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아마도 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분들은 유학을 한 번 쯤 생각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학문적 야망 때문에서든 현실적인 커리어를 위해서든 말입니다.
어느 학교가 좋고 어떤 교수가 좋고 하는 얘기는 이곳저곳에서 많이 듣지만
유학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듣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제 햇수로 고작 2년 차이지만 만약 제 후배가 유학을 나온다면 무슨 얘길 해줄까 하는 생각으로 몇 자 적어봅니다. 저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고 제 경험은 특정 지역에 한정되는 경험입니다. 다른 곳에서 유학 중인 다른 선생님들도 경험과 의견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엔 일반적으로 유학에 대한 이야기나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학업에 관련한 부분(연구계획, 지도교수 전공핏 등)과 재정에 관한 부분(장학금, TA 등)에 거의 대부분의 관심이 쏠릴 것입니다.
저는 다른 부분들을 건드려볼까 합니다. 두서없이 쓰니 양해 바랍니다.

우선 생활이라는 게 그냥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건 자취해보신 분들은 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맨 처음부터는 집도 구해야 할 것이고, 한국에서는 이미 설치가 되어 있거나 딸-깍해서 신청할 수 있는 전기, 가스, 인터넷, 수도 등 중 일부를 직접 계약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기숙사생이 아닌 세입자가 된다면 집 관리에도 품이 듭니다. 자취할 때부터 이것저것 손으로 고쳐보고 곰팡이나 습기 관리를 늘 신경쓰면서 살아본 게 아니라면 집 관리 자체가 품이 많이 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집이 어떤 곳이냐에 따라서도 말이죠.

이웃과의 소통이나 집주인과 이야기하는 것 등등은 당연히 외국어로 진행이 될 겁니다. 토플이나 철학책에서는 본 적 없던 많은 단어와 표현들이 등장할 것이고 대화상황은 가만히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응답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책임을 가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자기를 방어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현지어 혹은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학문적인 영역 밖의 일상업무 회화를 커버할 정도가 아니라면 언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조금 늘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세요. 주방에 있는 도구와 재료들의 이름과 요리하는 과정을 외국어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지, 최근에 어떤 업체에 전화로 문의했던 내용을 외국어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지 등이요.)

저처럼 내향적인 인간은 네트워크를 쌓는 것도 품이 많이 들 것입니다.
사실 한국에서야 언어 장벽도 없고 의사소통 방식도 익숙하니
종종 부대끼는 행사나 학과 모임에서 술도 한 잔하고, 고기도 먹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곤 할 텐데요.
제가 느끼기엔 해외에서는 그런 자연스러운 모임을 갖기가 생각보다 많지 않고, 그렇기에 더 적극적으로 네트워킹을 시도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말 걸고, 적당히 웃기고, 연구 이야기도 먼저 꺼내는 등등요. 사실 자연스러운 모임은 그들끼리는 있을지도 모르죠. 언어가 능숙치 못한 외국인을 "자연스러운 모임"에 끼게 하는 건 그들에게도 그다지 선호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재정적으로 풀펀딩을 받는 분들이라면 한결 걱정을 덜 것입니다만, 어쩌면 긴 유학생활을 충당하기에 펀딩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펀딩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왜냐하면 잘 아시겠지만 삶이란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없이 갑자기 아플 수도 있고, 급히 한국에 방문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죠. 이런저런 문제로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하거나 수리 비용을 내야 할 수도 있고요. 사회생활에 필요한 선물, 식사초대 등등에서 나가는 돈을 아끼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배우자나 아이가 있다면 모든 재정적 결단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할 수도 없을 테고요.
한국에서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재정적 플랜B를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하지만 또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하기가 대단히 수월하진 않겠지요. 시간과 체력을 할애해야 하고,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기본적으로 바쁜 업장에서 소통에 문제가 안 될만큼은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할 겁니다.

또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가까이에 둘 수 없다는 겁니다.
절친한 친구의 결혼도,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가족/친구의 병환이나 경사도 함께하지 못하고 멀리서 마음만 보낼 뿐입니다. 언제든지 한국행 비행기표를 살 수 있는 분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생각보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 쌓이는 데미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자평하건데 꽤 무던한 사람이고, 감정기복이나 환경변화에 영향을 많이 안 받는 편인데도
늘 보고싶어 하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친했던 사람들과의 괴리감,
해외 살이에서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무능력함과 자괴감,
체류비자를 무사히 유지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거기에 만일 연구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쌓이니
펀치드렁크가 온 복싱선수처럼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은 멍한 기분에 하루종일 빠져 있기도 합니다.

"유학 하지 말고 한국에 계세요"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유학은 모든 걸 다 완벽하게 준비한 뒤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유학생활 중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단지 공부만 빨리 하고 오면 된다며 나이브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유학을 결정하기에 앞서 공부 이외에 해외에서의 삶은 어떤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잘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이 설 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27개의 좋아요

저도 몇 자 적어보자면, 일단 가족/친구의 문제도 있지만, 연애의 문제도 있습니다. 언어적인 이유때문이라도 사람이 한정되는 경우가 많고, 어찌저찌 거기서 만나더라도 누구 한 명 졸업이라도 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다면 롱디가 돼버리죠.

