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복귀 전날, 복귀 후 볼 책들을 고르다가 다시 흥미가 동해서, 한동안 손을 뗐던 인식론 교과서를 다시 펼쳐 공부해보고 있습니다. 이번 챕터는 선험적 지식을 다룬 장인데, 주제의 재미와는 별개로 책의 논증에 동의가 안 되는 부분들이 몇 개 있어서 각주들이 좀 달려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wndyd75/222357583948
- 선험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
이 장에서는 선험성 개념, 분석-종합 구별, 선험적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다룬다.
칸트에 의해 도입된 선험성 개념은 칸트에서는 경험 독립성으로 정의되었다. 선험적 지식은 경험과 무관하게 얻어지는 반면, 후험적(경험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예컨대
(1) 유리는 서울에 산다.
위 문장의 진릿값을 알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경험을 해야 하지만
(2) 유리가 서울에 산다면 그리고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면, 유리는 한국의 수도에 산다.
위 문장은 경험 없이도 그 진릿값이 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은 경험적 지식인 반면 (2)는 선험적 지식이다. 이때 '경험'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 감각 경험과 비감각 경험
여기서 경험의 의미가 감각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좁은 정의이다. 감각되지는 않지만 경험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감각되지 않지만 분명히 경험이다. 배고픔, 아픔, 욕구 등의 내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억이나 내성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은 감각적 지식이 아니지만 선험적 지식도 아니다. 따라서 기억과 내성은 경험 개념에 포함되어야 한다.
한편 여기서 경험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것도 있다. 플란팅가(A. Plantinga)는 지적 강박과 지적 반감의 경험에 관해 말한다. 플란팅가에 의하면 우리는 참인 명제를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반면, 거짓인 명제에 대해서는 반감과 거부감을 느낀다. 많은 선험적인 명제들은 지적 강박과 지적 반감 경험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험적인 지식을 경험 독립적인 지식으로 정의했을 때, 이러한 경험은 '경험'의 정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S가 p를 믿는 것이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p에 대한 S의 정당화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경험이란 감각, 기억, 내성을 의미한다.
- 선험적 정당화와 개념 학습
앞서 우리는 (2)를 선험적 지식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2)가 선험적 지식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2)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2)를 정당화할 수 없다. (2)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수도', '한국', '서울' 등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경험적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2)의 정당화는 경험에 의존하며, 선험적 지식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의존 관계를 두 가지로 구별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 "x가 y에 의존한다"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y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x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 x는 y이기 때문에 비로소 x로서 존재한다. 앞의 (2)를 이해하기 위한 경험적 학습이 없었다면 (2)의 정당화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2)의 정당화는 확실히 경험에 의존한다. 그러나 경험적 학습이 (2)의 정당화를 정당화인 그 무엇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2)를 정당화하는 것은 정당화와 발생적으로 관계 맺는 사건들과는 다른 요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2)는 경험 독립적으로 정당화되는 선험적 지식이다.
- 선험성과 필연성
경험 독립성은 선험적 정당화가 무엇이 아닌지는 알려주지만 무엇인지는 적극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경험에 일절 의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명제의 진릿값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답하는 한 가지 방식은 선험적 정당화가 필연적 정당화라는 것이다. "2+2=4",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이다",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A→B이고 A라면 B이다" 등의 명제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참이다. 이런 선험적 명제들은 경험 없이 그 명제의 필연성을 생각함으로써 정당화될 것이다.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처럼, 우리는 경험을 통하지 않고도 붉음이 색깔이라는 속성을 포함한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선험적 지식은 그 필연성을 파악하고 반성함으로써 정당화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D)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를 믿으며,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논의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위의 정의를 검토해보자. p가 필연적 명제라고 하더라도, S가 p를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예컨대 요행에 의해 p를 믿게 된다면 p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위의 정의는 실패하며, 필연성은 단순한 믿음의 필연성 이상이어야 한다. 이 정의는 p를 믿는 방식에 대해 어떤 조건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패한다.
- 필연적 진리에 대한 후험적 정당화
위의 정의는 믿음의 필연성과 정당화의 선험성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필연적이면서 그 정당화가 후험적인 경우가 존재한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참인 어떤 논리적 명제가 있다고 하자. 해당 명제는 논리적 필연성을 지니지만, 그 증명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논리학자의 권위에 기대어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이때 그의 믿음은 필연적이지만 후험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이다. 위의 정의는 이러한 사례를 간과한다.
