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은 표상으로 축소된다.
(Tout ce qui était directement vécu s’est éloigné dans une représentation.)”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1.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가장 유명한 방식으로 정식화했다.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사회적 관계다.”[1] 이 한 문장은 여전히 날카롭다. 왜냐하면 드보르는 ‘매체 비판’(TV, 광고 등의 해악성)을 넘어서, 스펙터클을 사회적 관계의 형태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2] 스펙터클은 단지 무언가를 “보여주는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변형시키는 체제의 문법이다. 따라서, "스펙터클은 시각적 방식의 남용, 즉 대중 이미지 확산 기술의 산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물질적으로 구현된, 효과적인 세계관이다. 그것은 객관화된 세계관이다."[3] 그리고 라캉은 “보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라캉의 관심은 눈이 아니라 주체다. 더 정확히는, 주체가 “나는 본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조건, 그리고 그 문장이 언제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있다. 『세미나 XI』에서 라캉이 말하는 응시(regard)는 ‘누군가의 시선’ 같은 상식적 범주가 아니다. 응시는 오히려, 내가 세계를 대상화하고 소유하려는 그 순간에,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나를 붙잡는 균열의 점, “내가 주체로 서려는 시도”를 매번 미끄러뜨리는 대상 a의 형식이다. 그래서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보이고 있다”는 더 불쾌한 사실이다. 세계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보려는 바로 그 구조 속에서, 나는 늘-이미 ‘보이게 되는 자리’에 걸려 있다.
단, 이 글의 목적은 드보르를 라캉으로 “대체”하려는 것에 있지 않으며, 드보르의 마르크스주의적 정식화(상품, 물신주의, 분리, 매개된 사회적 관계)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위에, 라캉의 장치를 얹어 스펙터클을 조금 다르게 읽어보려 한다. 즉 스펙터클을 단지 기만(mystification)의 강화로만 보지 않고, 동시에 '향유의 조직(jouissance-management)'으로 본다. 스펙터클은 우리를 속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즐겁게도 만든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야말로, 폭로 이후에도 스펙터클이 지속되는 이유다. 우리는 스펙터클을 ‘믿어서’가 아니라, (심지어는 어쩌면) '즐기기' 때문에 유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존재한다. “그럼 스펙터클을 폐지하고, 진정한 삶으로 돌아가자.” 드보르와 상황주의가 던진 전략(데리브, 전용)은 바로 그 유혹을 건드린다. 하지만 라캉적 관점에서 ‘비-매개된 직접성’은 대개 또 하나의 환상이다. 사회적 관계는 늘-이미 상징계로 매개된다.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순수 지대는 생각보다 쉽게 스펙터클의 변종이 된다. 좋아요, 인정, 윤리적 우월감, “나는 그래도 깨어 있어”라는 자기도취... 진정성 담론은 종종 대타자의 승인이라는 교환 회로로 빨려 들어가며, 그 순간 진정성은 상품처럼 유통된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 스펙터클은 어떤 환상 구조를 지탱하는가?
- 그 환상은 어떤 향유를 조직하는가?
- 우리는 그 환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로지르는 것이 가능한가?
이 글이 제안하는 대답의 핵심 키워드는 ‘자기비준’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스펙터클의 일상적 작동은, 우리가 어떤 이미지나 시선의 자리를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내 행위로 인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굴러간다. 행위의 책임이 ‘나’에게 닿지 않게 하는 거리두기. 이러한 '냉소적 이성'의 거리두기는 체제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체제가 요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주체 형태(알면서도 계속 하는 주체)를 완성한다. 따라서 자기비준은, 내가 이미 어떤 동일시와 향유의 회로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외부 핑계 없이 기입하는 사건이다. “그래, 이건 구조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리고 나는 그 구조 안에서 행위한다. 그 행위는 내 것이다.”로 넘어가는 것. 라캉식으로 말하면, 환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환상의 구성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의 나의 몫을 회피하지 않는 것. 즉 “나는 속지 않아”가 아니라, 훨씬 불편한 문장—“나는 여기서 말했고, 여기서 했고, 그러니 이것은 내 책임이다”—로 넘어가는 절차다.
