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를 이렇게 해석한다고?: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에 대한 단상

크리스 맥다니엘의 The Fragmentation of Being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습니다. 맥다니엘은 메타존재론에서 '존재론적 다원주의(ontological pluralism)'라는 입장을 제안하는 인물이죠. 가령, '탁자' 같은 구체적 존재자들과 '수' 같은 추상적 존재자들은 서로 다른 존재의 방식(ways of being)을 지니고 있고, 그 존재자들이 지닌 각각의 존재의 방식은 "∃c"나 " ∃a" 같은 각각의 제한된 양화사로 표현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제한된 양화사들을 '의미론적으로 원초적인(semantically primitive)' 양화사로 삼아 제한되지 않은 양화사인 "∃"를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입니다. 흥미롭게도, 맥다니엘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아퀴나스 같은 중세철학자로부터 도출할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 같은 대륙철학자와도 연결시키죠. 특별히, 맥다니엘의 대표적인 논문이자 The Fragmentation of Being의 제1장인 "Ways of Being"은 영어권 메타존재론의 전쟁터에 하이데거를 참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글입니다. 맥다니엘이 1급 분석철학자인데도 아주 독특한 형태로 하이데거를 자신의 논의에서 옹호하고 사용하다 보니, 영어권 전문 하이데거 연구자들 중에서도 맥다니엘의 논의에 관심을 가지는 인물들이 종종 있을 정도죠.

그런데 저는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하이데거 해석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네요. 큰 틀에서는 맥다니엘이 분명히 흥미로운 논의를 제시하는 것은 맞지만, 세부적 사항에서는 맥다니엘이 저로서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되는 주장을 하고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저는 양화사의 의미가 하나밖에 없다는 (반인와겐과 사이더의) '존재론적 일원주의'와 양화사의 의미가 다양할 수 있다는 (맥다니엘의) '존재론적 다원주의' 중에서는 존재론적 다원주의가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또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일종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지지한다는 해석도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맥다니엘은 자신의 존재론적 다원주의가 '존재론적 실재론'과 양립 가능할 수 있고, 또 그 입장이 하이데거의 입장이기도 하다고 강조하는데, 저는 존재론적 다원주의가 '실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까지도 동의합니다. 다만, 맥다니엘이 염두에 두고 있는 '존재론적 실재론'이란 우리의 세계에 '논리적 결(logical joints)' 혹은 '존재론적 결(ontolocial joints)'이 미리 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제한된 존재 양화사들이 그 결에 대응한다는 주장인데, 저는 이 주장이 철학적으로도 의심스러운 데다, 적어도 하이데거에 대한 해석으로는 완전히 요점에서 어긋나 버렸다고 생각해요. 우선, 맥다니엘 본인은 이렇게 말하죠.

Heidegger does not view his list of the various flavors of being as arbitrary. He intends his list to capture the real onto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 There is not a way of being for every way of demarcating the domain of the unrestricted existential quantifier. There is not a way of being had by all and only those things that are either ugly or a prime number. There is not a way of being had by all and only those things that are either under three feet tall or believe in the existence of aliens from outer space. Heidegger thinks that the ways of being he calls our attention to are metaphysically special: the restricted quantifiers that represent them enjoy a status unshared by most of their brethren. There are only a few, proud restricted quantifiers that are metaphysically basic. (McDaniel, 2017: 29, my emphasis)

A language is defective if its primitive predicates are not fundamental. It is certainly a mistake to think that language must mirror reality in the sense that one is guaranteed that there will be a correspondence between our words and the world. However, it is no mistake to think that language is in one respect defective to the extent that there is no such correspondence between word and world. Having primitive but non-fundamental predicates is one metaphysically bad feature of a language. We can generalize. Call a language metaphysically ideal just in case every primitive expression in that language has a perfectly natural meaning. (McDaniel, 2017: 30)

