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학과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정신분석학자 백상현 선생님의 유튜브를 종종 보는데, 흥미로운 강의안이 올라와 있네요. 칼 바르트의 신학과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교하면서, '빅 데이터'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예측하려 하는 우리 시대 주류 학문의 시도가 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왜 제가 칼 바르트를 골랐는지, 변증법적 신학의 아버지이자 그 이전까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었던 것을 단칼에 배격하고 결국 "신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었던 칼 바르트에게 왜 주목하고 있는지, 특히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지를, 저처럼 무신론자인 사람이 왜 칼 바르트를 이토록 좋아하는지를, 제가 이 강의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그것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지금 해 드릴게요.

칼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혹은 자연주의 신학에 대해 반박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 너희는 땅에 있다." 이 말로 정리를 하는 거죠.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읽어보시면, 주장이 빡빡하기 때문에, "그냥 신앙이 워낙 깊어서, 인간의 이론이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자기 주장만 하는 목사 이야기 아니야?"라고 이해하실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칼 바르트는 철학에 대해 굉장히 정교하고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철학의 영역을 완전히 주파하고 난 뒤에 칼 바르트가 도달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론의 세계의 내부에는, 합리적인 데이터의 구조의 세계 내부에는, 분명히 균열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 균열점이 그 구조를 완벽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즉, "너희는 땅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인간의 이성으로 작동하는 세계는 유한성의 세계라는 거예요. 그리고 유한성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신은 하늘에 있다." '신'이란 말을 '진리'로 바꿔볼게요. 진리는 그 시스템 안에 없다는 거예요. 유한성 안에 있는 합리적인 판단을 '진리'라고 부를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알고리즘은 붕괴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알고리즘은 언제나 한계를 가지고 있고, 알고리즘 내부에 내재하는 균열 때문에 임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왜 알고리즘이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로우 데이터를 다 억압해가면서 만들어 낸 정제된 지식들은, 로우 데이터가 쌓여 가면서 만들어 내는 실재의 억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에요.

바르트에 대한 백상현 선생님의 설명이 대체로 매우 훌륭한데, 그래도 저는 이 설명이 바르트의 한쪽 측면에 강조점을 너무 많이 두는 것 같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바르트의 신학이 분명히 모든 체계와 질서를 깨부수는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의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타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요. 오히려 『교회교의학』 같은 저서에서 바르트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을 비판하면서, 철학적 신앙이 상정하는 타자로서의 신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신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하거든요. 무조건 체계와 질서를 부수는 신에 대해 사유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종류의 긍정적 방향성도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는 거죠. (로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르트는 '대문자 진리'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소문자 진리'로서의 신은 매우 강하게 긍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로마서 강해』 제2판에만 한정하자면, 위의 강의에서 백상현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는 내용이 거의 대체로 맞습니다. 게다가 바르트 신학을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연결지어서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는 시도는 참 신선하네요. 바르트 신학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으로서, 신학 바깥에서 이런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정말로 반갑습니다.

4개의 좋아요

영상이 너무 길고 신학을 잘 몰라서 시청이 조금 어렵네요. 혹시 알고리즘이 정확히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또, "실재의 억압" 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알고리즘이 억압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마치 알고리즘이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만일 비유적인 표현이라면 비유를 쓰지 않고 어떻게 알고리즘의 한계를 주장할 수 있나요?

1개의 좋아요

영상에서는 데이터 과학을 비판의 타겟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논의들은 좀 더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철학의 용어로는 '표상주의' 혹은 '진리 대응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 어딘가에 '세계'라는 영역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그 세계를 완벽한 '이론'을 통해 그려낼 수 있고, 그 이론과 세계가 일치할 때 그 이론이 '진리'로 인정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말이에요. 유발 하라리 같은 대중 지식인들이 빅 데이터를 찬양하면서, 언젠가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말할 때, 그 지식인들은 표상주의적이고 진리 대응론적인 철학적 가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백상현 선생님의 지적이라고 저는 이해했어요.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신학이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어떤 근거로 '표상주의'나 '진리 대응론'을 비판하는가 하면, (사실 저 영상 자체만으로는 좀 설명이 단순화되어 있기는 한데) 우리가 만들어 낸 '이론'이라는 것이 결국 세계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측면들을 억지로 추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세계와 있는 그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이 지적하는 핵심 문제이죠. 세계는 훨씬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요소들로 가득한데, 이론은 아주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론과 세계 사이에서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간극이 누적되면 누적될 수록 이론은 세계로부터 점점 더 괴리된다는 거죠.

