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식론 입문』, 3장 「선험적 지식」 요약

휴가 복귀 전날, 복귀 후 볼 책들을 고르다가 다시 흥미가 동해서, 한동안 손을 뗐던 인식론 교과서를 다시 펼쳐 공부해보고 있습니다. 이번 챕터는 선험적 지식을 다룬 장인데, 주제의 재미와는 별개로 책의 논증에 동의가 안 되는 부분들이 몇 개 있어서 각주들이 좀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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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험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

이 장에서는 선험성 개념, 분석-종합 구별, 선험적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다룬다.

칸트에 의해 도입된 선험성 개념은 칸트에서는 경험 독립성으로 정의되었다. 선험적 지식은 경험과 무관하게 얻어지는 반면, 후험적(경험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예컨대

(1) 유리는 서울에 산다.

위 문장의 진릿값을 알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경험을 해야 하지만

(2) 유리가 서울에 산다면 그리고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면, 유리는 한국의 수도에 산다.

위 문장은 경험 없이도 그 진릿값이 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은 경험적 지식인 반면 (2)는 선험적 지식이다. 이때 '경험'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 감각 경험과 비감각 경험​

여기서 경험의 의미가 감각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좁은 정의이다. 감각되지는 않지만 경험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감각되지 않지만 분명히 경험이다. 배고픔, 아픔, 욕구 등의 내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억이나 내성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은 감각적 지식이 아니지만 선험적 지식도 아니다. 따라서 기억과 내성은 경험 개념에 포함되어야 한다.
한편 여기서 경험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것도 있다. 플란팅가(A. Plantinga)는 지적 강박과 지적 반감의 경험에 관해 말한다. 플란팅가에 의하면 우리는 참인 명제를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반면, 거짓인 명제에 대해서는 반감과 거부감을 느낀다. 많은 선험적인 명제들은 지적 강박과 지적 반감 경험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험적인 지식을 경험 독립적인 지식으로 정의했을 때, 이러한 경험은 '경험'의 정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S가 p를 믿는 것이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p에 대한 S의 정당화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경험이란 감각, 기억, 내성을 의미한다.

  • 선험적 정당화와 개념 학습​

앞서 우리는 (2)를 선험적 지식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2)가 선험적 지식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2)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2)를 정당화할 수 없다. (2)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수도', '한국', '서울' 등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경험적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2)의 정당화는 경험에 의존하며, 선험적 지식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의존 관계를 두 가지로 구별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 "x가 y에 의존한다"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y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x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 x는 y이기 때문에 비로소 x로서 존재한다. 앞의 (2)를 이해하기 위한 경험적 학습이 없었다면 (2)의 정당화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2)의 정당화는 확실히 경험에 의존한다. 그러나 경험적 학습이 (2)의 정당화를 정당화인 그 무엇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2)를 정당화하는 것은 정당화와 발생적으로 관계 맺는 사건들과는 다른 요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2)는 경험 독립적으로 정당화되는 선험적 지식이다.

  • 선험성과 필연성​

경험 독립성은 선험적 정당화가 무엇이 아닌지는 알려주지만 무엇인지는 적극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경험에 일절 의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명제의 진릿값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답하는 한 가지 방식은 선험적 정당화가 필연적 정당화라는 것이다. "2+2=4",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이다",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A→B이고 A라면 B이다" 등의 명제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참이다. 이런 선험적 명제들은 경험 없이 그 명제의 필연성을 생각함으로써 정당화될 것이다.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처럼, 우리는 경험을 통하지 않고도 붉음이 색깔이라는 속성을 포함한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선험적 지식은 그 필연성을 파악하고 반성함으로써 정당화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D)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를 믿으며,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논의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위의 정의를 검토해보자. p가 필연적 명제라고 하더라도, S가 p를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예컨대 요행에 의해 p를 믿게 된다면 p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위의 정의는 실패하며, 필연성은 단순한 믿음의 필연성 이상이어야 한다. 이 정의는 p를 믿는 방식에 대해 어떤 조건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패한다.

  • 필연적 진리에 대한 후험적 정당화

위의 정의는 믿음의 필연성과 정당화의 선험성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필연적이면서 그 정당화가 후험적인 경우가 존재한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참인 어떤 논리적 명제가 있다고 하자. 해당 명제는 논리적 필연성을 지니지만, 그 증명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논리학자의 권위에 기대어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이때 그의 믿음은 필연적이지만 후험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이다. 위의 정의는 이러한 사례를 간과한다.
선험적 정당화를 믿음의 필연성에 의해 정의하려는 시도는 두 가지 이유로 실패한다. 첫째, 이 정의는 믿음을 믿는 방식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 둘째, 이 정의는 필연적 명제에 대한 후험적 정당화의 가능성을 간과한다. 다음의 정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는다.

