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주관성이 반성성을 "논리적으로" 함축하는가? (혹은 불필요한 기호화의 폐해)

『헤겔의 체계』 중 한 부분에서, 비토리오 회슬레(Vittorio Hösle)는 상호주관성 개념과 반성성 개념이 상보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유의 근거에 대한 사유 자신의 반성이라는 주관적 반성성(reflexivity) 구조를 철저하게 밀고 나가 사유의 최후정초(Letztbegründung)를 자기정초(Selbstbegründung)로써 완성하고자 한 헤겔 철학이 상호주관성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변논리적인 층위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하며, 주체-객체 구도에 머물러 있는 헤겔 논리학이 주체-주체 관계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회슬레는 독일관념론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철학 전통에서도 상호주관성 관계가 그 스스로 정당화되지 않고 단순히 무반성적으로 전제될 뿐이라고 비판하며, 주관의 반성성으로부터 도출된 상호주관성 개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나아가 그는 상호주관성이 이미 논리적으로 반성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반성성은 간주관적[상호주관적] 구조의 결과로 쉽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 상호인정의 개념, 즉 대칭적이면서도 타동적인 관계(symmetrische und transitive Relation)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한 관계의 계기인 대칭성과 타동성으로부터는 매개된 반성성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타동성을 함축하는 논리적 관계인 R(a, b)∧R(b, c)⊃R(a, c)와 대칭성을 보증하는 언명인 R(a, b)∧R(b, a)가 타당하다면, c에 a를 대입할 경우, 바로 R(a, a)가, 즉 관계 R의 반성성이 타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Hösle, V. (2007). 『헤겔의 체계 1』(권대중 역), 한길사.)

상호주관성이 무반성적으로 전제되지 않고 그 스스로 주관적으로 반성될 수 있어야 한다는 회슬레의 논지에는 동의가 된다. 하지만 상호주관성이 단순히 이러저러하게 논리적으로 기호화될 수 있고, 그로부터 반성성이 형식적으로 따라나온다는 회슬레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일단 상항과 변항을 잘 구별하고 양화 표현을 넣어서 회슬레의 정식화를 좀더 다듬어 보면

대칭성(symmetricity): (∀x)(∀y)(Rxy & Ryx)
이행성(transitivity): (∀x)(∀y)(∀z)[(Rxy & Ryz) → Rxz]

이다. 그런데 일단 대칭적 관계의 정의는 위의 저 진술이 아니라

(∀x)(∀y)(Rxy → Ryz)

이다. 그리고 (∀x)(∀y)(∀z)[(Rxy & Ryz) → Rxz]와 (∀x)(∀y)(Rxy → Ryx)의 연언에서는 반성성

(∀x)Rxx

같은 것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형제 관계를 예시로 들어보자. a가 b의 형제라면 b도 a의 형제이다. 또 a가 b의 형제이고, b가 c의 형제라면, a는 c의 형제이다. 그러나 a는 a의 형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관계가 대칭성, 이행성을 충족했다고 해서 그로부터 그 관계가 자동으로 반성적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대칭성, 이행성, 반성성을 모두 갖춘 관계를 우리는 동치(equivalence) 관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회슬레는 어떤 관계가 대칭성, 이행성을 충족하면 그 관계가 자동적으로 동치(!)라고 주장한 것이다.

회슬레가 제시한

(∀x)(∀y)(Rxy & Ryx)

를 받아들여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이 진술은 대칭성보다 강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이를 (∀x)(∀y)(∀z)[(Rxy & Ryz) → Rxz]와 결합해도 여전히 회슬레가 원하는 (∀x)Rxx가 도출되지 않는다. 조건을 더 강하게 설정해서 x, y, z가 모두 같은 집합에 속한다고 하자. x, y, z가 모두 A회사 직원의 원소를 가리키는 변항이라고 하고, R을 "x는 y의 직장동료이다"라고 해보자. 그래도 Rxx는 나오지 않는다. a, b, c가 모두 같은 회사 직장동료라고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의 직장동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x)Rxx는 나머지 두 조건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추가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회슬레가 인정개념, 즉 x가 y를 자기와 같은 주체로 인정하는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참작할 수 있다. 이때 (1) 내가 타인을 주체로 인정하면 타인도 나를 주체로 인정한다는 점, (2) 내가 타인을 주체로 인정하고 타인이 제3자를 주체로 인정하면 나도 그를 주체로 인정한다는 점, (3) 나도 나 자신을 주체로 인정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인정개념이 갖고 있는 실질적인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이지, (1)과 (2)로부터 (3)이 형식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헤겔의 체계 전반 및 그 체계의 각 부분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성격규정을 제시한 회슬레가 왜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기호화를 도입해서 이상한 논증을 펼쳤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불필요한 형식화보다도 상호주관성이 어떤 실질적 조건을 갖는지, 그래서 상호주관성이 왜 그 개념의 내용상 반성적 주체성을 필요로 하는지를 논증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14개의 좋아요

대칭성이라는 논리적 성질에 대한 이해 자체는 잘못된 게 맞는데, 회슬레가 잘못 이해한 식으로부터는 (∀x)Rxx 가 바로 따라 나오긴 합니다.

x, y, z가 모두 A회사 직원의 원소를 가리키는 변항이라고 하고, R을 "x는 y의 직장동료이다"라고 해보자. 그래도 Rxx는 나오지 않는다. a, b, c가 모두 같은 회사 직장동료라고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의 직장동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x)Rxx는 나머지 두 조건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추가되어야 한다.

