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식론적 입장 간략 정리

요즘 철학 글이 안올라와서, 한 번 올려봅니다.


대중적이지만 잘못된 견해에 따르면, 니체는 진리의 존재와 세계에 접근할 인식론적으로 특권적인 방법의 존재를 부정하며, 모든 믿음은 확정된 본성이 없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많은 니체 전문가는 이러한 대중적인 견해를 비판한다. 학계의 영향력 있는 해석에 따르면, 초기 니체는 인간의 지식이 필연적으로 세계 그 자체를 위조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입장은 종종 “위조 테제”라고 불린다.
이 테제에 따르면 (1) 믿음은 오직 그것이 형이상학적 진리를 담고 있는 물자체에 대응할 경우,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참이다; (2) 하지만 우리의 인지 기관은 항상 그러한 대응 요구 조건을 만족하는 데 실패한다; 그렇기에 (3) 우리의 한낱 인간적인 지식은 세계가 그 자체로 실제로 어떠한지를 필연적으로 위조한다. 그럼에도, 학자들은 니체의 철학이 발전됨에 따라, 그가 물자체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폐기했으며, 그에 따라 진리 인식에 관한 그의 초기 회의주의적 입장도 폐기했다고 주장한다.

초기 회의주의적 입장 대신 그의 성숙한 인식론은 다음을 특징으로 하는 견해로 이동한다: (1) 현상과 실재의 구분 거부; (2) 우리의 믿음이 참이 되기 위해 대응해야 할 초월적 존재(즉, 칸트적인 물자체) 부정; (3) 그럼에도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긍정; 그러나 (4) 우리의 믿음이 이전의 믿음, 평가, 본능, 그리고 충동들로 구성된 우리의 관점에 의해 항상 조건 지어지며, 이에 따라 대상의 본성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기에,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관점주의의 도입.

관점주의에 대한 니체의 찬동이 객관적인 참이란 없으며, 세계에 접근할 인식론적으로 특권적인 방법이란 없다는 의미의 인식적 상대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후기 니체는 객관성 개념을 부정하지도, 인식론적으로 특권적인 방법의 존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에게 객관성이란 ‘신의 관점’을 채택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다양한 믿음과 관점들과 교류함으로써 성취된다: “The more affects we allow to speak about a matter, the more eyes, different eyes, we know how to bring to bear on one and the same matter, that much more complete will our ‘concept’ of this matter, our ‘objectivity’ be” (GM Ⅲ §12).

후기 니체는 인간이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그림을 달성할 가능성을 의심하면서도, 그럼에도 다양한 관점들과의 교류를 더 객관적인 믿음들을 획득하는 경로로 간주했다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니체에 따르면, 어떤 행위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현재 믿음들이 편파적이거나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며, 상이한 믿음 및 관점들과 교류하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보론 1
니체는 참된 인식이란 없고, 모든 인식은 그저 해석일 뿐이라고 봤으며, 모든 해석(과 해석 방법)은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믿지 않았나?

아니다. 니체를 그렇게 해석하면 이해하지 못할 구절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안티 크리스트>에는 해석과 사실을 분명히 구분하는 구절이 있다: "해석으로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또 이해하려는 욕구로 말미암아 신중함과 인내와 치밀함을 잃지 않고도 사실을 읽어낼 수 있는 기술 […] 잘 읽는 기술." (A 52) 나아가 이 구절에서 니체는 대상을 잘 파악하는 기술을 언급하면서, 모든 해석은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론적으로 특권적인 해석 기술 혹은 접근 방식 따위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해석적 지위와 관련해서 더 분명한 예시는 그의 이러저러한 비판에서 드러난다. 니체는 철학과 종교를 넘어 무수히 많은 것을 비판한다. 만일 니체 자신의 입장이 다른 철학과 종교적 세계 해석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면, 우리는 그의 주장을 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오직 그는 자신이 택하는 입장이나 방법론이 다른 것들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한 상태에서만 설득력 있게 비판할 수 있다.

나아가 후기 니체는 분명히 "자연주의적" 경향을 띤다. 니체가 가진 자연주의적 경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과학 이론의 설명 방식이자 이해 방식인 인과와 귀납적 추론을 받아들여 철학 이론을 펼친다; (2) 실제 과학적 결과(특히, 생리학)에 근거하여 도덕과 같은 인간의 중요한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과학적 증거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혹은 종교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하는 철학자나 기독교를 비판한다. 이를 통해 니체는 해석 사이의 위계 관계를 뒀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예시로 든 "잘 읽는 기술"을 니체는 "과학적 방법"이라며 "문화를 위한 모든 전제조건"이라고 평가한다. (A 59)