선험적 정당화를 믿음의 필연성에 의해 정의하려는 시도는 두 가지 이유로 실패한다. 첫째, 이 정의는 믿음을 믿는 방식에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 둘째, 이 정의는 필연적 명제에 대한 후험적 정당화의 가능성을 간과한다. 다음의 정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는다.
(D2)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가 참임을 필연적으로 파악한다.
명제의 진릿값과 양상 격위
위의 정의는 또 다른 문제에 맞닥뜨린다. 먼저 우리는 두 가지 믿음을 구분해야 한다.
(B1) p는 참이다.
(B2) p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B1은 진릿값에 관한 믿음인 반면 B2는 양상 격위에 관한 믿음이다. 두 믿음은 서로 다른 믿음이다. 어떤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그 명제를 참이라고 믿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믿는 방식이 선험적이라면, 해당 믿음의 양상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선험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을 지닐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의 필연성에 관한 파악을 요구하는 위의 정의는 지나치게 좁다.
- 선험적 정당화의 오류가능성
다음으로, 위의 정의는 거짓인 믿음에 대해서도 선험적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한다. 즉 선험적 정당화가 오류가능하다면, 위의 정의는 실패한다. p가 거짓일 때 p가 필연적으로 참임을 '파악'할 수는 없다.
다음은 선험적 정당화의 오류가능성을 주장하는 논증이다. 모래 더미에서 모래알 하나를 뺐을 때 남는 것이 여전히 모래 더미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음을 믿어야 한다.
두 모래알 집단의 수적 차이가 모래알 한 개뿐이라면, 두 집단 모두 모래 더미이거나 모래 더미가 아니다.
이 명제는 모래 더미에 관한 경험이 아니라 '더미'라는 개념의 의미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위 명제를 믿을 경우 우리는 단 한 개의 모래알도 모래 더미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이 명제의 정당성은 의심스럽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귀결되는 역설을 깨닫기 전에는 이 명제를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앙이 맞다면, 역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명제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선험성을 정의하는 세 번째 방식
또 다른 입장에 의하면, 선험적 명제란 그 명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정당화되는 명제이다.
(D3)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필연적으로, S가 p를 이해한다면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정의는 지나치게 협소하다. 만일 어떤 명제의 참을 믿기 위해 해당 명제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면, 이 정의에 따르면 해당 명제는 이미 선험적 명제가 아니다. 이해만으로 그 명제의 참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명을 통해 정당화되는 명제더라도, 그 증명이 선험적이라면 명제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위의 정의는 이런 경우를 포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해만으로 정당화되는 선험적 명제와 선험적 증명을 통해 정당화되는 선험적 명제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전자의 명제들은 '공리'(axiom)라고 불린다. 후자의 명제들은 선험적인 다른 명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의미에서 공리적으로(axiomatically) 증명된다.
p는 S에게 공리이다 ↔ 필연적으로, S가 p를 이해한다면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공리와 공리적으로 도출되는 명제들을 포괄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D3)' S가 p라고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p는 S에게 공리이거나, S는 자신에게 공리적인 증명을 기초로 p를 믿는다.
그러나 이 정의도 만족스럽지 않다. 이 정의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명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 명제를 보자.
x가 S에게 붉게 보인다면, x가 붉다고 믿는 것은 S에게 조건적으로 정당화된다.
이 명제는 이해하는 것만으로 참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예컨대 회의주의자는 이 명제를 이해하지만 이 명제를 거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이 명제의 증명은 공리적으로 명징하게 도출되는 증명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길고 복잡한 논증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참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경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선험적인 진리이다.1)
공리와 공리적 증명에 입각한 선험성 정의는, 선험성의 필요조건으로 보기에는 미흡하지만 충분조건으로 보기에는 적절하다.
- 선험성을 정의하는 네 번째 방식
선험성에 대한 칸트의 소극적 정의 방식에 플란팅가의 주장을 결합해서 선험성을 정의해보자. 이에 따르면,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강한 확신의 경험을 할 때, 그리고 이 경험이 지각, 내성, 기억에 의한 것이 아닐 때 그것은 해당 명제에 대한 순수한 지적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 경험에 의해 명제의 참을 믿는 것이 바로 선험적 정당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논파 가능하다. 어떤 명제를 증명할 때 그 참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들었더라도, 그 증명에 결점이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면 그 경험은 논파된다. 따라서 지적 경험을 통한 선험성 정의는 다음처럼 구성된다.
