 지시체는 해당 대목을 저술한 사람의 '믿음'이지 '사실'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저는 「순전」이라는 챕터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문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 대목의 저자는 "순이 동쪽의 后를 마침내 覲하였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이 믿음을 문장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저자의 믿음이 실제 사실인지 여부는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없죠.

肆覲東后의 지시체가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제가 앞선 댓글에서 언급했던 여러가지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소위 강단사학의 실증주의는 특정 대목의 사료로서의 활용할 수 있는지를 먼저 검토한 다음, 이러한 검토를 통과한 대목에 한해서 지시체를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 문장의 암묵적 주어가 요와 순이라는 점은 굉장히 유의해야 합니다. 요와 순이라고 하는 인물이 동아시아 텍스트에서 가지는 위상은 아주 독특합니다. 요와 순은 저자가 믿고 있는 일종의 가치관이 투영된 결과물에 가깝지요. 민두기는 「중국에서의 역사의식의 발전」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둘째는, 역사를 문화적 가치의 총괄로 보는 것이다. 역사는 중국이라는 왕조 차원을 넘어선 문화적 가치의 표현자, 전달자로 간주되어 모든 문화활동을 총괄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중국이라는 역사체, 문화체는 역사를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중략) ... 성인의 존재는 역사발전의 설명의 필요에서 만들어낸 문화창조자로서의 성격에서 도덕적 완성자로 변모하여갔고 상고적인 역사서술의 도덕적 기준을 강화하는 결과가 되었다." (민두기 편, 『중국의 역사인식 上』, 창작과비평사, 1997, 55-56쪽.)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순전」의 해당 대목, 즉 肆覲東后의 지시체는 텍스트를 쓴 사람의 믿음일 뿐,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문장의 주어가 요나 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와 순은 후대의 가치가 투영된 일종의 상징에 가깝다는 점을 꼭 염두에 두고서 『상서』를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지시체를 고려하여 肆覲東后를 번역해 보자면, "'요(혹은 순)가 동쪽의 后를 覲하였다.'고 텍스트의 저자는 믿었다."가 되어야겠지요.

따라서 저는 "肆覲東后"란 "순임금이 동쪽의 제후들을 만났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순임금이 동쪽의 왕(단군)을 알현했다."는 해석의 미결정성 문제가 여전히 남이 있다 하더라도, "肆覲東后"라는 문장의 지시체가 사실이 아니며,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전파사를 읽어낼 수"(선생님의 논문 68쪽)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없음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1. 『태백일사』에 관하여

저는 「번역의 고고학을 위하여」 68쪽에서 "이 글에서 우리는 위에 인용한 우리 측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의 기록이 사실일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려 노력했다."라는 대목을 보고, 선생님께서 『태백일사』를 역사적 사료로서 인정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에 선생님께서는 입장이 바뀌신건지요? 제가 최근에 출판된 선생님의 연구를 아직 확인하지 않아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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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논의를 전문적으로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제 생각에 이승종 교수님과 남경한씨의 기본 논지는 이미 충분히 서로 전달된 것 같습니다. "2. 『상서』의 성격과 기록의 지시체 문제"에서 써주신 '믿음'과 '사실' 사이의 구분은 철학의 영원한 문제들 중 하나라서, 아마 댓글로 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에는 걸림돌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역사학은 아니지만 성서비평학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도 특정한 성서 내용을 '믿음'으로 볼 것인지 '사실'로 볼 것인지는 (더 나아가, '믿음'과 '사실'의 이분법 자체가 애초에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아닌지는) 학자들마다 엄청나게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주제라, 아마 댓글이 계속되면 두 분 모두 지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댓글에서 여러 내용들을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다만, 원글이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를 소개하는 내용인 만큼, 역사철학과 관련된 댓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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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승종 교수님의 저서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다른 논의가 이뤄져서 아쉽습니다. 어쩌다보니 댓글을 달았을 뿐인데 이렇게 일이 커지게 될 줄 몰랐네요;; 다음에는 『크로스오버 하이데거』에 대한 의견들이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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