본문의 주제를 한 문단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펙터클은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이게 만드는 자리’가 라캉의 응시 자리다."
I. 스펙터클과 상상계
“스펙터클은 분리된 것을 결합한다. 그러나 그것을 ‘분리된 것으로서’ 결합한다.
(Le spectacle réunit le séparé, mais il le réunit en tant que séparé.)”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29.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1967년, 파리 5월 혁명 1년 전—는 표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 비판이지만 (상품 물신주의가 이미지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삶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살지 않고 구경한다, 등등.) 이는 기이할 정도로 라캉적 구조와 유사한 부분이 많으며, 이는 우연이 아니다. 드보르의 핵심 테제는 이러하다: "스펙터클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사회적 관계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라캉의 상상계(l'imaginaire)의 사회적 확장으로 읽을 수 있는 지점이다. 거울 단계(stade du miroir)를 떠올려보면 이러하다: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환호한다. "아, 저것이 나다!" 하지만 이 동일시는 오인(méconnaissance)에 기초하는 바, 거울 속 이미지는 통일되고 완전해 보이지만, 실제 유아의 신체적 경험은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아는 아직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그런데도 거울 속 이미지는 마치 완벽한 통제를 보여주는 것처럼 기능한다.
드보르의 스펙터클은 이 거울 단계의 사회적 버전으로, 광고, 영화, TV, 소셜 미디어—이 모든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통일되고 완전한 삶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행복한 가족, 성공한 커리어, 완벽한 육체, 충만한 향유. 우리는 이 이미지들과 동일시한다: "저것이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상상적 동일시) 하지만 이 동일시는 앞서 거울단계의 과정에서 설명했듯이 단순한 오인에 불과하며, 따라서 스펙터클이 보여주는 삶은 상품화된 이미지이자 연출된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미지를 욕망하면서, 실제 삶의 결핍을 은폐하게 된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에서는 "직접적인 경험은 (...)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관조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4]
따라서, 스펙터클은 ‘좋은 이미지’를 보여줘서 사람들이 속는 게 아니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미지-매개 관계로만 성립하게 만드는 사회적 형식이다. 즉, 스펙터클을 마주한 주체의 태도는 단순히 ‘나는 저 이미지를 욕망한다’를 넘어서 ‘나는 이미지로만 관계를 맺는다.’로 심화되게 된다. "스펙터클은 이 분리의 공통 언어일 뿐이다."[5]
II. 응시의 길들이기: 라캉적 전복
"나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을 본다.
(je me vois me voir Leçon.)"
— seminaires XI, Leçon VII (février 1964)
그러나 여기서 라캉은 드보르보다 더 나아간다. 드보르의 모델에서 스펙터클은 일방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스펙터클이 보여주고, 우리가 본다." 여기서 나타나는 '우리'는 수동적 관객으로 이것이 드보르가 비판한 "분리(séparation)"의 핵심인데, 여기서 삶은 구경거리가 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관객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라캉의 응시(regard/gaze) 이론에서, 사태는 훨씬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세미나 XI』에서 라캉은 응시를 대상 a의 형태들 중 하나로서 설명한다: "응시는 잃어버린 대상이다"[6] 라캉은 해당 세미나에서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응시는 밖에 있다."[7] 즉, 응시는 주체의 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응시는 '대상' 쪽에서 온다. 즉, "응시는, 욕망의 대상-원인이지만, 가시계에서는 주체의 대상-원인이 된다.”[8] 사르트르의 유명한 예를 변형해 보자. 여기서 당신은 열쇠구멍으로 엿보고 있다. 당신은 완전한 주인이다—당신은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당신'은 순수한 주체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바라보는 위치마저.) 이제 당신이 보이게된다. 이로서 바라보던 자(주체)는 바라보아지는 자(객체, 대상)로 그 시선의 위치가 전도된다. “나는 보인다... 가시계에서 나는 우선 그림(=대상)이다."[9]
라캉은 이것을 더 급진화한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아도, 응시는 이미 거기 있다. 우리는 늘-이미 보여지고 있다. 세계 자체가 우리를 응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말한 라캉의 "나는 그림이다(je suis tableau)"[10]의 의미이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하나의 스크린이 존재한다."