(D2)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가 참임을 필연적으로 파악한다.

명제의 진릿값과 양상 격위

위의 정의는 또 다른 문제에 맞닥뜨린다. 먼저 우리는 두 가지 믿음을 구분해야 한다.

(B1) p는 참이다.
(B2)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B1은 진릿값에 관한 믿음인 반면 B2는 양상 격위에 관한 믿음이다. 두 믿음은 서로 다른 믿음이다. 어떤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그 명제를 참이라고 믿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믿는 방식이 선험적이라면, 해당 믿음의 양상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선험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을 지닐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의 필연성에 관한 파악을 요구하는 위의 정의는 지나치게 좁다.

  • 선험적 정당화의 오류가능성

다음으로, 위의 정의는 거짓인 믿음에 대해서도 선험적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한다. 즉 선험적 정당화가 오류가능하다면, 위의 정의는 실패한다. p가 거짓일 때 p가 필연적으로 참임을 '파악'할 수는 없다.
다음은 선험적 정당화의 오류가능성을 주장하는 논증이다. 모래 더미에서 모래알 하나를 뺐을 때 남는 것이 여전히 모래 더미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음을 믿어야 한다.

두 모래알 집단의 수적 차이가 모래알 한 개뿐이라면, 두 집단 모두 모래 더미이거나 모래 더미가 아니다.

이 명제는 모래 더미에 관한 경험이 아니라 '더미'라는 개념의 의미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위 명제를 믿을 경우 우리는 단 한 개의 모래알도 모래 더미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이 명제의 정당성은 의심스럽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귀결되는 역설을 깨닫기 전에는 이 명제를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앙이 맞다면, 역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명제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선험성을 정의하는 세 번째 방식

또 다른 입장에 의하면, 선험적 명제란 그 명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정당화되는 명제이다.

(D3)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필연적으로, S가 p를 이해한다면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나치게 협소하다. 만일 어떤 명제의 참을 믿기 위해 해당 명제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면, 이 정의에 따르면 해당 명제는 이미 선험적 명제가 아니다. 이해만으로 그 명제의 참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명을 통해 정당화되는 명제더라도, 그 증명이 선험적이라면 명제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위의 정의는 이런 경우를 포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해만으로 정당화되는 선험적 명제와 선험적 증명을 통해 정당화되는 선험적 명제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전자의 명제들은 '공리'(axiom)라고 불린다. 후자의 명제들은 선험적인 다른 명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의미에서 공리적으로(axiomatically) 증명된다.

p는 S에게 공리이다 ↔ 필연적으로, S가 p를 이해한다면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공리와 공리적으로 도출되는 명제들을 포괄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D3)' S가 p라고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p는 S에게 공리이거나, S는 자신에게 공리적인 증명을 기초로 p를 믿는다.

그러나 이 정의도 만족스럽지 않다. 이 정의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명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 명제를 보자.

x가 S에게 붉게 보인다면, x가 붉다고 믿는 것은 S에게 조건적으로 정당화된다.

이 명제는 이해하는 것만으로 참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예컨대 회의주의자는 이 명제를 이해하지만 이 명제를 거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이 명제의 증명은 공리적으로 명징하게 도출되는 증명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길고 복잡한 논증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참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경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선험적인 진리이다.1)
공리와 공리적 증명에 입각한 선험성 정의는, 선험성의 필요조건으로 보기에는 미흡하지만 충분조건으로 보기에는 적절하다.

  • 선험성을 정의하는 네 번째 방식

선험성에 대한 칸트의 소극적 정의 방식에 플란팅가의 주장을 결합해서 선험성을 정의해보자. 이에 따르면,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강한 확신의 경험을 할 때, 그리고 이 경험이 지각, 내성, 기억에 의한 것이 아닐 때 그것은 해당 명제에 대한 순수한 지적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 경험에 의해 명제의 참을 믿는 것이 바로 선험적 정당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논파 가능하다. 어떤 명제를 증명할 때 그 참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들었더라도, 그 증명에 결점이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면 그 경험은 논파된다. 따라서 지적 경험을 통한 선험성 정의는 다음처럼 구성된다.

