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후설의 현상학은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 중의 철학으로 손꼽힌다. 후설은 수학자로서의 꿈을 키우며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브렌타노의 심리학 수업을 듣고 철학자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처음에는 심리학주의(모든 것은 심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2+2=4'가 진리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라는 사조를 가진 학파)를 옹호했으나, 그의 논문이 프레게에게 비판을 받은 후, 자신의 철학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고 그 결과 현상학을 연구하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았다. 후설은 자신의 철학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철학을 검토한 학자다. 현상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후, 그는 다양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전기·중기·후기를 거치며 자신의 이론을 지속적으로 정교화했다.
“데카르트적 성찰”은 그의 후기 현상학을 보여주는 저서다. 그는 프랑스에서 강의를 하고 환대를 얻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데카르트적 성찰”을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 철학계는 후설의 강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강의는 자신의 현상학을 소개하고 널리 전파할 목적이었던 만큼, “데카르트적 성찰”은 그의 현상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성찰’은 현상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 핵심 사유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적 성찰”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 줄거리
에드문트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은 총 5개의 성찰과 서문을 포함한 6개의 장으로 나뉜다. 이는 에드문트 후설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가지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에 기반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후설이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분명히 서술한 것처럼 그의 현상학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쫓아가지만, 데카르트가 내린 철학적 결론과는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서론은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할 그 시대 철학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명증성을 가진다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의심되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후설이 이야기한 것처럼, 소박한 객관주의에서 초월적 주관성으로 철학의 방향을 바꾸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데카르트의 성찰 이후 모든 학문이 초월적 주관성에 기반해 발전했지만 그들의 근본을 잃어가고 있음을 비판한다. 특히,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적‧수학적 인식만이 세상을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오만과 편견에 빠져들었고, 이는 학문과 철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을 통해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될 수 있는 제1철학을 다시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증주의가 학문 발전에는 도움을 줬지만, 인간 삶의 의미를 소홀히 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제1성찰
모든 학문적 물음은 명증성을 추구한다. 명증성이란, 특정 사물 혹은 현상에 대한 사태 그 자체를 파악함을 말한다. 명증성에는 충전적 명증성과 필증적 명증성이 있다. 충전적 명증성이란 특정 사물 혹은 현상에 대해 모든 면이 주어져 그 자체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필증적 명증성이란 사물 혹은 현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의심 불가능성을 말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의심할 수 없으므로 필증적 명증성에 속한다. 후설은 그의 현상학에서 필증적 명증성을 가진 곳으로부터 철학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명증성을 가지지 못한다. 세상은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므로 비존재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현상학적 판단중지(에포케: 객관적 세계를 괄호침)를 한다면 우리는 순수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세계의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자아를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이라고 부른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주관은 필증적 명증성을 가지며, 세계는 초월론적 자아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첫째, 데카르트는 “나는 존재한다”로 발견된 자아를 세계의 작은 한 부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설에 따르면, 나의 초월론적 자아 없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기하학 공리를 추구하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다른 학문 또한 질서지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설에게 기하학은 학문의 한 분야일 뿐이기에 에포케에 의해 괄호쳐져야 하는 세상 현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제1성찰을 통해서, 후설은 데카르트적 방법론의 중요성과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발견된 초월론적 자아의 존재, 그리고 이를 통한 세계 해석의 기본 토대를 설명한다.
