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Vom Lesen und Schreiben)'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을 보았습니다.
"Ich würde nur an einen Gott glauben, der zu tanzen verstünde."
"나는 춤추는 법을 이해할 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의문이 생겼는데요. 과연 니체가 믿을 수 있는 그 '춤추는 법을 이해할 줄 아는 신'을 현실의 종교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일단 두 신이 떠오르네요.
1. 시바, 나타라자
힌두교의 시바는 춤의 신으로도 유명합니다. 시바를 지칭하는 유명한 말 중 하나인 "나타라자(Nataraja)"는 번역하면 "춤의 제왕" 혹은 "춤의 주님"이라고도 하네요. 모든 시바파 사원에는 춤추는 시바의 모습이 있을 정도로, 시바를 묘사한 예술작품들 중 상당 수는 시바의 춤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시바의 춤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와 파괴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시바의 춤에는 '라시아(Lasya)'와 '탄다바(Tandava)'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하는데, 라시아는 창조와 관련된 온화한 춤이고, 탄다바는 파괴와 관련된 격렬한 춤이라고 합니다.
저도 니체의 구절 때문에 갑자기 시바에 관심이 생겨서 시바의 춤에 대한 힌두교 텍스트를 찾아보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관련 내용을 찾기가 굉장히 복잡하더라고요. 힌두교에서는 '경전'의 지위에 있는 텍스트 목록이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다, 텍스트가 너무 다양하기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나 타밀어에서 영어로조차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텍스트도 많아서요.
힌두교 경전은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계시된 내용을 담은 텍스트들인 '슈루티(Shruti)'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전수된 종교적 기억을 담은 텍스트들인 '스므리티(Smriti)'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시바의 춤에 대한 내용은, 스므리티 중에서도 '아가마(agama)'라고 하는 종류의 문헌들에서, '시바교의 아가마(Saivagama)'로 따로 분류되는 문헌들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마쿠타아가마(Makutagama)』와 『카란아가마(Karanagama)』가 시바의 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텍스트라고 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쿠타아가마』는 영어로 일부만 번역되어 있는데 그 중 시바의 춤이 등장하는 부분은 빠져 있고, 『카란아가마』는 (제가 잘 찾지를 못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시바의 춤에 대한 내용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마도 『마쿠타아가마』가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결국 인터넷에서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시바교 경전에 대한 학술서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The Makutagama seems to occupy a unique place among the agamas. It is quoted as the authority in temples where Nataraja is said to have performed one of His Cosmic Dances. In such shrines His Ardra darsana festival is considered to be of special significance. They have special dance halls known as the Kanaka sabha (gold-Chidambaram), Rajata sabha (silver-Madurai), Tambra sabha (copper-Tirunelveli), Ratna sabha (gem-Tiruvalankadu) and Chitra sabha (art-Tirukutralam). The dances of Nataraja are seven and they were performed in these and other places. The Makutagama deals specially with the dance of Nataraja and hence its appropriateness to these places of Nataraja.
『마쿠타아가마』는 아가마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전은 나타라자가 그의 우주적 춤 가운데 하나를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원들에서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용된다. 이러한 성소들에서는 그의 아르드라 다르사나(Ardra darsana) 축제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사원에는 특별한 무용 전당이 있으며, 이를 각각 카나카 사바(Kanaka sabha, 금–치담바람), 라자타 사바(Rajata sabha, 은–마두라이), 탐브라 사바(Tambra sabha, 구리–티루넬벨리), 라트나 사바(Ratna sabha, 보석–티루발랑카두), 치트라 사바(Chitra sabha, 예술–티루쿠트랄람)라고 부른다. 나타라자의 춤은 일곱 가지이며, 이러한 장소들과 다른 여러 곳에서 행해졌다고 전해진다. 『마쿠타아가마』는 특히 나타라자의 춤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나타라자 성지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M. Arunachala, The Saivagama, Tiruchitrambalam: Gandhi Vidyalayam, 1983, p. 56. (ChatGPT 번역)
『마쿠타아가마』
『카란아가마』
Internet Archive: Digital Library of Free & Borrowable Texts, Movies, Music & Wayback Machine
다행히 하나 찾아낸 것은 티루물라르(Tirumular)라고 하는 시바교 신비주의 시인이 쓴 『티루만티람』이라고 하는 경전이었습니다. 시바교 중에서도 '사이바-싯단타(Saiva-siddhanta)'라는 교파의 경전이라는데, 시바교 아가마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네요. 이 책은 아홉 개의 탄트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마지막 탄트라가 시바의 춤에 대한 묘사와 찬양을 많이 담고 있더라고요.
