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뭘까요

믿음은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여기는 것'을 일단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많은 생각을 하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거짓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명제를 참이라고 여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일부 믿음이라고 여겨지는 형태, 가령 일부 종교나 과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것을 굉장히 꺼립니다. 때로는 죄의식까지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저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1+1=2이다' 같은 것이 있겠죠. 수학적으로 공리로부터 유도된 정리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 명제를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평면 기하학에서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고 믿어.'라는 표현은 다소 어색하죠.

믿음의 대상은 역으로 '아닐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그 대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지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가장 바랍직한 예시는 '과학적 가설'인 것 같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내놓은 가설을 믿습니다. 하지만 참일 가능성이 100%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참이라고 보이기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하죠. 믿음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정도 이상의 근거가 존재하면서, 완벽히 증명할 수는 없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당신이 부정하고 시험하는. 그렇게 계속 나머지를 채워서 참에 가깝게 만들려고 하는 의지.

그런 면에서 수학적 명제가 아닌 모든 생각은 믿음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의심과 부정을 내려놓는다면 믿음이 아니게 되겠죠.

이상 저의 짧은 사견이었습니다. 논리적인 근거는 부족한 것 같지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일반적으로 현대 인식론에서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는 "나는 1+1=2라고 믿는다"는 아주 표준적인 용법입니다. "나는 1+1=2라는 것을 안다"가 아주 표준적인 용법인 것처럼요.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것들은 우리 삶의 형식의 일부분이라, 그것들은 안다고, 또는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과 그 부정 모두 쓰임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만, 이것이 JarOfDesire님이 뜻하신 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성자님이 말하신 것은 오히려 Clifford의 믿음 윤리에 더욱 관련되어 보입니다. Clifford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믿음을 검증하고 정당화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건 과하게 강한 주장이라 현대에 와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바는 아닙니다. 이런 논의들은 대부분 Belief Ethics에 관한 토론에서 이루어지며, 작성자님은 해당 분야에 대해 흥미를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과 '윤리적으로 올바른 믿음'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음일 것입니다..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수학 정리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는 '어떤 사실 A가 참이다.' 같은 단순 명제 형식이 아니라 'P가 참이라면 A가 참이다'와 같은 조건 명제로, P로부터 A가 연역적으로 유도되었을 때 입니다. 수학 정리에서는 P에 공리가 위치하겠죠.

일반적으로 믿음이 단순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평소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나는 1+1=2라고 믿는다'는 용법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현대 인식론을 잘 모르지만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평소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의식적인 성찰이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앎'과 '믿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글에서 말한 '받아들임'과 '믿음'의 주체는 '해당 명제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 의식'입니다.

어떤 특정한 명제가 연역적으로 증명된 당연한 결과라면, 그것을 믿고자 할 필요 없이 당연히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인지'만으로 참으로 생각되는 거죠. 하지만, 어떤 명제는 100% 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만약 부정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 배제했을 때, 그것은 앞서 설명한 명제와 같이 믿고자 할 필요 없이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믿고자 할 필요도 없이 참으로 증명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쓴 글이 Clifford의 믿음 윤리와 관련 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글은 Clifford의 논점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 논점은 믿음의 성립요건에 '부정 가능성에 대한 인지 여부'가 포함되는가? 입니다.

저는 '믿음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믿음은 '부정 가능성에 대한 인지'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무조건 참인 명제'가 아니라 단순히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명제'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정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믿음에 대한 검증을 제쳐두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 또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부정 가능성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물론 일상에서 사람은 참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부정 가능성을 인지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앎'과 '믿음'은 거의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식적 검토과정에서는 이 둘이 구분됩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이고, 2357님의 답글로 저도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혹시 제가 답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또 말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우선 앎과 믿음에 관해서 어떤 것이 앎이고 어떤 것이 믿음인지 구분이 있어야 할 듯 합니다. 오히려 저에게는 믿음이란 무조건적으로, 무근거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들에 속합니다. 언급하신 종교에서의 무조건적인 신봉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이쪽이 더 일상적인 용법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는 수학적 명제가 아니더라도 여러 면에서 가능합니다. '내일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와 같은 항진 명제들이 그러할 것이며,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와 같은 윤리적 명제들은 참/거짓의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수학적 명제들의 부정 불가능성이 수학적 공리에 기인한다면, 종교나 물리학에서의 교리, 공리들에 기인하여 나오는 연역적인 추론들 역시 부정 불가능한 명제가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수학정리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아닙니다. 말씀 하신 바와 같이 수학은 공리 위에 세워져 있어서 모든 수학정리는 공리가 부정되면 부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라고 예를드신 ’1+1=2’ 또한 ZFC공리 위에 있습니다.(물론 Peano산술에서도 증명가능합니다)
Jar님이 생각하시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란 ‘P가 참이라면 A가 참이다‘와 같은 조건명제로 ’A가 연역적으로 유도되었을 때’라고 말씀하셨는데 공리는 연역적으로 유도되지 않았으므로 Jar님이 생각하시는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아닙니다. 또한 공리가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아니라면 그 공리를 바탕으로 유도된(유도하는 규칙도한 합의를 바탕으로 한것이지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정리는 부정 가능상이 없는 명제가 아닙니다.