제2성찰
제2성찰은 초월론적 자아가 세계의 현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기술한다.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후설이 자연세계에 대해 에포케, 즉 세계존재에 괄호를 친다는 것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는 자명하다’는 전제에 대해 괄호를 치는 것이다. 세계가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은 제1성찰에서 말한 것처럼 명증적이지 않다. 따라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초월론적 자아를 찾기 위해 세계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려는 것뿐이다. 이 부분을 놓치면 "후설이 세계를 부정한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후설은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초월론적 자아가 세계에 선행함을 밝힌다. 세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세계의 현상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초월론적 자아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 지평, 그리고 종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인식의 지향성이란, 의식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 혹은 현상을 마주했을 때 자아는 그 사물 혹은 현상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 이 말은 의식과 대상을 뗄 수 없는 존재, 즉 의식 없이는 현상이나 대상이 의미 있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의식 없이 의자나 책상과 같은 사물은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의식이 이러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이는 나의 의식과 별개로 진리가 존재한다는 전통적인 인식론과는 매우 다르다. 초월론적 자아는 세계의 현상을 마주했을 때, 자아의 지평을 통해서 현상을 해석한다. 자아는 이전의 경험과 지금의 마주침, 그리고 ‘더 많이 생각함’이라는 미래 예지를 통해서 사물을 파악한다. 인간이 집의 앞면만 보고도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전에 집을 봤던 경험을 통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물이 집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고 또한 아직 주어지지 않은 감각적 정보, 즉 집의 뒷면까지도 예상해서 집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후설은 ‘종합’이라고 한다. 이처럼, 후설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밝혀진 초월론적 자아의 지향성과 지평 구조 같은 의식 작용을 분석함으로써, 대상이 나에게 명증적으로 주어지는 과정을 밝히는 학문인 것이다.
제3성찰
제3성찰은 명증이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후설에 따르면 현실세계에서의 명증이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와 이성이 명증성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는 “명증은 지향적 삶의 근원현상이다”라는 말로 이를 밝히고 있다. 후설에게 명증성이란, 대상이 우리에게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우리에게 그 자체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이 그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자아의 지평 속에서 종합하기 때문에, 모든 인식의 타당성은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다.
또한, 여기서 후설은 습관적 명증을 이야기한다. 습관적 명증이란 모든 명증이 나에게 머물러 있는 ‘가짐’을 건립하는 것인데, 이처럼 처음에 명증으로 다가온 사태나 현상은 나에게 명증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명증적이라고 판단된 어떠한 사물에 대한 판단은 미래에도 명증성을 가진다. 이러한 습관적 명증은 초월론적 자아의 지평처럼, 세상을 해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세상의 존재자는 그 자체로 명증성에 대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명증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명증성을 드러내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제4성찰
제4성찰은 초월론적 자아의 자기 구성 문제를 다룬다. 후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라는 개념을 사용해 초월론적 자아의 구성을 설명한다. 후설은 제3성찰에서 습관적 명증을 통해 초월론적 자아의 역사성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초월론적 자아는 지향성과 종합을 이용해서 대상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 자아로, 자신의 자아에 의해 만들어진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다. 세계는 대상 세계로 존재하지만, 대상 세계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습관성과 지평으로 인해 의미지어진 독자적 세계가 각자의 자아에 주어지고, 우리는 이를 모나드라고 말한다.
초월론적 자아는 각자의 습관성과 성격의 속성을 지닌 영혼을 형성하고, 이런 영혼이 각자의 모나드인 것이다. 또한, 초월론적 자아는 명증적 체험을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법칙(인과법칙 혹은 시간의 법칙)에 따라 적립한다. 이렇게 적립된 명증적 체험이 미래의 대상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그는 수동적 종합이라고 말한다. 수동적 종합을 통해, 초월론적 자아가 새로 경험하는 대상을 해석하는 것을 능동적 자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과 시간성에 기반해 구체적인 자아를 통일체로 가능케 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을 발생학적 현상학이라고 한다.
제4성찰에서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이 관념론임을 밝힌다. 하지만, 실제 세상이 의미 없고 나의 관념에 따라 혹은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를 향하는 고정적 관념론이 아니라, 초월론적 자아가 내적 시간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세상을 형성해 나가는 ‘능동적 관념론’이다. 즉, 초월론적 자아가 세상 존재의 근거가 되지만,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제5성찰
후설은 자기 현상학이 유아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 유아론이란, 세상에는 ‘나’라는 자아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후설의 현상학이 모나드를 통한 초월론적 자아의 독자적 세계를 설명하기에 이런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을 이용해 이러한 비판을 정면 돌파한다.