(D4)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가 참이라는 점에 대한 논파되지 않는 순수 지적 경험을 지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별로 선험적이지도 않은 엉뚱한 명제에 강한 확신을 지니기도 한다. 특히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은 "1+1=3"이나 "0.999...<1" 같이 틀린 명제에 강한 확신을 지닌다. 이런 명제들에 대한 논파되지 않는 확신이 과연 이것들을 선험적으로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 분석-종합 구별

철학사에서는 선험적 명제의 지위와 내용에 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이성주의자들은 선험적 명제들이 실재 세계에 대한 내용을 알려준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선험적 명제들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필연적 속성이나 필연적 관계에 관한 진리를 나타낸다. 반면 경험주의자들은 선험적 명제가 세계 속의 사실에 관한 명제가 아니라고 본다. 경험주의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선험적 명제는 실재 세계가 아니라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 종류의 진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키지 않고 동어반복적이다.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별은 이 맥락에서 도입된다. 종합명제는 물리적인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담는 명제이며, 분석명제는 세계에 관한 명제가 아니라 언어와 논리학의 진리를 표현할 뿐인 명제이다. 모든 명제는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며,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는 상호 배제적인 범주이다. 경험주의자들은 모든 선험적인 명제가 분석명제라고 주장한다.
경험주의자들은 선험성이 분석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선험적 명제의 범위를 동어반복적인 것으로 축소하고, 선험성을 지적 직관 등의 신비한 능력으로 설명하는 일을 거부하고자 한다.

  • 분석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분석명제를 다음처럼 규정한다.

(A1) p는 분석명제이다 ↔ p는 술어가 주어에 개념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명제이다.

예컨대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라는 명제의 주어인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명제의 술어는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으며 분석명제이다.
그러나 A1은 주어-술어 구조의 문장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패한다. 예컨대

비가 오고 있거나 비가 오고 있지 않다.

이 명제는 논리적인 진리로서 분석명제에 속하지만, 주어-술어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A1의 정의에 포함되지 못한다. 또한 주어-술어 구조를 지닌 선험적 명제 중에서도 A1에 포함되지 않는 사례가 있다.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이 명제는 주어-술어 구조를 지니는 선험적 명제이지만, 술어가 주어에 개념적으로 포함되는지는 의심스럽다. 앞선 사례의 '총각'은 '미혼'과 '남자'로 이루어진 복합 개념이지만, '붉음'은 이 이상의 개념들로 분석될 수 없는 단순 개념이다. '붉음'의 의미는 다른 개념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 붉은 대상들에 대한 지각을 통해 습득된다.2) '붉다' 이외에도 '짜다', '푸르다', '달다' 등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명제들은 A1의 정의에 의하면 선험적이면서도 분석명제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혐적 명제라는 당초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귀결이다.

  • 분석성에 대한 프레게 식 정의

프레게의 정의는 주어-술어 형식의 명제보다 많은 명제들을 포괄한다.

(A2) p는 분석명제이다 ↔ p는 논리학의 진리이거나, 명제 성분을 동의어로 대체함으로써 논리학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명제이다.

여기서 논리적 진리란, 어떤 예시를 대입하든 참인 형식을 지닌 명제이다. 예컨대 "p이거나 p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p에 어떤 명제를 대입하든 참이다.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

위의 예시에서 '총각'이라는 명제 성분을 총각의 정의인 '미혼 남성'으로 대체해보자.

모든 미혼 남성은 미혼이다.

이는

(∀x)((Fx&Gx)→Fx)

라는 논리적 진리의 예시이다. 이렇게 봤을 때 A2는 위와 같은 명제들을 분석명제로 잘 설명하는 듯하다.

  • 프레게 식 정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

다음의 명제를 생각해보자.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위 명제를 A2에 따라 분석명제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붉다'의 적절한 동의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붉다'는 단순개념이므로 이를 대체해서 논리적 진리로 만들 적절한 동의어를 지니지 않는다. 그렇다면 A2는 위 명제를 분석명제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이 반론에 대해 우리는 이 명제를

모든 붉은 색깔을 지닌 것은 색깔을 지닌다

로 번역할 수 있다고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대답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붉은'과 '붉은 색깔을 지닌'이 동의어여야 한다. 비판자들은 양자가 동의어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의어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개념이 정확히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하는데, 단순개념인 '붉은'과 달리 후자는 '붉은'과 '색깔을 지닌'이 결합되어 있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후자가 전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결국 문제의 명제는 논리적 진리로 환원할 수 없으며 분석명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둘째 반론은 A2가 분석명제를 논리적 진리로는 설명하지만 논리적 진리 자체라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프레게 식 입장은 분석성을 논리적 진리에 의해 설명했으므로, 논리적 진리를 다시 분석성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할 경우 양자 사이의 설명 관계는 순환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A2는 논리적 진리 자체의 지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 분석성에 대한 언어적 정의​

​다음의 시도는 분석성을 명제가 아닌 문장의 속성으로 정의한다.