스펙터클에 대한 라캉과 드보르의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드보르의 관점 : 스펙터클을 허위/기만(mystification)의 강화로 잡는다.
라캉의 관점: 스펙터클을 향유의 조직(jouissance-management)으로 잡는다.
그렇다면 스펙터클의 기능은 무엇인가? 스펙터클은 이 불안을 야기하는 응시를 길들인다(domestiquer). 스펙터클은 우리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주체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나는 본다, 따라서 나는 주체다." 이 스펙터클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구경하게 된다—스펙터클이 우리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펙터클을 응시한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스펙터클이 우리를 응시한다. 광고는 당신을 바라본다—당신의 욕망을, 당신의 결핍을, 당신의 불안을. 소셜 미디어는 당신을 바라본다—알고리즘은 당신이 무엇을 클릭하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추적하면서. 당신이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동안, 스펙터클은 당신을 소비하는 것이다. (단, 추적/측정은 상징계의 기능(분류·명명·값 매김)이고 응시는 그 분류가 완결되지 못하게 만드는 ‘더 보게 하는 잔여(얼룩/구멍)’다.)
혹은 더 과감히 말하면 이렇다: 스펙터클은 단지 나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체로 서려는 시도를 매번 미끄러뜨리는 방식으로 나를 붙잡는다. 그래서 나는 주체가 되려고 볼수록, 더 깊이 ‘보이게 되는 자리’에 걸려들게 된다. “그림은 분명 내 눈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림 안에 있다"[11]
III. 상상적 동일시 vs. 상징적 동일시: 체제 재생산의 이중 구조
그리고 여기서 스펙터클이 지닌 문제가 등장한다: 동일시와 체제 재생산.
라캉은 두 가지 동일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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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적 동일시(imaginary identification): i(a) — '이상적 자아(ideal ego)'와의 동일시.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와의 동일시.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거울 단계의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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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 동일시(symbolic identification): I(A) — '자아 이상(ego ideal)'과의 동일시. 내가 관찰되고 싶은 지점과의 동일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와의 동일시. "저 위치에서 보면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 두 동일시를 모두 동원한다.
상상적 차원: 스펙터클은 우리에게 이상적 이미지들을 제공한다. 성공한 기업가, 섹시한 모델, 행복한 가족, 멋진 여행자. 우리는 이 이미지들과 동일시하게 된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해!" 이 동일시가 소비를 추동한다—저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 상품을 사야 한다.
상징적 차원: 더 중요하게, 스펙터클은 "누가 보는가"의 위치를 제공한다. 우리는 단순히 이미지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을 가치 있게 보는 시선의 위치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더 근본적인 차원이다. 예를 들어보자, 명품 가방을 사는 사람은 단순히 그 가방의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그 가방을 가치 있게 보는 타자의 시선과의 동일시다. "이 가방을 들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리고 여기서 "사람들"은 구체적인 누군가가 아니다. 그것은 대타자(l'Autre)—상징적 질서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체제 재생산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거짓 이미지를 주입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시선 자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적 상품 세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다—왜냐하면 우리가 동일시한 시선의 위치 자체가 자본주의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알튀세르가 말한 **"호명(interpellation)"**과도 맞닿아있는 현상이다. "이봐, 너!" 하고 경찰이 부르면 우리는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이미 그 호명에 응답하도록 주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펙터클은 우리를 호명한다. "이봐, 소비자!" "이봐, 시민!" "이봐, 성공하고 싶은 자!" 우리는 그리하여 돌아보게 된다—그리고 그 돌아봄 자체가 우리를 체제의 주체로 구성하게 만드는 행위다. 대타자의 승인 장치가 오늘날의 사회에선 수치로 외재화된다. “상품형식은 ... 양(量)의 범주다.”[12]
따라서
“스펙터클은 교환이 개인들 사이에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연결고리를 시각화한 것이고 돈은 그 연결고리의 물질화된 구현체이다(The spectacle ... a visualization of the abstract link that exchange establishes between individuals ... money ... the materialization of that link).” — Jappe, Guy Debord, 19.