(D4) S가 p를 믿는 것은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가 참이라는 점에 대한 논파되지 않는 순수 지적 경험을 지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별로 선험적이지도 않은 엉뚱한 명제에 강한 확신을 지니기도 한다. 특히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은 "1+1=3"이나 "0.999...<1" 같이 틀린 명제에 강한 확신을 지닌다. 이런 명제들에 대한 논파되지 않는 확신이 과연 이것들을 선험적으로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 분석-종합 구별
철학사에서는 선험적 명제의 지위와 내용에 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이성주의자들은 선험적 명제들이 실재 세계에 대한 내용을 알려준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선험적 명제들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필연적 속성이나 필연적 관계에 관한 진리를 나타낸다. 반면 경험주의자들은 선험적 명제가 세계 속의 사실에 관한 명제가 아니라고 본다. 경험주의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선험적 명제는 실재 세계가 아니라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 종류의 진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키지 않고 동어반복적이다.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별은 이 맥락에서 도입된다. 종합명제는 물리적인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담는 명제이며, 분석명제는 세계에 관한 명제가 아니라 언어와 논리학의 진리를 표현할 뿐인 명제이다. 모든 명제는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며,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는 상호 배제적인 범주이다. 경험주의자들은 모든 선험적인 명제가 분석명제라고 주장한다.
경험주의자들은 선험성이 분석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선험적 명제의 범위를 동어반복적인 것으로 축소하고, 선험성을 지적 직관 등의 신비한 능력으로 설명하는 일을 거부하고자 한다.
- 분석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분석명제를 다음처럼 규정한다.
(A1) p는 분석명제이다 ↔ p는 술어가 주어에 개념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명제이다.
예컨대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라는 명제의 주어인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명제의 술어는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으며 분석명제이다.
그러나 A1은 주어-술어 구조의 문장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패한다. 예컨대
비가 오고 있거나 비가 오고 있지 않다.
이 명제는 논리적인 진리로서 분석명제에 속하지만, 주어-술어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A1의 정의에 포함되지 못한다. 또한 주어-술어 구조를 지닌 선험적 명제 중에서도 A1에 포함되지 않는 사례가 있다.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이 명제는 주어-술어 구조를 지니는 선험적 명제이지만, 술어가 주어에 개념적으로 포함되는지는 의심스럽다. 앞선 사례의 '총각'은 '미혼'과 '남자'로 이루어진 복합 개념이지만, '붉음'은 이 이상의 개념들로 분석될 수 없는 단순 개념이다. '붉음'의 의미는 다른 개념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 붉은 대상들에 대한 지각을 통해 습득된다.2) '붉다' 이외에도 '짜다', '푸르다', '달다' 등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명제들은 A1의 정의에 의하면 선험적이면서도 분석명제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혐적 명제라는 당초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귀결이다.
- 분석성에 대한 프레게 식 정의
프레게의 정의는 주어-술어 형식의 명제보다 많은 명제들을 포괄한다.
(A2) p는 분석명제이다 ↔ p는 논리학의 진리이거나, 명제 성분을 동의어로 대체함으로써 논리학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명제이다.
여기서 논리적 진리란, 어떤 예시를 대입하든 참인 형식을 지닌 명제이다. 예컨대 "p이거나 p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p에 어떤 명제를 대입하든 참이다.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
위의 예시에서 '총각'이라는 명제 성분을 총각의 정의인 '미혼 남성'으로 대체해보자.
모든 미혼 남성은 미혼이다.
이는
(∀x)((Fx&Gx)→Fx)
라는 논리적 진리의 예시이다. 이렇게 봤을 때 A2는 위와 같은 명제들을 분석명제로 잘 설명하는 듯하다.
- 프레게 식 정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
다음의 명제를 생각해보자.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위 명제를 A2에 따라 분석명제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붉다'의 적절한 동의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붉다'는 단순개념이므로 이를 대체해서 논리적 진리로 만들 적절한 동의어를 지니지 않는다. 그렇다면 A2는 위 명제를 분석명제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이 반론에 대해 우리는 이 명제를
모든 붉은 색깔을 지닌 것은 색깔을 지닌다
로 번역할 수 있다고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대답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붉은'과 '붉은 색깔을 지닌'이 동의어여야 한다. 비판자들은 양자가 동의어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의어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개념이 정확히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하는데, 단순개념인 '붉은'과 달리 후자는 '붉은'과 '색깔을 지닌'이 결합되어 있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후자가 전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결국 문제의 명제는 논리적 진리로 환원할 수 없으며 분석명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둘째 반론은 A2가 분석명제를 논리적 진리로는 설명하지만 논리적 진리 자체라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프레게 식 입장은 분석성을 논리적 진리에 의해 설명했으므로, 논리적 진리를 다시 분석성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할 경우 양자 사이의 설명 관계는 순환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A2는 논리적 진리 자체의 지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 분석성에 대한 언어적 정의
다음의 시도는 분석성을 명제가 아닌 문장의 속성으로 정의한다.