3개의 좋아요

아, 그렇군요.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지극히 흄/쇼펜하우어식의 주장이고, 굳이 정신분석학과 억압의 개념을 들여야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신분석학과 같은 논란이 많은 이론으로 주장을 하면서 unnecessary room for objections를 만드는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주장 자체는 이해가 되네요.

1개의 좋아요

맞습니다! 다만, 흄/쇼펜하우어식 주장과 분명히 공명하는 지점이 있긴 한데, 사실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저는 바르트와 라캉의 논의에 서로 차별점도 존재하고 각각의 특색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엄밀히 말하자면, 두 인물이 '세계/이론'이라는 이분법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서요. '세계/이론'이라는 구도로 두 인물의 입장을 간략하게 일반화시키는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만 하면 각자가 주장하는 요점들에서 개성적인 면모들이 너무 많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죠. 가령,

(1) 바르트 같은 경우는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해석의 원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요. 이 원칙은 나중에 가다머 같은 철학자에게는 "텍스트가 말한다(Der Text spricht)"라는 원칙으로 변형된 형태로 수용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성서를 비롯해서 모든 텍스트에 대한 정당한 해석은 우리가 그 텍스트에서 듣고 싶은 내용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그 텍스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원칙이죠. 한 마디로, '답정너' 식으로 해석자가 미리 답을 정해 놓고서 텍스트에서 그 답을 뽑아내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게 바르트나 가다머의 핵심 주장이고, 이 사람들은 바로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정당한 텍스트 해석의 사건이 이루어진다면, 그 해석의 사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 선입견을 언제나 깨부수는 방식의 '타자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는 거죠. 세계/이론의 도식으로 치환하자면, 정말로 세계에 엄격하게 주목하고자 하는 이론은 세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깨부숴지고 갱신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예전에 제 석사 지도교수님은 가톨릭 사제분이셨는데, 바르트의 이런 면모 때문에 "칼 바르트는 거의 뭐 철학적 해석학자이지!"라고 평가하시기도 하더라고요.)

(2) 라캉은 '상징계'라는 언어적 구조가 사실 아무런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논의를 전개하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들의 근거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그 믿음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그건 원래 그래!", "넌 뭐 그런 걸 질문하니?", "그걸 모르겠다고 하면 넌 정상이 아닌 거야!"와 같이 사회적 권위가 우리를 찍어 누르는 지점에 도달한다는 거죠. 라캉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 지점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들'이라는 권위에 따라 우리를 억압하는 지점들이고, 그 권위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믿음들이 마치 이 세계의 진리인 것처럼 '환상'을 갖게 된다는 거죠. 실제로는 최종적인 믿음들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증하는 (라캉이 '대타자'라고 부르는) 아무런 토대도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언어적 믿음들이 사실 '환상'이고 우리가 토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공백'일 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 언어에 반드시 얽매일 필요가 없이 새로운 언어를 창출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게 라캉의 주장이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동안 '언어' 속에서 배제되고 억압되어 왔다는 거죠. 이론/세계의 도식으로 환원해서 단순화하자면, 라캉의 구도에서는 '세계'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것은 '이론'일 뿐인 거죠. (혹은 '이론'이 곧 '상징계'라는 세계인 거죠.) 그래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가 폭로되는 순간이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이론이 얼마든지 다시 짜일 수 있다는 진리가 폭로되는 순간이기도 한 거고요.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