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제 유튜브 추천 목록에 윌리엄 크레이그와 알렉스 오코너의 신 존재 논쟁 영상이 올라와서 절반 조금 넘게 들어보았습니다. 크레이그는 대표적인 기독교 형이상학자이고, 오코너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으로 학위를 받은 영어권의 유명한 불가지론적 무신론 유튜버이죠. 제 영어 듣기 실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데다, 또 두 사람이 다루는 내용 중에 저에게 다소 낯선 것도 있어서 세부 사항을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하였지만, 대략 '신은 존재하는가?'와 '기독교의 신 믿을 만한가?'라는 주제로 시작하여서, '칼람 우주론 논증'에 초점을 맞추다가, 시간에 대한 A-이론과 B-이론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네요. 크레이그의 칼람 우주론 논증은 시간에 대한 A-이론을 전제로 성립하는데, 오코너는 B-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을 제기하고요. 시간에 유한한 시작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가 둘 사이의 핵심 쟁점이네요. 짧게 소감을 남겨보자면,
(1) 솔직히, 논의가 좀 산으로 간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신 존재 논쟁'이라는 주제에서 점점 벗어나 일반 형이상학 논쟁이 되어버리니까요. 게다가 크레이그는 서두 부분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여섯 가지 논증과 예수의 부활을 뒷받침하는 네 가지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데, 결국 그 중 대부분은 다루어지지 않고 시간에 대한 A-이론과 B-이론에만 초점이 맞춰지네요.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형이상학 논쟁보다는, 실제 종교 전통과 종교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이 오늘날 현실에서 '유의미'할 수 있는지에 더욱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이 논쟁이 과연 '신'이나 '종교'에 대한 논쟁인지가 의문스럽습니다. 물론, '신'이라는 화두를 주제로 형이상학적 사변을 전개하는 것이 거부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두 사람의 논쟁에서 '신'이라는 주제를 빼버려도 그다지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아서요.
(2) 문제는 이 논쟁이 '신'을 벗어나서 '시간'에 대한 A-이론과 B-이론을 둘러싼 형이상학 논쟁이 되어버린다면, 과연 이 논쟁이 얼마나 생산성이 있을지가 다소 의문스럽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형이상학은 너무 세분화된 분야가 되어버려서, 시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도 굉장히 많은 하위 주제들과 쟁점들이 있죠. 가령, 아서 프라이어의 "그게 끝났다니 다행이야!" 논증(The "Thank Goodness That's Over" Argument) 같은 경우, "그게 끝났다니 다행이야!"라는 말이 유의미할 수 있으려면 A-이론이 옹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B-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저 말을 B-이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려 하고, A-이론은 반대로 그 대안들이 정당한지에 대한 재반박을 제시하려 하죠. 그런데 이런 온갖 세세한 가설들과 대안들과 재반박들을, 공개 토론의 형식으로 논의해서 한쪽이 다른 쪽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작업일지 저로서는 좀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물론, 크레이그는 A-이론을 옹호하는 학술서도 쓴 인물인 만큼, 그 이론을 전문적으로 다룰 만한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레이그라는 개인이 A-이론을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코너 역시 B-이론을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2시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저렇게 큰 주제를 별다른 조율도 없이 즉석에서 다루는 것이 크게 생산성 있어 보이지는 않아서요.
비슷한 이유에서 저도 "철학적 변증"이 흥미로운 건 둘째치고 실천적 측면에서 큰 유익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게 흥미로운 것도 그냥 일반 철학적인 관심이 있을 때나 흥미로운 것 같고요. 비록, 이러저러한 신적 속성을 가진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순 있겠지만 저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물 하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역 논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ㅋㅋ
별개로 크레이그의 논증을 면밀히 따져보고 자비롭게 해석하려 시도를 해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크레이그의 논증이 성공적인지 여부는 거의 전적으로 시간에 대한 A-이론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대략적으로 말해) "어떤 것이 시간 t에서 존재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이 존재하게끔 야기한 원이이 존재한다"가 B-이론을 가정하고도 주장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영미권의 대중 종교 토론판에 관심이 있었던 입장에서, 크레이그 뿐 아니라 두 사람을 모두 변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은 둘의 이번 논쟁을 전혀 시청하지 않은 상태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대충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대화가 A이론이냐 B이론이냐에 맞춰졌다면, 주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말에도 공감이 갑니다.
제가 바라보는 영미권 종교 토론판은 학계 발표회와는 아주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맥락상 이곳은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UFC 무대입니다. 각 토론자들은 팬덤과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이 팬덤들은 전문적으로 철학을 배웠거나, 해당 논의를 직접 연구하거나 펼칠 능력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토론을 듣고 이해하고 즐길 정도는 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실제로 격투기를 해보지 않았거나, 생활 체육 수준이더라도 UFC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요.
이들이 좋아하는 건 토론 내용의 합리성보다는 캐릭터성과 맥락입니다. 요컨대, 크레이그와 오코너는 이전에 줌 토론을 통해 칼람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 몇번이고 디스커션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팬들은 누가 밀렸니, 잘했니부터 시작해서 둘의 대화에 대해 따져보기도 하고, 유희로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을 아는 저는 이 토론이 일어난다는 예고만 보고도 대부분의 논의가 칼람 논증, 그 중에서도 세부적인 몇몇 사안에 집중될 것을 예상했습니다.
크레이그는 같은 주제로 이런 공개 토론을 최소 수십 차례는 벌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원래 그는 박사급 이상이 아니면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는 기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를 지나며 유튜브에서 소위 계급장 없이 토론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아무 학위가 없는 변증 유튜버가 무신론 철학 대가와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레이그도 이에 참여했으나, 오프라인 무대에서 알렉스와 같은 유튜버와 공개 토론을 한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을 아는 사람들, 특히 알렉스 또한 좋아하는 저 같은 입장에선 그것만으로 꽤 고무적이었습니다.
아마 이쯤이면 그뭔씹이라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제가 격투기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번달에 백악관에서 열리는 UFC 이벤트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떠들어도 똑같은 소리를 듣겠지요. 변증판, 종교 토론판은 그런 곳입니다. 학계에 속한 이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계가 아니지요.
저는 그래서 이 판을 좋아합니다. 재미, 맥락, 캐릭터성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실제로 논증을 듣고 더 깊이 생각해보거나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도 하겠지요. 물론 딱 이번 토론만 본 사람에겐 전혀 유익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년 째 이 씬을 지켜보던 사람, 크레이그와 알렉스의 서사를 아는 사람에겐 굉장히 재미있고 유익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기대한 것이 아마 칼람 세부조항에 대한 공방이었을테니까요.
제가 홀리컴뱃을 만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토론 몇번 시청으로 어마어마한 인식 변화나, 선교 효과 등을 꿈꾸는 건 도둑놈 심보입니다. 그냥 이런 것도 재미있을 수 있구나. 캐릭터성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구나. 그러다가 몇몇 논의에 꽂혀서 배움을 얻을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제 의도를 훨씬 거대하게 봐주시는 분들이 욕을 하고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저처럼 재미로 영미 종교 토론판을 따라가는 사람이 한국에선 거의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저런 걸 재미로 즐길 사람들이 꽤 많은 그 씬이 좀 부럽기도 하구요.
반론을 하거나 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오랫동안 좋아하는 주제가 나와서 길게 얘기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