보론 2
니체는 칸트의 물자체를 어떻게 비판했는가?
후기 니체는 물자체 개념이 사고 불가능한 (inconceivable) 자기 모순적 개념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거부 주장은 <GS 354>에서 나온다: “opposition between “thing in itself” and appearance: for we “know” far too little to even be entitled to make that distinction” (GS 354, KSA 3.593). 니체의 이러한 주장은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널리 퍼진 비판과 유사하다. 즉, 칸트는 물자체를 우리의 지식 경계 밖에 있는 것으로 두기에, 그는 물자체에 대한 어떠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니체는 <GS 354>시기에 작성한 <유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Kant was no longer entitled to his distinction between “appearance” and “thing in itself” – he had denied himself the right to continue to distinguish in this old, traditional way having rejected as invalid the inference from the appearance to a cause of the appearance – in accordance with his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causality and of its purely intra-phenomenal validity” (Nachlass 1886/87, 5[4], KSA 12.186f.)
여기서 니체는 인과성 개념을 중심으로 칸트의 현상/물자체 구분을 비판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니체는 칸트가 인과성을 오직 경험적 세계의 대상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물자체가 그에 대응하는 현상을 trigger한다는 오류를 범했다는 식으로, 또 다른 널리 퍼진 칸트 비판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두 측면 해석으로 이해하더라도, 여전히 니체의 다른 구절에서 진행된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니체가 칸트의 물자체를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보론 3
니체는 우리의 믿음이 참이 되기 위해 대응해야 할 초월적 존재(즉, 칸트적인 물자체) 부정했으므로, 서로 다른 관점을 비교·대조할 수 있게 만드는 공통되거나 중립적인 기준도 부정한 셈이고, 따라서 어떤 관점(과 그에 근거한 믿음)이 다른 관점(과 그에 근거한 믿음)보다 더 참되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상에서 소개한 방식으로 후기 니체를 해석하면서도, 즉 물자체 부정을 전제한 상태에서도, 서로 다른 관점을 비교·대조할 수 있게 만드는 공통되거나 중립적인 기준이 있을 수 있다.

(1) 인식적 이해 관심의 충족: 한 관점 a에 근거한 이론 α가 다른 관점 b에 근거한 이론 β가 설명하는 것을 모두 설명하는 동시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 또한 설명한다면, 즉 관점 a에 근거한 이론 α가 (우리가) 이론에게 기대하는 바를 더 잘 충족한다면, 관점 a(와 이론 α)는 관점 b(와 이론 β)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다.
(2) 합리적 수용 가능성: 어떤 관점에 의해 부여된 믿음이 다른 믿음들과 잘 부합한다면, 그렇지 않은 믿음보다 더 우월한 것이다.

니체가 거부한 것은 단지 모든 믿음과 관점에 중립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는 초월적 참 혹은 물자체이다. 일부 영향력 있는 연구자들은 니체는 인식적 이해 관심의 충족이나 합리적 수용 가능성을 기준으로 관점들 사이의 우위를 결정할 수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참고할 만한 텍스트

Clark, Maudemarie. Nietzsche on Truth and Philosophy. Cambridge UP, 1990.

Leiter, Brian. “Perspectivism in Nietzsche’s Genealogy of Morals.” Nietzsche, Genealogy, and Morality: Essays on Nietzsche’s "On the Genealogy of Morals", edited by Richard Schach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pp. 334–357.

Riccardi, Mattia. “Nietzsche’s Critique of Kant’s Thing in Itself.” Nietzsche-Studien 39, no. 1 (2010): 333–351.

Gemes, Ken. “Nietzsche’s Critique of Truth.”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52, no. 1 (1992): 4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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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니체의 관점주의가 현대적인 인지심리학적 편향 이론과 얼마나 구별되는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욕망, 본능, 평가, 배경 믿음에 의해 세계를 본다”는 주장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확증편향, 동기화된 추론, 프레이밍 효과 등으로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관점주의가 이런 자연과학과 구별되어 오늘날에도 독자적으로 가지는 철학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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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는 현대 인지 심리학의 주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인지 심리학은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욕망, 본능, 평가, 배경 믿음에 의해 세계를 본다'라는 기술적 주장을 펼치는 것 같네요.

니체의 관점주의 또한 한편으로는 기술적 주장이지만, 니체의 이론 전체 구도를 염두에 두면 규범적 주장으로도 이어집니다. 니체의 이론 전체 구도는 다음처럼 요약될 수 있습니다.

P1. 우리는 마땅히 고귀한 문화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니체 철학 전체에 걸친 핵심적인 규범적 전제이자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
P2. 고귀한 문화 발전을 이룩을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더 나은 해석을 획득하고 그에 따라야 한다. (본문의 보론 1 및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
P3. 세계에 대한 모든 믿음(해석)은 관점 의존적이다. (본문의 관점주의 파트 및 인지 심리학이 동의하는 지점)
P4. 모든 믿음(해석)이 의존적이라는 조건(P3)에서 더 나은 해석을 얻기 위한 방법(P2)는 해석자가 자신의 현재 해석(믿음)들이 편파적이거나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며, 상이한 해석(믿음) 및 관점들과 교류하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본문의 관점주의 파트)
C. 따라서 해석자들은 자신의 현재 해석(믿음)들이 편파적이거나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며, 상이한 해석(믿음) 및 관점들과 교류하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규범적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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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4번 테제와 보론3에서의 공통-중립적-기준 테제 사이에 긴장관계를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요?

4번에서 말하는 "관점"이라는 것이, 인간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그 어떤 보편적 관점도 배제하는 급진적 관점주의라면, 개개인 별로 상이한 "믿음, 평가, 본능, 충동" 따라 상이한 가치에 우위를 둘 것이고, 그렇다면 두 이론 A, B의 소위 "설명력"을 비교하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귀납에 근거한 과학적 설명력을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요.

반면 인간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하나 이상의 보편적 관점을 인정한다면, 공통-중립적-기준을 확보하는 문제는 쉬울 수 있지만 (이론의 단순성, 논리적 무모순성 등등), 이 경우 관점주의의 급진성은 약화되고, 대신 인간적 관점의 선험적-자연적 제약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정도로 후퇴할 것입니다 (칸트, 비트겐슈타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