(A3) p는 분석적이다 ↔ p는 오로지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다.

이 분석성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통 문장의 참이 의미와 사실이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에 의해 성립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눈은 희다"라는 문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실재 눈이 희어야 하며, 또 "눈"과 "희다"라는 낱말들이 풀이나 초록이 아닌 눈과 흰색을 의미해야 한다. 종합문장은 각각 의미와 사실에 그 진릿값을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반면 분석문장은 사실적 구성요소를 결여한 채 의미에 의해서만 참, 거짓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A3의 "오로지 ~만"이라는 조건이 핵심적이다.
A3의 비판자들은 오로지 의미에 의해서만 참인 문장이란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A3의 지지자들은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이 문장이 낱말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위 문장이 참이기 위해

붉음이라는 속성은 색깔을 지님이라는 속성을 포함한다

또한 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 명제가 거짓이라면 해당 문장 또한 거짓일 것이다. 따라서 이 명제의 참은 낱말들의 의미 외에 또 다른 필요조건을 구성하며, 문장의 참은 의미와 사실 모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3)

  • 선험성에 관한 회의주의와 논증을 구성하는 일의 본성

​선험적인 것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에서,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타당한 논증을 통해 선험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선험적 지식의 옹호자들은 이러한 논증들이 자기논박적이라고 대답한다. 옹호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P1) 우리는 어떤 논증들의 타당성을 파악한다.
(P2) 논증의 타당성을 파악하는 것은 선험적 지식이다.
∴ 우리는 선험적 지식을 지닌다.

첫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어떤 논증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모든 논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또 두 번째 전제와 관련하여, 타당한 논증은 전제들이 모두 참일 때 결론도 반드시 참인 논증이다. 이처럼 전제와 결론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경험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전제 또한 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옹호 논증에 근거해서 회의주의자의 논증을 자기논박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만일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기 위해 논증을 구성한다면, 그는 자신의 논증이 타당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논증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순간 논증 자체가 선험적 논증이 되므로 그것은 자기논박적이다.4)
퍼트남은 선험적 지식에 대한 반대 논증이 경험적 전제에 기초를 둘 때 자기논박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적 전제들로부터 도출된 논증이라도, 그 논증이 타당하다면, 즉 전제들로부터 나온 결론이 반드시 참이라면, 해당 논증은 여전히 자기논박적이다. 결국 우리는 선험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듯하다.

1)슈토이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명제가 선험적인 것인지 그리 명확하지 않은 듯하다. 위의 명제는 지각 경험과 지각 믿음의 정당화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명제인데, 어떤 철학자들은 이 명제가 단순 선험적인 논증이 아니라 지각 믿음의 형성에 관한 경험적인 탐구에 의해 도출되는 명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2)이 주장은 논박의 여지가 있다. 슈토이프가 이 명제를 반례로 사용할 때, 그는 '붉음'의 의미가 비명제적인 지각 내용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이 전제는 의심스럽다. 예컨대 의미 전체론적 입장을 취한다면 '붉음'이라는 술어의 의미는 단순히 비명제적인 지각 내용과 등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색깔을 지님', '푸르지 않음' 등 다른 술어와의 추론적 연관 속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붉음'은 '색깔을 지님'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콰인은 언어적 진술의 참이 의미와 사실 모두에 의존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양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발상을 거부한다. Quine, W. V. O., "Two Dogmas of Empiricism",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New York: Harper & Row, 1961, 20-46, 36-37 참조.