Arguably, this is in fact what Heidegger does: abandon ordinary language, and create and then employ a new language in which new primitive terms are introduced along with accompanying remarks to aid the reader in grasping these terms. The accompanying remarks constitute a minimal use of the terms, but one that is sufficient for these terms to latch on to any ontological joints that might be in the neighborhood. This technical language might be initially unfamiliar to us and perhaps even off-putting, but by immersing ourselves in it—by using it—we can grasp the fundamental meanings that are there to be meant. And it is in this novel language that ontological assertions are to be made and evaluated. Readers of Heidegger might be frustrated by the novel and apparently under-explained terminology that he confronts them with, but if Heidegger is trying to construct a metaphysically better language for communicating ontological results, this is unavoidable. (McDaniel, 2017: 33)

맥다니엘은 자신이 제시하는 이러한 기획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사이더의 존재론적 실재론을 만나게 하려는 시도라고 이야기합니다. "Ways of Being"의 제3절 제목인 "테어도어 사이더가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나다(Theodore Sider meets Martin Heidegger)."가 잘 드러내고 있듯이, 어떠한 언어가 자연스러운 언어이고 어떠한 언어가 자연스럽지 않은 언어인지를 기준으로 '자연의 결(joints of nature)'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더의 입장은, 서로 다른 존재자들이 서로 다른 '존재의 방식(ways of being)'에 따라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굳이 대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각각의 존재의 방식에 대한 논의가 각각의 자연의 결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각각의 존재의 방식이야말로 형이상학적으로 '기초적'이고 '자연스러운' 지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고, 그 각각의 존재의 방식에 대응하는 제한된 양화사들을 발판으로 삼아 제한되지 않은 양화사를 해명하는 언어는 '존재론어(Ontologese)'의 지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저로서는 사이더나 맥다니엘이나 '자연의 결'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너무나 손쉽게 가정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습니다. 또 (a) '실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b) '자연의 결'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스럽고요. 애초에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지는 너무나 우리의 직관에 의존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더나 맥다니엘은 굿맨의 '초랑'을 예시로 사용해서 자연스러운 언어에 대해 논의하는데, 애초에 '초랑'은 자연스러운 언어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논파하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역설이다 보니, 저로서는 두 사람이 굿맨의 예시를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적어도, 저는 하이데거가 '자연의 결'과 같은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이데거는 명확하게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인물이고, 이러한 환원에서는 초월론적 주관성과 분리된 세계의 존재 자체가 우선 판단중지의 대상이 되니까요. 오히려 (후설의 '순수 의식'이든지 하이데거 자신의 '현존재'이든지) 초월론적 주관성이 취하는 태도에 따라 세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주관성에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현상학에서 강조되는 요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다른 다양한 존재자들이 지닌 존재의 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지닌 존재의 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이유도, 현존재가 지닌 존재의 방식인 '실존'이 다른 모든 존재자들이 지닌 존재의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맥다니엘은 하이데거가 왜 '존재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달리,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자연의 결'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존재가 지닌 존재의 방식이 아닌 다른 존재의 방식에 대해서는 분석을 제시해야 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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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이더는 자연성이 더 이상 분석 불가능한 primitive notion이라고 할 거에요. 이 부분에서 저는 윤님과 비슷한 직관을 갖고 있어요. 자연성을 믿으면서 primitive하다고 하는 게 불만족스러운 것 같아요. 다만 전 그렇기 때문에 자연성질에 상응하는 보편자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되면: property F is perfectly natural if and only if there is a universal U that corresponds to F와 같은 식으로 자연성을 분석할 수 있으니깐요. 암스트롱이 Univerals: An Opinionated Introduction에서 정확히 그 이유로 보편자의 존재를 motivate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연성은 우리의 직관에 의존하면 안 되니 보편자를 받아들여야한다고요.

아마 윤님은 암스트롱의 해결책이 너무 많은 존재론적 개입을 한다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 자연성을 포기하려면 너무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데이빗 루이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For as I bear in mind considering various topics in philosophy, I notice time and again that it [the notion of naturalness] offers solutions to my problems (Lewis, "New Work for a Theory of Universals").