『티루만티람』
TIRUMANTIRAM : Tirumular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
시바의 다섯 가지 춤
그는 신성한 빛의 치트-파라(Chit-Para)이시며,
그는 환희의 춤(아난다의 춤)을 추신다;
그는 “옴(Aum)”인 나다(Nada)이시며,
그는 아름다움의 춤(순다라의 춤)을 추신다;
그는 황금 전당에서 춤추신다(황금의 춤);
그는 황금 틸라이에서 춤추신다(황금 틸라이의 춤);
그는 경이로운 춤(아트부다의 춤)을 추신다;
그를 과연 누가 알 수 있는가?Tirumular, Tirumantiram, B. Natarajan & N. Mahalingam (trans.), Mylapore: Sri Ramakrishna Math, 1991, p. 420. ChatGPT 번역.
아마 니체가 『티루만티람』의 아홉 번째 탄트라를 읽었다면 꽤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모든 시가 시바가 어떻게 춤추는지에 대한 내용이고, 우주 전체가 시바의 춤으로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모든 곳에 신의 춤이 존재한다."(Tirumular, Tirumantiram, p. 420.)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시바가 괜히 "춤의 제왕"으로 불리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시바교 사상에 대해 좀 더 조예가 있었다면, 시바의 춤이 지닌 종교적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저도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라 각각의 시들의 의미에 대해서까지는 고민해 볼 수가 없네요. 다만, 우주 전체가 일종의 춤이라는 시바교의 종교적 이미지 자체는 참 인상적인 것 같습니다.
2. 야훼
춤추는 신으로 또 유명한 신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야훼입니다. 오늘날에는 야훼가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보니, 야훼를 하늘 구름 위에 있는 근엄한 노인 모습으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죠. 심지어 유대-그리스도인들조차도 야훼가 춤을 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교회나 성당을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매우 유명한 성경 구절에 이미 문자 그대로 야훼가 춤을 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죠. 그 구절이 바로 스바냐 3:17인데, 한국 개신교에서 주로 쓰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번역상의 선택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 구절 자체는 알아도 야훼의 춤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죠.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 구절에서 '춤'이라는 요소를 강조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동번역 성경은 다소 의역을 집어 넣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의역이 원문을 훼손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공동번역 성경에는 동일한 구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스바냐 3:17)
개역개정에서 "기뻐하다"라고 번역되고 공동번역에서 "춤을 추다"라고 번역된 본래 히브리어 단어는 "길(giyl)"입니다. 이 단어는 격렬한 감정 때문에 뱅뱅 돌다는 것이 원래 의미이다 보니, 개역개정 성경처럼 단순히 "기뻐하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공동번역 성경처럼 "춤을 추다"라고 하는 것이 좀 더 뉘앙스를 잘 살릴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구절은 남유다 왕국이 부패하여 외세의 침공을 받아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스바냐 예언자가 선포한 이후에, 그 망한 나라가 언젠가는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 회복의 날이 오면, 야훼가 깨끗하게 된 자신의 백성을 보고 너무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방방 뛰어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스바냐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거죠. 구름 위의 근엄한 할아버지의 이미지와 달리, 사실 구약성경의 야훼는 감정 표현을 굉장히 격하게 하는 신입니다.