IV. 드보르의 한계: 진정성의 함정
그러나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 이론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드보르는 스펙터클을 비판하면서, 암묵적으로 스펙터클 이전의 진정한 삶, 비-매개된 직접적 관계, 진짜 경험 같은 것을 상정하게 만든다. 그의 상황주의(Situationnisme) 전략—데리브(dérive)[13], 전용(détournement)[14]—은 스펙터클의 매개를 돌파하여 "진정한" 순간을 창출하려는 시도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의 관점에서, 이런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는 늘-이미 상징계에 의해 매개되며, 따라서 "직접적" 관계, "비-매개된" 경험 같은 것은 또 다른 환상으로의 도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친밀한 관계—사랑, 우정, 성관계—도 상징적 구조에 의해 매개된다. 라캉이 "성관계는 없다"[15]라고 말할 때, 이것은 두 주체 사이의 직접적이고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라캉적 의미에서) 비-매개된 직접성은 규범적 외부로 상정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짜 문제는 ‘진짜 경험’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진짜 경험’이라는 이름의 환상이 스펙터클과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진정성 담론조차 ‘대타자의 승인’(좋아요/인정/윤리적 우월감)으로 굴러갈 수 있다. 사랑, 우정, 건강, 가족, 윤리, 진실 등의 인륜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산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후기자본주의의 냉소적 태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라캉의 실재는 상징계의 균열로 존재하며, 이는 우리가 가진 것들의 가치를 불가산의 영역으로 밀어붙인다: "아니다. 사랑, 우정, 건강, 가족, 윤리, 진실은 사고팔릴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상품(교환가치라는 상징에 종속된 상태)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불가산의 영역은 늘 인륜성의 영역으로 남는다.
따라서 문제는 스펙터클을 폐지하고 진정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다음 세 가지로 표현 가능한 사실들로 환원된다.
- 스펙터클이 어떤 환상 구조를 지탱하는가?
- 이 환상 구조가 어떤 향유(jouissance)를 조직하는가?
- 우리는 이 환상을 가로지를 수 있는가?
드보르는 스펙터클을 기만(mystification)으로 본다—진짜를 가짜로 대체하는 것. 하지만 라캉적 관점에서 스펙터클은 기만 이상으로, 향유를 조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은 좋고, 좋은 것은 보인다" [16] 우리는 스펙터클에 속아서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도 즐기기 때문이다. 스크롤링의 쾌락, 광고의 유혹, 이미지들의 향연—이것들은 리비도적 투자를 수반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한다(They do not know it, but they do it)." 마르크스의 이 정식은 물신주의의 구조를 포착한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더 역설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한다."[17] 우리는 스펙터클이 거짓인 줄 안다. 광고가 조작인 줄 안다. 인스타그램이 연출된 것인 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긴다. 이것이 '냉소적 이성'의 구조이며, 이는 단순한 기만보다 훨씬 더 해체하기 어려운 가장 교묘한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이다. "그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니나, 실천상으로는 물신주의자들이다."[18]
V. 결론: 자기비준과 스펙터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Je pense où je ne suis pas, donc je suis où je ne pense pas)." — Écrits, Seuil, 1966, p. 517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행위를 비준하는 절차, '자기비준'의 절차가 필요로 한다. 스펙터클의 문제는 우리가 비준 없이 동일시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지들과 동일시하면서, 이 동일시를 자기 것으로 인수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보는 것뿐이다." "나는 그저 따르는 것뿐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이것은 바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우리가 분류하는 무사고성(Thoughtlessness)의 구조이다—비준의 거부, 책임의 회피. 의식적 차원에서의 사고가 무의식적 차원 곧 행위의 차원에서의 사고로 직결되도록 스스로의 행위를 비준하는 것. 이것이 '자기비준'의 핵심이다. “더 바라볼수록, 덜 산다.”[19] 따라서, 자기비준을 기준으로 스펙터클에 대한 수용을 나누면 다음과 같다.