또 펀딩 받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북미 학교들이 국제 학생 제한을 두고 있어요. UC Riverside도 1년에 국제학생을 한 명 밖에 뽑지 않는다던가 말이에요 (다른 UC 학교들도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올해 토론토 대학교도 비자 문제 때문에 국제학생을 4명까지밖에 못 받게 됐고, 총 447명의 국제학생이 지원했습니다. 지원자의 상위 2%에 들어도 붙을 수가 없는 상황이 생긴 것이지요.

또, 국제 뿐 아니라 일반 정원도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럿거스 같은 학교들은 아예 지원자를 받지 않고, 시카고 대학교도 한 명 밖에 안 뽑는다는 얘기도 있지요. 이렇게 되면 원래 럿거스/시카고를 갔어야할 학생들과 나머지 파이를 공유해야된다는 말이 되고, 럿거스/시카고를 지원하지 않더라도 피해를 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저 역시 유학을 하고 있고 유학을 말릴 생각은 없다만, 생각치도 못한 어려움들이 생길 수도 있고, 요즘 펀딩 받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18개의 좋아요

저도 몇 마디 보태봅니다. 저는 철학사 전공으로, 프랑스에서 박사 1년차 과정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해주신 어려움들에 공감하면서도, 저는 조금 더 긍정적인 측면을 덧붙여보려고 합니다.

윗분들이 말씀해주신 인맥 문제, 펀딩 문제, 언어 문제, 관계 문제 등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리고 개개인마다 경제적인 사정이나 타고난 성향, 스트레스 처리 방식 등이 매우 다를 테니 각자 느끼는 어려움의 무게 역시 많이 다르겠지요. 다만 저의 경우,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유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 꼭 경험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떠나오기 전에는 '요즘은 인터넷으로 다 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고, 자료 역시 많은 부분 디지털화 되어 있으니 공부하는 환경이 크게 다를까' 싶었는데, 막상 와보니 매일같이 여기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필드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학자들과 동료가 되어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감각이 정말 고무적입니다. 내가 혼자 오타쿠적으로(?) 이상한 걸 파고 있는 게 아니라, 이 분야를 나와 ‘함께’ 고민하고 작업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꽤 많으며, 이 학문이 어떤 형태로든 사회 안에서 살아서 발전하고 있고, 내가 거기에 들어 와 있다는 실감이 엄청난 동기 부여가 됩니다.

외국인으로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괴감을 느낄 때도 물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얘네들도 크게 다를 거 없네’ 싶은 순간도 많습니다. 내가 지금껏 공부해왔던 방향이 틀리지 않았으며, 어떤 면에 있어서는 본토(?)에서 교육 받아 온 애들과 충분히 견줄 수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더 낫기도 하다는 확인이 자신감을 줍니다. 이런 걸 피부로 느끼게 될 때야 비로소 국제 학술장에서 한 사람의 연구자로 활동할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적극적으로 나와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의 롱디 문제를 제외하면(물론 이게 참 쉽지 않긴 합니다), 학업과 생활 모든 면에서 100% 만족하고 있기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네요.

물론 한국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나와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펀딩입니다. 풀펀딩을 받지 못하는 경우, 굉장히 큰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 공부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학교 차원의 풀펀딩이든, 정부나 재단 장학금이든 학비와 생활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뒤 출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와서 보니 여기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펀딩을 가지고 있으며, 자비로 진행하는 경우가 드물기는 합니다. 대학 세 군데의 철학과 박사 1년차들을 모아 놓은 환영회에 갔을 때, 신입생 13~14명 중 외국인 학생 1명 만이 아무런 펀딩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사 계약이든, 장학금이든 최소 3년 치 재원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인 면은 공부를 지속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대학 자체 강사/조교 계약, 혹은 국내 여러 재단이나 본국 및 유학국 장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금을 넉넉히 확보하고 오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둘째는 지도교수입니다. 유럽에서의 박사과정의 경우,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파악하고, 연구 핏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나와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출국을 결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미팅을 해 볼 수도 있고, 학회 등에 부러 가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예 한번 출국해서 여행도 할 겸, 혹은 도시 분위기도 살펴볼 겸 지도교수를 직접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후보 중에 단순히 나를 받아준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이 교수에게 지도를 받고 싶은지, 이 사람의 작업과 나의 작업이 공명하는지, 그리고 이 사람과의 관계가 연구자로서의 나의 성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연구 계획서를 들고 30분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요즘은 SNS가 워낙 잘 되어 있다보니 다른 지도제자들한테 이 교수의 지도 스타일에 대해서 정보를 얻기도 쉽고요. 그렇게 해보고 확신이 든다면, 적어도 학업적인 면에서 만큼은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0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