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존재론: 콰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블로그에 잡상을 적다가… 올빼미 선생님들의 고견을 통해 제 관점도 개선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도 옮겨놔봅니다. 공부메모 그런 건 아니고 쉬다가 적은 잡상이라 레퍼런스도 안 달려있고 문헌적 전거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지적을 환영합니다.


메타존재론: 콰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작성: 하원재 (wj@philtoday.kr), 2026년 7월 13일

슐릭부터 콰인까지, 초기 분석철학자들이 주로 한 일이 무엇이냐고 하자면, 철학적 ‘앙시엥 레짐’이 어떤 점에서 틀렸으며 그것이 어떤 ‘명증한’ 논리적 사실로써 해소되는지에 관해 하루 종일 꺼드럭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통념과 달리 분석철학은 반철학사적 철학이 아니다. 분석철학은 애당초 헤겔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되었다. 러셀은 젊은 헤겔 학파였고 카르납은 칸트 전공자였다. 후대의 콰인이 화이트헤드의 제자였다는 점은, 비록 콰인은 자기 스승이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했다지만, 이런 점에서 또 웃긴 의미심장함을 준다.

메타존재론—나는 사실 이 주제가 ‘존재론의 철학’(philosophy of ontology)으로 일컬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은 그런 꺼드럭댐의 한 산물이다. 콰인은 가상의 논쟁을 보여주며 (명시적인 이름을 안 붙인 게 그의 철학사에 대한 무관심에서 온 건지 임의의 사례로 사고실험을 하기 위함인지 잘 모르겠다) 존재론적 논쟁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론적 결약(結約, commitment)에 대한 논쟁임을 주장했다. 한편 이때 누가 무엇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결약하는지는, 그의 논리 언어가 존재 양화사 ∃의 도메인을 무엇으로 채택하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콰인의 이 언급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이후 반 인와겐이 ‘메타존재론’이라는 낱말을 조어함에 따른 것이었다. 반 인와겐은 콰인의 주장을 메타존재론으로 평가하며, 콰인의 메타존재론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 뒤 그의 메타존재론적 입장을 개진했다. 반 인와겐의 논고 내용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통상 이해되기로는 콰인의 메타존재론이란 위의 ‘존재론적 결약의 논쟁으로서 존재론적 논쟁’에 더해 ‘∃의 올바른 도메인이란 자연과학이 참조하는 대상임’을 더한 것이다.

이때 전자와 후자가 전혀 다른 성질의 논제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존재론적 논쟁의 논리적 본성’에 관한 논제이다. 한편, 후자는 ‘존재론적 논쟁을 해소하는 방법’에 관한 논제이다. 이 둘은, 반 인와겐에게도 서로 다른 문단을 통해 논해짐에도 불구하고, 최근 잘 구별되지 않은 채로 논쟁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의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존재론적 논쟁의 본성에 관해서는 콰이니언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 논쟁을 해소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콰인과 달리 급진적인 다원주의자나 관념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두 구분에 대한 무지는 최근 메타존재론 논쟁을 살짝 엉망으로 만들었다. 일단 모든 사람들이, 존재론적 결약 관점을 전통으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 ‘메타존재론’이 그 자체로 ∃에 관한 탐구로 오도된 면이 있다. 양화사 가변성(quantifier variance)에 관한 논쟁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허쉬는 양화사 가변성 논제를 주장하며, 양화사의 의미가 언어에 따라 가변적임을 주장한다. 도르, 그리고 헤일과 라이트는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양화사 가변성이 실패함을 논증한다. 사이더는, 추론주의가 배제되더라도 ‘자연의 결절’(joints of the nature)에 따라 ‘적합한’ 양화사의 의미가 단일하게 결정된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이 논쟁의 장에서, 주로 부각되는 결투는 사이더와 허쉬의 결투이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토마슨이 애매하게 위치한다.) 그런데 사이더와 허쉬는 지금 전혀 싸우고 있지 않다. 존재론적 논쟁의 본성에 관해 둘은 완벽하게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다만 그 해소 방법에 관해, 사이더는 자연의 결절을, 허쉬는 일상 언어와의 합치를 주장하며,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갈등 역시, 실제로는 본질적인 갈등이 아니다. 가령, 일상 언어의 사용이 자연의 결절을 반영한다는 관점 하에서 허쉬와 사이더의 이른바 ‘논쟁’은 수렴한다. (이런 점에서, 허쉬가 주로 상대한 논적이 사이더리안이 아닌 프레기언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한편, 이 결투와 별개로 진영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맥대니얼 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생각해 보자. 대니얼리스트들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허쉬 또는 사이더의 편일 수 있다. ‘존재의 방식’이 과학 또는 일상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어떻건 간에 존재론적 논쟁의 본성에 관해 맥대니얼은 두 사람의 정반대에 서 있다. 그에게 존재론적 논쟁이란 존재 양화사의 참조 도메인에 관한 논쟁일 수 없다. 대신, 어떤 범주들이 있는지가 존재론적 논쟁이어야 한다.