데이빗 루이스의 duplicate개념이라던가, 물리학에서 성공적으로 보인 근본성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만일 자연성을 포기한다면 (1) duplicate과 물리학에서 보인 근본성을 버리거나 (2) 자연성을 들이지 않고 이들을 설명해야하는데, 어느 쪽이든 만족스럽지 않고, 엄청난 논증책임을 지는 것 같아요. (최근에도 양화사 변이와 쉬운 존재론에 대해 논할 때도, 그 반실재론자들조차 근본적 언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다만 그들은 근본적 언어가 양화사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었죠.) 그렇다면 확실히 자연성을 받아들이는 게 말이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자연성을 받아들이면 윤님이 말씀하신 직관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니 보편자를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만 사이더가 직관의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 보편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제가 더 읽어봐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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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디어의 출발이 @yhk9297 님이 인용하신 루이스 논문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루이스가 거기서 자연성을 크립키의 규칙따르기 문제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긴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선언지를 포함하는 quaddition보다 addition이 더 자연스럽다(초록이 초랑보다 더 자연스럽다)는 거죠. 그런데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규칙따르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브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규칙따르기 전장에서 이것을 진지한 해결책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참조: Rule-Following and Intentionalit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이 주장을 조금 세련되게 표현한다면

애초에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지는 우리가 어떤 개념적 도식이나 언어를 선택하는가의 문제에 의존적이다

와 같이 카르납적인 다원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자연성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실질적인 쟁점은 아닌 것 같고, 이 자연성이 개념적 도식에 의존적인지 아니면 세계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근-본 논쟁점으로 결국 회귀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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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루이스의 "New Work for a Theory of Universals"로 분석철학 전공자분들과 약간의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크립키식의 회의적 역설이야말로 애초에 보편자 같은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증인데 왜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보편자를 끌어들이려 하냐면서 의아해하였고, 다른 분석철학 전공자분들은 보편자가 있으면 해결이 되는데 왜 보편자가 없다고 하느냐고 의아해하였습니다. 짧게 스쳐 지나간 토론이라 더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규칙 따르기와 회의적 역설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진영과 그 주제를 보편자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진영 사이에 어떤 '심각한 오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순간으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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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생각해 보니, 그 토론 직후에 썼던 게 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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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현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자연성의 여부가 개념적 도식이나 언어에 대한 선택에 의존적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 같거든요. 왜냐면 보통 사람들은 (그리고 저도) 자연성이란 우리의 언어적/철학적 활동과 독립적인 무언가로 이해하고 있으니깐요. 애초에 개념적 도식이나 언어에 대한 선택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비자연성을 논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이해하기로 윤님은 자연성에 대한 다른 문제를 논하고 계신 것 같아요. 자연성 자체가 분석이 어려우니 자연성 자체를 폐기하자는 주장이요. 그래서

자연성을 폐기하는지 말지는 (이 포스팅에서는) 실질적인 쟁점이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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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yhk9297 님과 @Herb 님 두 분의 입장에 절반씩 동의가 되네요.

일단, 저는 @yhk9297 님이 이해하신 것처럼 '자연성'이나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론 논쟁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 자체에 대해서 의문스럽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또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지는 너무나 우리의 직관에 의존적인 문제"라고 하였을 때도, 곧바로 신카르납주의적인 '개념적 도식'을 떠올린 것은 아니고, 단지 "자연성이나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정도의 주장만을 의도하기는 하였어요.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제가 지지하는 존재론적 입장 자체는 @Herb 님이 말씀하신 입장이긴 해요. 우리가 '자연성'이나 '자연스러움'을 말해야 한다면, 그 개념을 말하기 위해 굳이 개념 독립적이고 언어 독립적인 실재가 요구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해요. 우리가 자연스럽게 추론하는 방식, 자연스럽게 행위하는 방식,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성'이나 '자연스러움'을 얼마든지 보증할 수 있다고 보아서요. (a) 우리가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 무엇인가가 '우리 바깥에' 일종의 사물 자체처럼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도출되지 않을 뿐더러, (b)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무엇인가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라기보다는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는 실재라고 해도 실재론이 얼마든지 옹호될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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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근데 이건 '자연성'의 ambiguity에서 오는 혼동 아닌가요? '자연성'은 (1) 말 그대로 세상 혹은 자연과 관련된 자연성이 있고 (2)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갖는 자연성도 있지요. 물론 이 둘이 의미가 비슷하고 etymological하게 보면 연결이 돼있긴 하지만, 결국 엄밀히 따지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1) 이 성립하고 (2)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예를 들어 양자역학이 그렇겠지요), (2)가 성립하고 (1)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예를 들어 영어라는 언어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울 수 있겠지만 영어라는 언어가 자연의 결을 따라 자를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제가 이해하기로 형이상학/메타형이상학에서 쓰는 자연성은 (1)로써의 자연성인 것 같아요. 다시 말하면,