자기비준 없는 무비판적 수용: 스펙터클은 ‘나’에게 동일시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동일시가 자동으로 승인(비준)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절차를 제공한다.
자기비준을 통한 비판적 수용: 반대로 자기비준은 “진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휘말린 동일시/향유의 절차를 ‘외부 핑계 없이’ 내 것으로 기입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traverser le fantasme)은 무엇인가? 그것은 환상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상징계적 현실이 가상(semblant)이라고 해서 환상 없이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환상의 구성적 성격을 인정하는 것에 더 가깝다. "이것은 환상이다—그리고 나는 이 환상을 내 것으로 비준한다." 그리고 이것이 냉소주의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냉소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다 안다, 그래서 뭐?" 하지만 이것은 비준이 아니다 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앎을 통한 거리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의 포기. 단, 비준은 “죄책감(초자아의 압력)”에 휘둘리는 것 아니라 원인(구조)을 인정한 채, 그 안에서의 내 위치를 서명하는 것으로, 이는 “내 탓”이 아니라 "내 몫"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자기비준은 구조 부정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의 행위 귀속(agency attribution)을 되찾는 절차이다. 자기비준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책임'과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구조적 책임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기비준은 (라캉적) '분석 종결의 통과'[20]이면서, (헤겔적) '객관적 인정의 형식'[21]이고, (사르트르적) '자유의 앙가주망'[22]이며, (아렌트적) '대표적 사고를 통과한 판단'[23]과 결맞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비준은 이렇다: "그래, 이것은 구조다. 그리고 나는 이 구조 안에서 행위한다. 이 행위는 내 것이다."
"Ratifio, ergo sum"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도.
[부록]
Q. 라캉적 구조주의의 비역사성 문제가 있지 않은가? 여기서 스펙터클이 지니는 역사적 층위에 대한 통찰은 없는가?
A. 라캉의 3계(상상/상징/실재)는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서 드러나는 층위들에 대한 구조이다. 스펙터클의 경우에는, 단순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치부하기에는 라캉의 상징계처럼 세상을 구조화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상징계가 어떻게 구조화되느냐는 통시적인 것이되, 상징계라는 구조 자체는 공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층위에서 한 시대의 스펙터클은 상상/상징/실재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자본의 축적 양태, 매체 기술, 노동·소비의 배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Q. "자기비준"의 개념적 위치는 무엇인가? 즉, 헤겔적으로 말하면 '주관적 의지인가, 객관적 인륜인가?'
A. 냉소적 이성의 문제는 의식(소위 '진실성/진심'이라는 상상적 이미지)와 무의식(행위적/실재적 측면)의 불일치이며, 이 불일치를 지양하는 것이 자기비준의 핵심이다. (단, '대타자의 보증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건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라캉 정신분석의 윤리적 태도와 연결되며, 자기비준은 주관적 의지가 객관적 인륜으로 나아가는 관문인 셈이다. 그러므로, 집단적 비준은 개인적 비준을 전제해야 한다. 집단이 비준하기 위해서는, 개별 구성원들이 각자 비준해야 한다. "우리가 했다"라는 집단적 비준은, "내가 했다"라는 개인적 비준들의 총체다.
Q. 환상을 "가로지름"이 무엇인가? 너무 모호한 것은 아닌가?
A. 이것은 모호한 문제가 맞다. 단,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환상 너머에 '진정한 삶'이 있다는 '상상'도, 이 환상이 '내가 동일시해야하는 것'이라는 '오인'도 전부 '가로질러야함'을 의미한다. (환상 '없는' 삶이 아닌 환상을 '가로지른' 삶인 것이다.) 환상의 지위는 그 자체로 삶을 이룬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즉, 헤겔이 『논리학』 본질론에서 말하듯 "본질은 현상해야만 한다(Das Wesen muß erscheinen)." — WdL II, (GW 11:323) 따라서 환상을 자기비준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이다. 헤겔적으로 말하면 '환상을 가로지르기'란 가상을 본질의 은폐가 아니라 현현으로서 바라보기 위해, 주체의 관찰 위치를 변화시키는 방법론인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남는 질문은 두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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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비준”이 개인 책임론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떤 제도/집단적 형식이 같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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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보르의 détournement/derivé 같은 전략은 정말 “진정성 환상”으로만 환원될까, 아니면 정치적 전술로서 별도의 자리가 있을까?