왜 그런가? 다원주의자들은 서로 의미론적 및 증명론적 본성이 다른 복수의 존재 개념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들은 왜 서로 다른가? 대니얼리스트 다원주의에 따르면, 서로 다른 범주에 대해 서로 다른 존재 개념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양화 도메인이 아닌 범주 낱말들이 된다. 어떤 범주 낱말들이 ‘존재 방식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기 적합한 범주 낱말인가? — 이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 존재론적 논쟁을 이끄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맥대니얼은 그 자신이 콰인의 메타존재론에 대한 오해를 하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존재론적 논쟁의 본성에 관한 콰이니안 입장에 반대한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 양, 자신의 이론을 ‘존재 양화사의 언어 내적 다수성’에 관한 것으로 이론화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때의 존재 양화사란, 추론적 특성에서 보건 의미론적 특성에서 보건, 이른바 ‘제약된 양화사’(restricted quantifier)의 사례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이 효력 있다면, 그것은 그가 양화사가 아닌 범주에 존재론적 논쟁의 축을 두었기 때문이었어야 한다.

두 번째 비주류 진영은 챠머스 류의 존재론적 반실재론에 기초한다. 흥미롭게도, 챠머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이더의 논적이다. 챠머스는 존재론적 논쟁의 본성에 관해서는 콰이니안인 한편, 콰이니안 의미에서의 존재론적 논쟁이 해결될 수 없는, 답 없는 논쟁임을 견지한다. 즉, 메타존재론의 두 번째 질문인, ‘존재론적 논쟁의 해소 방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론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메타존재론 자체를 콰인적 유산으로 생각할 때, 챠머스는 어떤 의미에서 ‘반메타존재론’ 입장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 관점은 아주 급진적이고, 이른바 ‘카르나피안’ 입장을 실제로 계승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형이상학적 논쟁이란 무의미하다고 본 카르납과 마찬가지로 그의 반메타존재론은 ‘콰이니안 의미의 존재론적 논쟁이란 무의미하다’라는 주장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진짜 카르나피안 적자 전통은 챠머스 전통이며, 허쉬 전통은 카르나피안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듯, 카르납 역시 입체적인 철학적 이미지를 갖고 있던 탓인데, 이 얘기는 언젠가 별도로….

따라서 이른바 사이더-허쉬 논쟁이라는 것은 반쯤 과장된 면이 있고, 그럼에도 또 자연스러운 서사를 만든다고 하겠다. 사이더와 허쉬는 통상 생각되듯 ‘각 진영의 양극’을 대표하지 않는다. 대신, 사이더와 허쉬는 ‘한나라당 대 민주당’ 정도의 대립에 참여하고 있다. 상식적인 콰이니안 메타존재론 하에서, 어떤 방법으로써 콰이니안 존재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이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평가가 사이더-허쉬 논쟁에 관한 가장 공정한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파인이 주도한 기반짓기(grounding)의 철학이나 챠머스(또!)가 촉발한 상상 가능성(conceivability)의 철학 등이 형이상학의 화두가 되며 이른바 ‘메타형이상학’이 철학의 중심에 선 실정인데, 메타존재론은 메타형이상학의 일종으로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메타형이상학과는 다른 무언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둘의 관계에 관한 적합한 평가일까? 그것은… 역시나 언젠가 별도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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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내공이 부족해서 글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박학다식함이 느껴집니다. 비문학 문제를 출제하기에 참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