여기서 논하시는 자연성은 (2)로써의 자연성이고, (2)로써의 자연성이 언어독립적인 실재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지요. 하지만 저희가 논하고 있는 (혹은 논해야하는) 자연성은 (1)로써의 자연성이기 때문에 위 주장이 성립하기 힘들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칸트를 따라 초월론적 관념론을 따라가면 문제가 복잡해질 순 있겠다만... 전 칸트 역시 '개념독립적인 실재'를 상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칸트가 암스르롱식 실재론적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이를 설명하려면 초월론적 관념론을 설명하고, 어떤 개념을 논하는 것인지를 설명하고, 독립성이 정확히 뭔지도 논해야겠죠. Schematism과 직관에 대해서 논해야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러면 해석적 여지가 너무 커지고, 여기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주장을 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논의를 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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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혼동이 아니라 "자연성(naturalness)"이라는 말을 분석 형이상학자들이 종종 너무나 손쉽게 "실재성(reality)"라는 말과, 특별히 "인간 독립적 실재성"이라는 말과 동일시해버린다고 생각해요. 칸트를 잘 언급해 주신 것처럼,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원칙론에서 순수이성의 최상의 원칙들을 바탕으로 자연이나 실재를 재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하잖아요. 저는 바로 이 입장이 (적어도 그 요지에 있어서만큼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과 행위하는 방식이 우선이고, 그 방식에 따라 자연과 실재가 규정된다는 생각이에요. 이게 사실 (맥다니엘의 생각과는 달리) 하이데거가 '자연의 결'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현존재 분석만으로도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제시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또 비트겐슈타인이 '사람의 자연사'라는 개념을 강조할 때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고, 브랜덤 같은 인물들이 '암묵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실재론을 옹호하려 할 때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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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지요. 물론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부분에서는 저와 윤님의 칸트 해석이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개개인의 생각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의 구조를 상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칸트의 주체는 초월론적 주체니깐요. 그렇게 되면 현대 형이상학에서 논하는 자연성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조금은 다르겠네요. 이 웹사이트에서 자주 거론된 Truthmaker같은 테제는 세상이 명제보다 형이상학적으로 우선성을 띈다고 하니깐요. 이 해석에 있어서 칸트는 아마 문장과 실재 사이의 형이상학적 우선성은 부정하겠지만 세상보다 일부 명제가 형이상학적으로 우선성을 띈다라고 할 것 같습니다. 이 차이가 어떤 implication을 가질지 궁금하네요.)

칸트는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 (범주) 이 있고 비자연적인 것 (예: 범주들로 만들어낸 gruesome한 개념들) 이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칸트는 자연성을 비자연성으로부터 구분해야하는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여기서 칸트는 형이상학적 연역을 통해 답을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Concept C is perfectly natural (i.e. C is in the table of categories) if and only if C is derived from judgment J in the table of judgments.

라고 하게된다면 privileged된 판단들이 있다는 전제를 해야되며, 그렇게 되면 privileged된 판단을 그렇지 않은 판단으로부터 구분을 해야한다는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 연역으로 답을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는 결국 사이더처럼 자연성을 primitive하다고 하던가, 암스트롱처럼 보편자를 상정하던가, trope를 상정하던가 해야할 것 같습니다.

댓글로 다루기엔 너무 복잡해보여서 일부러 피하고 있었는데, 정작 얘기해보니 굉장히 흥미롭게 진행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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