요 예시가 보여주는 건 "x는 y의 직장동료이다"가 (∀x)(∀y)(Rxy & Ryx) 이걸 만족하지 않는 관계술어라는 것이라 반례로 쓰이긴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회슬레 정도면 꽤 대단한 학자 아닌가요? 대칭성을 왜 저렇게 이해했을까요..

---추가
만약 대칭성을 (∀x)(∀y)(Rxy → Ryz) 이렇게 두고도 회슬레가 말한 "매개된 반성성"이 도출된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해볼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한 가지 가능한 추정은 회슬레가 R이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가진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Seriality: (∀x)(∃y)Rxy

이러면 원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긴 하군요..

5개의 좋아요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 달아주신 걸 보고 찾아보니, 제가 각기 다른 보편양화사를 예화할 때 꼭 서로 다른 대체예가 들어가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회사 직장 동료 예시도 그런 생각에서 나왔던 잘못된 반례였던 것 같네요.

(∀x)(∀y)(Rxy & Ryx)로부터는 (∀x)(∀y)(∀z)[(Rxy & Ryz) → Rxz]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그냥 바로 (∀x)Rxx가 도출되는 것 같습니다.

  1. (∀x)(∀y)(Rxy & Ryx) (전제)
  2. (∀y)Ray (1, ∀제거, x:=a)
  3. Raa (2, ∀제거, y:=a)
  4. (∀x)Rxx (3, ∀도입)

(혹시 증명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집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이렇더라도 회슬레가 의도하는 "상호주관성이 반성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잘 표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 한 진술에서 반성성이 바로 따라나온다면 굳이 이행적인 관계는 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남아서요.

한편

말씀대로 대칭성, 이행성에 연쇄성을 추가하니 회슬레 자신이 제시한 버전보다 깔끔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연쇄성과 더불어 대칭성과 이행성을 모두 사용해야 반성성이 도출된다는 점 때문에 왜 굳이 대칭적이면서도 이행적인 관계가 필요한지도 설명되는 것 같습니다.

1. (∀x)(∀y)(Rxy→Ryx) (대칭성)
2. (∀x)(∃y)Rxy (연쇄성)
3. (∀x)(∀y)(∀z)[(Rxy&Ryz)→Rxz] (이행성)
4.1. (∃y)Ray (2, ∀제거, x:=a)
4.1.1. Rab (4, ∃제거, y=b)
4.1.2. Rab→Rba (1, ∀제거)
4.1.3. Rba (5, 6, →제거)
4.1.4. Rab&Rba (5, 7, &도입)
4.1.5. (Rab&Rba)→Raa (3, ∀제거)
4.1.6. Raa (8, 9, →제거)
4.2. Raa (∃도입?)
5. (∀x)Rxx (10, ∀도입)

좋은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회슬레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했는지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네요!

Ps. 양화사의 제거와 도입에 대해서는 (원래 조건문과 관련해서 제시된 표기법인) 다음의 표기법을 활용해봤습니다.

Ps. Ps. 보통 양화사를 예화해서 제거한 다음에 도출하려는 식이 나오면 다시 양화사를 도입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위처럼 중간에 재도입할 존재양화사가 아예 없어져 버리는 경우는 통상적으로 어떻게 처리하나요? :sweat_smile: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개의 좋아요

회슬레의 형식화 오류와 별개로, 헤겔 철학을 오늘날의 (특히 기초적인) 형식논리학으로 형식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겔에게 형식논리는 한갓 지성의 사유방식일 뿐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거부되지는 않지만) 상위의 사유규정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양되어야 할 것인데 말이죠. 헤겔 혹은 헤겔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결국 세련된 상위의 논리학(=헤겔의 대논리학)을 조악한 하위의 논리학(=형식논리학)의 프레임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과정이고 따라서,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형식논리학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소위 헤겔철학의 진면목들이 댕강댕강 잘려나갈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까요?

물론 현대철학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논리적 형식화가 점점 더 권장되고 또 이러한 형식화가 많은 경우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누군가가 대논리학의 범주들을 (기초적인 혹은 세련된) 형식논리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야망을 내비친다면, 저 역시 혹해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것 같습니다 (양진주의적 해석에서처럼 말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도들이 결국 그 끝이 새드엔딩으로 정해진 게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서는 칸트연구 역시 마찬가지겠네요. 헤겔(대논리학)과 칸트(선험적 논리학) 모두 자신들의 논리학이 그 철학적 성격에 있어서 형식논리학과 구별된다고/되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했는데, 이러한 언급들이 때로는 너무 가볍게 취급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7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