4)슈토이프는 회의주의자가 논증을 구성하자마자 자기논박에 빠지므로 선험성에 관한 회의주의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회의주의자는 이러한 자기논박에 빠질 필요가 없다. 회의주의자는 꼭 논증을 구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험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적극적인 부정이 아니라, "선험적 지식의 존재는 의심스럽다"와 같은 소극적 의심의 형태를 띤 회의주의도 가능하다. 이러한 회의주의자는 슈토이프가 말하듯 어떤 논증을 구성해서 자기논박에 빠질 필요가 없으며, 선험적 지식을 주장하는 논증의 타당성을 문제 삼고 의심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예컨대 회의주의자는 전제의 참으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인 논증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으며, 이는 모든 논증이 귀납 논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회의주의로 자연스레 귀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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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이프가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실제로 이렇다면 약간 로데릭 치좀이 글쓰는 방식이랑 비슷하네요.. 이번에도 읽다보니 갠적으로 그 스타일이랑은 좀 안 맞는 것 같긴 합니다 ㅋㅋㅋ

  1.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분석명제가 아닌 것 같은데 슈토이프는 분석명제라고 하는 모양이군요? "분석적"이라는 건 의미론적 범주에 관한 건데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진리함수적 연결사에 의해 필연적 참이 되는 동어반복(tautology; 모든 논리적 진리가 동어반복인 것은 아닙니다)에 해당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분석적 참이 논리적 참으로 결국은 환원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여튼 분석적 참의 외연과 동어반복의 외연은 달라보이는데 슈토이프가 왜 저렇게 얘기했는지 좀 궁금하군욥

  2.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가진다"에서 "색깔"이 선언적 개념(disjunctive concept)이라 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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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처음 올리셨을 때 읽으면서도 생각한 건데, 슈토이프의 주장이 일반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슈토이프의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를 떠나서라도, 슈토이프가 용어를 정의하는 방식이나 사례를 제시하는 방식이 저에게는 좀 낯서네요.가령,

(1) 필연적 진리에 대한 후험적 정당화 부분에서

"믿음이 필연적이면서 그 정당화가 후험적인 경우가 존재한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참인 어떤 논리적 명제가 있다고 하자. 해당 명제는 논리적 필연성을 지니지만, 그 증명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논리학자의 권위에 기대어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이때 그의 믿음은 필연적이지만 후험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이다."

보통 후험적 필연성을 이야기할 때는 솔 크립키가 『이름과 필연』에서 제시한 것처럼 "물은 H2O이다." 같은 자연종에 대한 명제들이 많이 언급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논리학자의 사례는 좀 특이하네요. 슈토이프가 단순히 '후험적 필연명제'를 다루는 게 아니라 '필연명제에 대한 후험적 정당화'를 다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논리적 명제에 대한 정당화가 과연 '후험적'인지는 또 따져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한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 후험적으로 발견된다고 해서 그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 후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건 또 아니니까요. 아마도 슈토이프가 '발견'의 문제와 '정당화'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네요. 더군다나, 권위에 기대서 믿는 걸 '정당화'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말이에요.

(2) 선험적 정당화의 오류 가능성을 주장하는 논증이라는 것도 약간 의아하네요.

"두 모래알 집단의 수적 차이가 모래알 한 개뿐이라면, 두 집단 모두 모래 더미이거나 모래 더미가 아니다."

가 선험적으로 정당화되지만 오류로 밝혀지는 사례로 제시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전통적으로는 선험적 명제라고 하면 주어 안에 술어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분석적 명제를 많이 떠올리고, 그 분석적 명제의 구체적인 사례로 논리적 명제나 (칸트는 거부하겠지만 20세기 초반 분석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수학적 명제를 많이 언급하는데, 슈토이프가 제시한 사례는 이런 명제들로 분류되지 않는 것 같아서요. 특히, '더미' 개념 안에 모래 알 한 개의 차이에 대한 개념이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저 명제를 분석적 명제의 사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3) Raccoon님도 말씀해주셨지만, 분석성 개념에 대한 논의도 좀 방향이 이상하게 잡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분석성'이라는 것의 정의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콰인이 지적한 것처럼 분석성을 엄격하게 정의하려는 시도가 순환논증에 빠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슈토이프는 마치 '분석성'에 대한 합의된 철학사적 정의가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논의를 전개해서 논점을 잘못 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주어 개념 안에 술어 개념이 포함된 명제가 '분석 명제'라는 건 더 이상 문제 삼을 필요 없이 합의된 사실로서 인정되어야 하죠. 다만, '분석적' 명제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논리적' 명제나 '필연적' 명제를 모두 포괄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지, 논리적 명제나 필연적 명제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서 분석적 명제가 재정의되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 되죠. '분석성'은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 개념일 뿐이고,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개념의 철학적 함의이지, 학계에서 통용되는 그 개념의 정의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4) 블로그에도 댓글로 달았지만, 각주 4)와 같은 비판은 참 훌륭하다고 봅니다. 특정한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이론에 대한 개입을 할 필요는 없는데, 너무나 많은 철학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T1'이라는 이론에 대한 비판은 '-T1'이라는 부정의 형식만 취하면 되는 것이지, 'T2'나 'T3' 같은 새로운 이론의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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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통 논리적 진리는 분석적 진술에 포함을 시키지 않나요? 의미에 의해 참인 진술들을 논리적 진리로 환원하려던 시도는 차치하더라도, 논리적 참과 의미론적 참의 두 가지 종류가 모두 (적어도 전통적인 분류대로라면) 분석적 진술에 속한다고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거든요. 콰인도 두 가지 분석성을 염두에 둔 다음 후자부터 공격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요.