그렇기에, '정신분석은 주체를 윤리의 문턱까지만 데려다준다.' 자기비준의 역할은 여기까지이며, 그 이후는 더 세세한 방법론(자기비준 이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자기비준은 윤리의 종점이 아닌 시작점이다.
"Le spectacle n’est pas un ensemble d’images, mais un rapport social entre des personnes, médiatisé par des images."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4. ↩︎
“드보르의 경우, 정치는 글쓰기였다(in Debord’s case politics was largely writing ...)” — T. J. Clark, “Foreword,” in Anselm Jappe, Guy Debord, trans. Donald Nicholson-Smith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vii. ↩︎
"Le spectacle ne peut être compris comme l’abus d’un mode de la vision, le produit des techniques de diffusion massive des images. Il est bien plutôt une Weltanschauung devenue effective, matériellement traduite. C’est une vision du monde qui s’est objectivée."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5. ↩︎
"direct experience ... are replaced by a passive contemplation of images ... chosen by other people." — Jappe, Guy Debord, 6. ↩︎
"Le spectacle n’est que le langage commun de cette séparation."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29. ↩︎
"Le regard est cet objet perdu."— seminaires XI, Leçon XIV (13 mai 1964) ↩︎
"Le regard est au dehors." — seminaires XI, Leçon IX (11 mars 1964) ↩︎
“The gaze, the object-cause of desire, is the object cause of the subject of desire in the field of the visible. ” — Joan Copjec, Read My Desire: Lacan against the Historicists (Cambridge, MA: MIT Press, 1994), 44. ↩︎
"je suis regardé ... Dans le visible d’abord je suis tableau.” — seminaires XI, Leçon IX (11 mars 1964) ↩︎
각주 9 참조. ↩︎
"Le tableau ... est dans mon œil. Mais moi, je suis dans le tableau.” — seminaires XI, Leçon VIII (4 mars 1964) ↩︎
“la forme-marchandise ... la catégorie du quantitatif"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38. ↩︎
“서로 다른 분위기들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기법(une technique du passage hâtif à travers des ambiances variées).” — Doublage et détournement, François Bovier ↩︎
“그 조각들의 의미를 바꾸는 것(changer le sens de ces fragments).” — Doublage et détournement, François Bovier ↩︎
"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 seminaires XX 『Encore』(1972–73) ↩︎
"ce qui apparaît est bon, ce qui est bon apparaît."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12. ↩︎
“they know very well what they are doing, but still, they are doing it” — Slavoj Žiž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2nd ed. (London: Verso, 2008), 26. ↩︎
“They are fetishists in practice, not in theory.” — Žižek, Sublime Object of Ideology, 28. ↩︎
"plus il contemple, moins il vit." — La Société du spectacle, thèse 30. ↩︎
"au-delà de la traversée du fantasme" — Jacques Lacan, « Proposition du 9 octobre 1967 sur le psychanalyste de l’École », in Autres écrits (Paris: Seuil, 2001), 251. ↩︎
“The contract presupposes that the persons entering it recognize each other as persons and owners...” — G. W. F. Hegel, The Philosophy of Right, trans. S. W. Dyde (London: George Bell and Sons, 1896), §71 (Remark). ↩︎
"crire, c’est une certaine façon de vouloir la liberté... vous êtes engagé." — Jean-Paul Sartre, Qu’est-ce que la littérature ? (Paris: Gallimard, 1948), ↩︎
"To think with an enlarged mentality means that one trains one’s imagination to go visiting." — Hannah Arendt,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ed. Ronald Bein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