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공부를 하기가 싫어질 때마다 다른 철학의 분야들을 기웃거리는데, 이번에 뒤적여 본 찰스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이 참 재미있네요. 1000쪽이 넘는 벽돌책이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하고 2장까지 살펴보았는데, 두고두고 진지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테일러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특정한 '도덕적 틀' 혹은 '도덕적 존재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네요. 우리가 인지하든지 인지하지 못하든지,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가치 없는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서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테일러의 논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반응들은 가치에 대한 암묵적 평가를 담고 있고, 우리는 바로 그 암묵적 평가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이 되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성의 도덕철학이 단순히 '무엇을 하는 것이 올바른지(what it is right to do)'라는 주제에만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테일러는 '무엇이 되는 것이 선한지(what it is good to be)'라는 더욱 포괄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도덕적 틀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무엇이 선한 삶인지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단순히 특정한 행위에서 '옳음/그름'을 따지려 하는 개별적인 논의가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테일러는 도덕적 틀에 대한 담론이 망각되어버린 근대 이후의 철학적 경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네요. 근대 이후로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의 부흥과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고자 하는 '다원주의'의 부흥으로 우리가 언제나 도덕적 틀을 전제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무시되었지만, 더 나아가 아무런 도덕적 틀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식의 주장들이 만연해졌지만, 도덕적 틀은 우리가 벗어버리려 할 때조차도 우리의 삶에 언제나 내재되어 있을 뿐더러, 스스로 도덕적 틀에서 자유롭다고 자부하는 '근대적 정체성'조차 여전히 자신의 도덕적 틀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테일러의 핵심적 주장인 것 같습니다.
나는 우리의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도덕적 존재론이 의도적으로 심하게 억압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는 부분적으로 근대 사회의 다원성으로 인해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위에서 거론된 자연주의자들의 경우처럼) 근대 인식론이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인식론과 관련된 정신적 시각이 우리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착수하고 있는 작업은 대체로 복원의 시도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근거지의 대부분은 싸워서 얻어야 할 것이며, 분명 모든 사람을 설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권기돈 & 하주영 옮김, 새물결, 2015, 32쪽.
흥미로운 것은, 테일러의 논의가 '삶의 의미'라는 주제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입니다. 철학과에 들어오는 수많은 학부생들이 처음에는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다가 전공을 깊이 공부할 수록 실망하고는 하죠. 학계에서 논의되는 철학은 대부분 '삶의 의미'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을 뿐더러, 종종 그 주제를 다루는 것을 '비학술적'이라고 치부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데에는, 철학과 신입생들이 학술적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다소 어긋난 기대를 가지고서 공부를 시작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오늘날의 학술적 철학 자체가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다루고자 하는 시도를 거의 포기하고서 일종의 직무유기에 빠지고 말았다는 문제도 있죠. 하지만 테일러는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야말로 근대 이후의 자연주의와 다원주의의 편재로부터 발생한 잘못된 경향이라고 지적합니다. '도덕적 틀' 혹은 '도덕적 존재론'이란 인간의 삶에서 결코 폐기될 수 없는 논의의 주제라고 한다면,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철학이 다시 '도덕적 틀' 혹은 '도덕적 존재론'에 대해 사유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주장은 우리가 삶에서 지향해야 할 만한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혹은 우리의 '삶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삶의 의미'가 근대 이후로 회의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는 작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테일러의 주장입니다.
근대 세계가 이러한 [도덕적] 틀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음은 근대 세계에 관한 진부한 사실이다. 적어도 명시적인 철학적 독트린이나 신학적 독트린이 의심에 처해졌음은 명약관화하다. 몇몇 전통적인 틀은 불신되거나 아니면 명성의 공간처럼 개인적 애호의 지위로 강등되었다. 또 어떤 틀들은 존재의 질서에 관한 플라톤적 관념처럼 최초의 형태로는 전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계시 종교의 형태는 아직 많이 살아 있지만 크게 도전 받고 있다. 어떤 것도 근대 서구에서 사회 전체의 지평을 형성하지 못한다.
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45쪽.
믿을 수 있는 틀의 발견을 탐색의 목적으로 삼는 한에서만, 그런 한에서만 이 탐색이 실패할 수도 있음이 가능해진다. 실패는 개인적 불충분함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틀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비롯될 수도 있다. 왜 이것을 의미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말할까? 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정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 틀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무의미한 삶으로 빠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색은 항상 의미의 탐색이다.
그러나 의미 문제는 또한 탐색을 위해서는 명시화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우리 인식 때문에 제기되기도 한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명시화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근대인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는지는 우리 자신의 표현력에 달려 있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서 발견은 발명에 의존하고 발명과 뒤얽혀 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적절한 의미 있는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라는 말의 다의성에는 우리의 삶의 상황과 특별히 들어맞는 면이 있다. 삶은 의의point가 있어야 의미meaning가 있고, 의의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와 기타 형태의 표현에도 적용된다. 점점 더 우리 근대인들은 첫 번째 뜻에서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을 통해 두 번째 뜻에서의 의미를 성취한다.
따라서 설령 삶의 의미라는 말이 아무리 조롱받는다 해도 삶의 의미 문제가 여전히 우리 의제에 오르는 이유는 의미가 상실되려고 하기 때문이거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탐색 대상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47-48쪽.
그래서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에는 아주 다양한 함의들이 한꺼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적 해석학을 전공하는 저의 관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언제나 특정한 '선입견' 속에서 세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해석학의 논의가 테일러를 통해 '도덕적 틀'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철학의 맥락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네요. 또한 '삶의 의미'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서 처음 철학을 공부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제 자신을 떠올려 보더라도, 우리가 결코 '도덕적 틀'이나 '정체성'에 대한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테일러의 입장은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주의나 냉소주의로 너무나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는 오늘날의 문화적 태도에 대해 중요한 비판을 제기하는 것 같아서 반갑기도 하고요. 조금 더 추측을 전개해 보자면, 개인의 '정체성'이 언제나 '도덕적 틀'을 바탕으로 형성된다고 강조하는 테일러의 논의는,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의미지평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강조하는 헤겔의 철학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테일러는 『헤겔』이나 『헤겔과 현대 사회』 같은 저명한 헤겔 연구서들의 저자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도덕적 틀' 혹은 '도덕적 존재론'에 대한 사유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테일러의 논의가,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가 세속화 시대에서 종교가 지닌 의의에 대해 강조하면서 쓴 다른 저서들의 논의와도 다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실제로, 테일러는 『세속 시대』나 『현대 종교의 다양성』 같은 저서들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