아브라함 헤셸
유대교 철학자 아브라함 헤셸(A. J. Heschel)은 바로 이런 구약성서 예언서의 구절들에 주목하여 야훼가 격렬한 '정념(pathos)'을 지닌 신이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리스 형이상학이 묘사하는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은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외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무감정의 신인 반면, (그래서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 그리스 형이상학에서는 대개 연약함의 표시인 것처럼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감정'이 절제된 상태가 신적 상태인 것처럼 묘사되는 반면,) 구약성서의 야훼는 인간에게 너무나 관심이 많아서 인간 때문에 상처받고 인간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정념의 신으로 나타난다는 거죠.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그리스의 아낭케(anankē)와 비슷하다. 그는 인간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다.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그러나 세상은 잊어버린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며 인간에게 알려지고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이 세계를 당신의 전지전능으로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건들에 긴밀하게 반응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행실을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무감동하게 심판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심판 속에는, 심판받는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가장 긴밀하고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분의 마음자세가 깊이 침투되어 있다. 그분은 인간의 행동과 운명에 인격적으로 관여하실 뿐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동요되기도 한다.
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2023, 355쪽.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들어오면 '야훼의 춤'은 훨씬 더 확장된 형태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표적 사상인 '삼위일체' 개념이 바로 일종의 '신적인 춤'으로 묘사되거든요.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바로 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상호내주" 혹은 "상호침투"라는 전문 용어가 신학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용어의 본래 그리스어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가 바로 손을 잡고 빙빙 도는 모습을 의미하죠. "페리"가 둘레나 주위를 의미하고 "코레시스"가 돌면서 춤추다는 의미니, "페리코레시스"는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 한국의 "강강술래"에 거의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이거든요. 실제로, "페리코레오(perichoreo)"는 둘러싸다는 의미이고, "페리코레우오(perichoreuo)"는 춤추면서 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를 표현한 고딕 문양
캐서린 모리 라쿠나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를 '춤'에 빗대어 설명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일종의 춤을 추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거죠. 성부, 성자, 성령은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서로 역동적으로 춤을 출뿐만 아니라, 그 춤을 바라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같이 춤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바로 이런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과 춤의 유비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유를 전개하기도 하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8)는 성경의 구절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삼위일체의 춤이야말로 사랑의 모습에 대한 가장 완전한 유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삼위일체론으로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캐서린 모리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도 이렇게 말합니다.
배경을 살펴보면 8세기 그리스 신학자 성 요한 다마센(John Damascene)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란 용어를 사용하여 각각의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상호 내재(coinherence)한다는 사실과 내재뿐 아니라 하나님 위격 각각이 갖는 역동적이며 생명이 넘치는 특성을 보여주려 하였다. 페리코레시스 개념은 하나님의 하나 됨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에 속한다고 보았던 초기 교부들의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였다. 아버지의 군주론이 카파도기아 교부 신학자들이 주창한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 교의로 약화되자 페리코레시스 개념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캐서린 모리 라쿠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이세형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8, 388쪽.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춤(the divine dance)'이라는 이미지가 페리코레시스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철학적으로 보증할 수는 없지만, 춤이라는 유비는 아주 효과적이다. 안무는 춤을 추는 이 각자가 다른 이를 향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움직여 가도록 협력함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대칭을 이루어내는 운동이다. 상호 활동과 교류를 통해 춤추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은 에워싸 포용하여 침투해 들어가고, 포위하여 확장해 나가는 하나의 흐름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춤에는 지도자도 추종자도 없고 다만 주고받는 영원한 상호 운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캐서린 모리 라쿠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 389-390쪽.
그래서, "나는 춤추는 법을 이해할 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대로라면, 니체는 힌두교의 시바를 믿어야 하거나 그리스도교의 야훼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니체의 구절을 보고 뭔가에 꽂혀서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 보았는데, 하루 종일 힌두교 경전을 뒤지고 그리스도교 신학 서적을 뒤지다 보니, 여기라도 공부한 것을 올리지 않으면 시간을 쏟은 게 억울해서(?) 올려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