먼저, 후설은 초월론적 경험을 통해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에포케(괄호치기)를 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초월론적 자아만 남게 된다. 초월론적 자아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로 파악한다. 타자는 나와 같은 자아가 아니라 신체라는 사물로 인식된다. 이런 타자와의 신체 경험이 다른 초월론적 자아를 인식하는 시초가 된다. 초월론적 자아는 자신의 의식과 자신의 신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개인적 경험을 통해 미리 파악하고 있다. (예: 내가 손을 움직일 때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사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신체가 움직이고, 자신의 감정적 변화에 따라 신체가 반응한다. 처음에는 신체로만 파악되던 타자는 초월론적 자아의 지평과 습관성, 그리고 더 많이 생각함이라는 인식 작용을 통해 자기와 똑같은 초월론적 자아로 인식된다. 내가 여기 있고 다른 자아가 저기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언제든지 나의 자리 옮김을 통해 타자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음을 파악한다. 이러한 공유된 성격은 타자 경험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타자 경험은 간접 현전일 뿐, 직접적 경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자아와 신체의 결합 상태나 반응 상태를 통해 타자의 자아의 기분이나 본질을 파악하려 하지만, 이는 정확한 파악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나에게 파악된 세계가 어떻게 다른 초월론적 자아, 즉 다른 모나드에게도 공동의 세계로 파악될 수 있는지를 해명한다. 일단 공동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각 모나드의 경험 기반이 되는 세계가 같음은 증명되었다. 그 후, 나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의 동일성은 모나드의 상호주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각 모나드는 타자를 인식하며, 상호 교류를 통해 자신의 지평을 확장해 간다. 이러한 교류는 각 모나드가 가진 지평과 습관까지도 공유하게 된다. 나의 지평과 습관성은 과거 명증이라는 형태로 나의 자아에 각인되지만, 자아는 각인된 명증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이러한 교류는 문화‧교육 등의 형태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를 통해 공동의 세계를 인식하는 모나드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는 의식이 타자와 상호작용하며 보편적 객관성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문화 모나드 공동체를 형성했다.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과의 교류를 상세히 관찰하면, 다른 모나드 공동체를 가진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이 같은 대상세계를 보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모나드의 교류와 공동체를 통해 해석할 수 있다.
결론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통해 그의 현상학이 제1철학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주의자들은 세상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과학적 방법만을 고집했고, 이는 학문의 위기라고 그는 판단했다. 실증주의자들이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한 이유는, 실증주의적 방법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음에도, 다른 모든 접근법에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단은 학문 간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했고, 교류의 결여는 단기간 학문적 발전이라는 성과를 이룩했지만, 더 높은 단계로의 도약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또한, 학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인간성을 소외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는 초월론적 자아가 세상에 선행하기에, 초월론적 자아를 밝히고 이것의 인식 작용을 연구하는 것이 다른 모든 학문적 접근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데카르트적 성찰”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데카르트가 자신의 시대의 학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무엇도 의심할 수 없는 필증적 명증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처럼, 후설 또한 초월론적 자아를 필증적 명증이라 증명하고 철학의 시작으로 삼았다. 이는 실증주의의 독단을 넘어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주관적 자아가 주변인이 아닌 능동적 역할을 해야 함을 밝히면서, 당시 학문에서 잊혀져가던 인간성을 부활시키려 한 것이다.
- 유럽 학문의 위기와 오늘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고 뉴턴의 「프린키피아」 이후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뉴턴은 물리학적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했고, 그의 설명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부터 달의 움직임까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기에 그 자신감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된 실증주의 학자들이 물리학적 방식만이 세상을 파악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유럽 학문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숫자와 과학적 논리에 근거한 물리학적 방식은 세상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 있었지만,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했다.