2.동류인 '색깔' 개념에 속하는 여러 색깔들(붉다, 검다, 파랗다, 하얗다)이 서로 외연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붉음' 같은 개념이 슈토이프가 말했던 단순개념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른 색깔 개념들과의 양립 불가능성을 배제하고서 '붉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P.S. 치솜의 글쓰기와 비슷하다는 건, 혹시 정의를 하나 제시한 다음에 여러 반례들을 고려하면서 계속해서 정의를 수정해나가는 방식의 글쓰기를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말씀을 듣고 검색을 해 보다가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의 치솜 항목에 재밌는 이야기를 발견해서요 ㅋㅋㅋ

"치솜은 정의들을 정식화한 다음에 반례에 비추어 이 정의들을 수정하는 것을 선호하기로 유명했다. 철학 어휘 사전[...]의 저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서 그들 자신의 전문 용어를 도입했다."

chisholm, v. 정의나 사례에 미세한 수정을 반복하다.
"그는 정의 (d.8)에서 시작해서 (d.8′′′′′′′′)에서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정의를 치솜했다(kept chisholming away)."

(Roderick Chishol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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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리학자의 예시는 말씀대로 슈토이프가 "정당화"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진행해서 제시된 것 같습니다. 아마 예시에 등장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믿음을 정당화한 거겠죠.

이 논리적 명제는 참이다. 왜냐하면 믿을 만한 논리학자가 이 명제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저도 (이 챕터뿐만이 아니라) 책 전반에서 사용되는 정당화 개념이 다소 느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정당화가 맞는지 아닌지를 검증할 만한 규준 같은 것이 도입되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주체 자신에게 그럴듯해보이는 증거가 있으면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간주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자 자신이 내재주의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슈토이프는 그 중에서도 정당화를 내성이나 심리적 상태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입장을 취하는 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2) 저도 긴가민가합니다. 아마 슈토이프는 '더미' 개념의 의미에서 "더미에서 모래알을 한 개쯤 빼도 여전히 더미이다" 같은 것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고, 그게 슈토이프가 의도한 바였던 것 같은데, 더미 개념에 진짜 그런 의미가 포함돼 있나? 같은 생각만 드네요. 이 예시가 고대 헬레니즘 시절 철학자들의 논쟁에서 등장한 명제로 기억하는데, 그 지위가 참 알쏭달쏭합니다.

(4) 감사합니다. 사실 이 논점과 관련해서 출처가 되는 논문을 인용해서 제시하고 싶었는데, 출처가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만뒀습니다. 스트라우드가 회의주의에 관해 썼던 논문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1. 오 그러네요 제가 너무 당연하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군요 ㅋㅋㅋ 철학사전에도 분석적 참은 동어반복의 형식을 갖고 있거나, 타당한 식이거나 (논리적 참), 동의어끼리 대치해서 그러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라고 되어 있네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흑흑

  2. 네.. 치좀의 글쓰기 정확히 그런 겁니다. 옛날에 번역된 철학 교과서 같은 책을 하나 봤는데 그 사람도 치좀 제자라서 글을 좀 그런 식으로 쓰더라구요ㅋㅋㅋ

  3. YOUN 님이 지적하신 몇 가지 부분들에 저도 동의합니다. 더미의 역설 문제는 다시 읽어봐도 무슨 의도로 들어간 부분인지 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치만 YOUN님의 지적 (4)에는 저는 반대의견 던집니다! 비판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이론을 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 유의미한 발전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철학은 발전하지도, 해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메타철학적 입장이라면 첨언할 부분이 없겠지만요. 저는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 같은 저서가 역사에 남은 것은 지칭에 관한 기술주의자의 이론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지칭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완전히 새로운 답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철학적 질문들을 끄집어냈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런 메타철학적인 입장을 공유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ㅎㅎ 혹자는 메타철학이 철학에서 가장 흥미가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하지만 저는 철학에 대해 판이하게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게 흥미진진하더라구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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