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이 시대에 회피형 인간과 약자 혐오가 넘쳐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이질적인 현상은 모두 자본주의적 사고관과 허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적 사고관은 모든 가치를 자본으로 환원해서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허무주의는 고유한 가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모든 가치를 양화(Quantification)시키는 자본주의적 틀은 다양한 가치들의 고유한 지위들을 해체한다. 이 해체는 가치의 실재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니체가 경고했듯(Nietzsche, 1887), 가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세계에 허무주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후 들뢰즈는 자본주의 체계 내에 허무주의가 자리 잡게 되면 모든 가치를 자본으로 환원하는 흐름에 저항할 저변이 사라진다고 경고한다(Deleuze & Guattari, 1972). 이로써 자본주의의 흐름은 가속화된다. 자본주의와 허무주의는 별도의 맥락에서 생겨났을지 모르지만 점차 하나의 신체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치를 환산하는 도구인 돈과, 토크빌(Tocqueville, 1835)과 세넷(Sennett, 1977)이 말하듯, 가족과 친구 등 피부로 느껴지는 친밀한 관계와 생생하게 느껴지는 나뿐이다. 그 외에 의심스러운 것에 헌신하는 것은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와 허무주의에 배치된다. 더욱이 자본주의와 허무주의에 익숙해진 이들은 가치들을 대체 가능한 것, 교환 가능한 것, 타자화된 것으로 이해하는 데 안락함을 느낀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치는 허구이며, 자기 자신을 규제하는 권력의 농간으로 비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불확실한 가치들에 냉소하고, 저항하고, 분노한다.
특히 분노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허무주의자의 눈에는 '도덕, 정의, 연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이용해 나를 착취하려는 위선자"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는 정당화된다. 반대로 확실한 것, 즉 나 자신과 그 주변과 돈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편안하고 편리하다고 느끼며 이를 위협하는 것을 적으로 간주한다. 허무주의 세계 안에서 다양한 가치를 배격하는 약자 혐오가 각광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외된 타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고 촉구하는 것은 허무한 가치에 기반을 두어 나를 속이고 제약하는 우스꽝스러운 전술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약자는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바우만(Bauman, 2004)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제시했다.
자본주의와 허무주의에 익숙해진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들의 축소는 당장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여전히 자기 자신, 친밀한 관계, 돈이라는 나르시시스트적 기반이 남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르시시즘적 기반이라는 표현은 한병철(Han, 2012)과 누스바움(Nussbaum, 2018)의 생각을 빌려온 것이다.) 자기 자신과 친밀한 관계는 너무나도 생생하여 자본주의에 의해 아직 해체되지 않고 생존하고 있다. 돈의 가치는 이 둘과 달리 점차 더 견고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나르시시스트적 기반은 “나 아닌 것”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안락하다는 것이다. 이 안락함에 익숙해진 이들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이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자아 확장을 회피하게 된다.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Taylor, 1991), 의지의 방향을 안내해줄 가치의 기준이 부재한 상황은 오로지 자기만이 자신의 기준이 되도록 부추기며 이는 비대한 자의식에 양분이 된다. 얼마나 좋은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 가치평가의 확고한 기준으로 존재할 뿐, 나 아닌 것의 간섭과 나 아닌 것에 대한 의무는 희미해진다.
역설적으로, 비대해진 자신은 변화에 취약해진다. 리처드 세넷이 말했듯(Sennett, 1998), 불확실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곧 혼란과 불안의 재연이며,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은 곧 대체와 도태를 의미하므로 자기 외의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된다. 이때 회피는 자기방어에 합리적 수단이 된다. 자기 외의 다른 것에 대한 관심과 책임은 허무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지키는 것은 긴급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나와 친밀한 이들과 돈뿐이다. 이로써 현대사회에 나르시시스트적인 문화가 자리 잡게 되고 회피는 그 증상이 된다. 낯선 이를 만나 자신의 자아를 열어젖히는 “사랑”이라는 비자본주의적 가치야말로 자본주의와 허무주의의 논리에서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낯설음이 사회적 층위로 확장될 때 우리는 약자 혐오가 부상함을 목격하게 된다. 회피가 집단적 규범이 될 때, 타자는 자연스럽게 제거의 대상이 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회피는 놀랍게도 타자에 대한 공격과 맞닿아있다.
Bauman, Z. (2004). Wasted lives: Modernity and its outcasts. Polity.
Deleuze, G., & Guattari, F. (1972).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R. Hurley, M. Seem, & H. R. Lane, Trans.). Viking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72)
Han, B.-C. (2017). The agony of eros (E. Butler, Trans.). MIT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2012)
Nietzsche, F. (1967). On the genealogy of morals (W. Kaufmann & R. J. Hollingdale, Trans.). Vintage Books. (Original work published 1887)
Nussbaum, M. C. (2018). The monarchy of fear: A philosopher looks at our political crisis. Simon & Schuster.
Sennett, R. (1977). The fall of public man. Knopf.
Sennett, R. (1998). The corrosion of character: The personal consequences of work in the new capitalism. W. W. Norton & Company.
Taylor, C. (1991). The ethics of authenticity. Harvard University Press.
Tocqueville, A. de. (2000). Democracy in America (H. C. Mansfield & D. Winthrop, Tran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