(A3) p는 분석적이다 ↔ p는 오로지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다.
이 분석성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통 문장의 참이 의미와 사실이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에 의해 성립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눈은 희다"라는 문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실재 눈이 희어야 하며, 또 "눈"과 "희다"라는 낱말들이 풀이나 초록이 아닌 눈과 흰색을 의미해야 한다. 종합문장은 각각 의미와 사실에 그 진릿값을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반면 분석문장은 사실적 구성요소를 결여한 채 의미에 의해서만 참, 거짓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A3의 "오로지 ~만"이라는 조건이 핵심적이다.
A3의 비판자들은 오로지 의미에 의해서만 참인 문장이란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A3의 지지자들은
모든 붉은 것은 색깔을 지닌다
이 문장이 낱말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위 문장이 참이기 위해
붉음이라는 속성은 색깔을 지님이라는 속성을 포함한다
또한 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 명제가 거짓이라면 해당 문장 또한 거짓일 것이다. 따라서 이 명제의 참은 낱말들의 의미 외에 또 다른 필요조건을 구성하며, 문장의 참은 의미와 사실 모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3)
- 선험성에 관한 회의주의와 논증을 구성하는 일의 본성
선험적인 것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에서,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타당한 논증을 통해 선험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선험적 지식의 옹호자들은 이러한 논증들이 자기논박적이라고 대답한다. 옹호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P1) 우리는 어떤 논증들의 타당성을 파악한다.
(P2) 논증의 타당성을 파악하는 것은 선험적 지식이다.
∴ 우리는 선험적 지식을 지닌다.
첫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어떤 논증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모든 논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또 두 번째 전제와 관련하여, 타당한 논증은 전제들이 모두 참일 때 결론도 반드시 참인 논증이다. 이처럼 전제와 결론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경험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전제 또한 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옹호 논증에 근거해서 회의주의자의 논증을 자기논박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만일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기 위해 논증을 구성한다면, 그는 자신의 논증이 타당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논증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순간 논증 자체가 선험적 논증이 되므로 그것은 자기논박적이다.4)
퍼트남은 선험적 지식에 대한 반대 논증이 경험적 전제에 기초를 둘 때 자기논박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적 전제들로부터 도출된 논증이라도, 그 논증이 타당하다면, 즉 전제들로부터 나온 결론이 반드시 참이라면, 해당 논증은 여전히 자기논박적이다. 결국 우리는 선험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듯하다.
1)슈토이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명제가 선험적인 것인지 그리 명확하지 않은 듯하다. 위의 명제는 지각 경험과 지각 믿음의 정당화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명제인데, 어떤 철학자들은 이 명제가 단순 선험적인 논증이 아니라 지각 믿음의 형성에 관한 경험적인 탐구에 의해 도출되는 명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2)이 주장은 논박의 여지가 있다. 슈토이프가 이 명제를 반례로 사용할 때, 그는 '붉음'의 의미가 비명제적인 지각 내용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이 전제는 의심스럽다. 예컨대 의미 전체론적 입장을 취한다면 '붉음'이라는 술어의 의미는 단순히 비명제적인 지각 내용과 등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색깔을 지님', '푸르지 않음' 등 다른 술어와의 추론적 연관 속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붉음'은 '색깔을 지님'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콰인은 언어적 진술의 참이 의미와 사실 모두에 의존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양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발상을 거부한다. Quine, W. V. O., "Two Dogmas of Empiricism",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New York: Harper & Row, 1961, 20-46, 36-37 참조.
4)슈토이프는 회의주의자가 논증을 구성하자마자 자기논박에 빠지므로 선험성에 관한 회의주의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회의주의자는 이러한 자기논박에 빠질 필요가 없다. 회의주의자는 꼭 논증을 구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험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적극적인 부정이 아니라, "선험적 지식의 존재는 의심스럽다"와 같은 소극적 의심의 형태를 띤 회의주의도 가능하다. 이러한 회의주의자는 슈토이프가 말하듯 어떤 논증을 구성해서 자기논박에 빠질 필요가 없으며, 선험적 지식을 주장하는 논증의 타당성을 문제 삼고 의심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예컨대 회의주의자는 전제의 참으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인 논증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으며, 이는 모든 논증이 귀납 논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회의주의로 자연스레 귀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