인간의 생활 세계는 인간이라는 수치화할 수 없고 감정을 가진 존재가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제외하고 숫자와 연구실 결과만으로 파악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학문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과 인간성의 발현이 아니라 과학적 성과로 삼는다면, 인간은 도구화되고 과학적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도구적 이성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도구적 이성이 세계를 절망의 세계로 몰아넣은 세계대전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후설의 문제의식 또한 비슷하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방법이 한 가지 방법일 뿐,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뒤로 한 채, 자신들의 방법만 고집했다. 과학적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 발전이라는 선물에 매료된 당시 유럽의 학문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랐고, 국가는 중상주의 정책으로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이를 지원했다. 후설은 학문에서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것을 위기로 여겨,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논리실증주의가 진리를 찾는 유일한 길이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 초월론적 자아에서 시작된 우리의 자아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지평 속에 여러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논리실증주의는 초월론적 자아에게 주어진 한 가지 명증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그에 따라 사태에 접근할 때 비로소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상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아니, 훨씬 급격한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눈 감고 뜨면 새로운 기술의 AI가 생겨나고 있다. 과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물질적 가치의 실현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의 위기는 학문 영역을 넘어선, 인간 존재 전체의 위기라 할 수 있다. 모든 가치관이 사라져 가고, 과학 발전과 이를 활용한 물질 추구만이 절대선이라는 시대다. 후설이 지금의 시대에 살았다면 어느 때보다 인간성 결여를 한탄했을 것이다. 과학적 발전이나 물질 추구는 초월론적 자아를 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 정답일 수 없다. 여기서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해답 중 하나"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히려 다른 여러 대안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그에 따라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초월론적 자아는 타자의 신체 경험을 통해 타자를 파악한다. 하지만, 나의 자아와 신체의 결합성이 타자와 타자 신체의 결합성과 같다고 느낄 수는 없다. 내가 행복을 느낄 때 보이는 신체적 반응이 타인이 행복할 때 보이는 신체적 반응과 똑같을 수 없다. 같다고 해도, 행복의 정도와 신체적 반응의 정도가 다르다. 따라서, 후설은 타자 경험은 간접적 경험일 뿐, 직접적 경험이 아니기에 타자를 완벽하게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자 체험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본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는 모두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데, 두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이며,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소년이 온다”의 모진 고문 피해자는 자신의 신체를 증오하고,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조차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들의 고통을 우리가 과연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은 “이제 됐다”며 피해자들에게 극복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비정상적이라 치부하고 멀어진다. 이는 피해자들이 자기를 숨기고 아픔을 내면화하며 세상에서 소외되게 만든다.
후설은 습관적 자아와 지평, 그리고 발생학적 현상학을 통해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했다. 이는 우리가 과거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분들의 희생 없이는 지금의 민주주의는 꿈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과 투쟁은 우리의 초월론적 자아에게 "반항할 수 있는 예지"를 과거 지평 형태로 남겼고,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로 나아갔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들에게 빚이 있다. 우리가 빚을 갚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었던 우리의 입장에서 그분들의 초월론적 자아를 단순히 “완벽히 안다”고 확신하지 말고, 그분들이 자기 페이스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인간이 문제이자 해결책이다. 피해자에게 상처 준 사람도 인간이지만, 타자 체험을 통해 극복의 단초를 열 수 있는 존재도 인간이다. 후설은 자아의 자기 경험을 통해 타자 체험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는 자아가 타인을 자기 입장에서만 볼 수 있다는 한계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어느 정도 유추"함으로써 공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이 기쁨을 느낄 때 함께 울 수 있는 존재다. 지금 시대의 해결책은 인간적인 모습의 회복(다른 가능성과 가치를 열어두기)이 아닐까. 타자 체험을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물질적으로만 간접 체험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타인의 고통과 경험을 깊이 헤아리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결론
후설의 “제1철학”의 꿈은 단순히 학자로서의 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발전이 인간을 소외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세상, 그리고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며 각각의 관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세상이 후설이 원하던 세상일 것이다. 후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잃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박해를 겪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인간성을 찾으려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이 고전인 이유는 과거보다 지금 후설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의 그늘 속에서 인간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를 전면 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인간다움을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이 현상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