다시말해 공리는 ‘참이라고 가정’한 참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보이는 명제일뿐 그것은 ‘부정 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연역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부정할 수 앖다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며 부정할 수 없는 참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공리는 연역적으로 유도된 명제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조건 명제'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ZFC 공리계가 참일 때, 1+1=2이다"와 같은 것이죠. 저는 단순히, "ZFC 공리계가 참이다", "1+1=2가 참이다"가 부정 가능성 없는 명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Q가 P로부터 연역적으로 유도될 때 "P이면 Q이다." 같은 명제가 부정 가능성 없는 명제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Q이다"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공리나, 공리로부터 유도된 연역적 사실자체가 부정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공리가 참일 때 그 연역 사실도 참이라는 "관계" 자체가 부정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공리는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이는 명제"가 아니라 "유용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 그 분야에서 가정할 가장 기본적인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분명 본문에서 위와같이 언급 하셨습니다. 또한 수학정리가 부정 가능성이없다고 하셨는데 수학정리란 통상 수학증명에 따른 결론 즉 Jar님 글에서 P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 ‘A’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수학정리가 A라면 이는 부정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수정하셔서 수학정리가 ‘P이면 Q이다‘가 부정 가능성 없는 명제라고 하셨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수학증명‘이라고 불립니다.

수학증명조차 부정 불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아닙니다. 물론 거짓일 가능성이 극히 낮겠지만 수학증명에 사용하는 연역규칙 또한 ’연역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니까요. 또한 증명과정 가운데 인간의 오류가능성은 그것이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0은 아닙니다. 그 증명과정 가운데 오류가 전무하다는 것은 ‘연역적으로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무조건적, 무근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속한다고 하셨는데, xmfkrxkxntm님께서 생각하시는 용법 '신앙'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한 '믿음'은 좀더 일상적인 용법으로, '신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그냥 단어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 차이인 것 같고, 논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사람은 어떤 것이든 충분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믿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 또한 "신이 있을 것 같은 느낌", "교리(성경 등)의 합리성", "받았던 가르침" 같은 근거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겠죠. 그것의 타당성을 떠나서요. 믿음이 무근거적으로 자연 발생한다는 사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부정 가능성 없는 명제의 예시로 항진 명제를 제시한 것에 동의합니다. 좋은 예시입니다. 다만, 수학적 명제들의 부정 불가능성은 '공리'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논리적 관계에서 기인하죠. 앞서 pascal님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종교나 물리학의 공리들도 수학 공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부정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수학 공리는 믿음의 대상으로 취급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다만, 도출된 연역적 사실이 부정 불가능 것이 아니며, "공리가 참일 때 연역적 사실 또한 참이다"라는 것이 관계가 부정 불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또 말씀해주세요.

제가 글을 모호하게 썼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보통 1+1=2와 같은 수학 명제를 논할 때는 필연적으로 ZFC 공리계와 같은 배경 공리를 가정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제가 그 부분을 생략한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ZFC 공리계가 참일 때 1+1=2가 참이다."입니다.

연역규칙이 연역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연역규칙의 비연역성을 논한다면, "연역적"이라는 것은 뭐죠?

또 수학 증명에 오류가 전무하다는 것이 연역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실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수학 증명 자체의 무결성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 같습니다.

당연히 인간이 인지하는 모든 과정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정말 모든 것"에 일말의 부정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또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1) 믿음에 대한 입장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식론이나 언어철학을 전공하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몇 가지 의견이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일단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믿음을 '명제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명제 태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탠포드 철학백과에서는 크게 '표상주의', '성향주의', '해석주의', '기능주의', '제거주의', '도구주의', '허구주의', '규범주의'라는 입장들이 소개되어 있네요. (제가 이 주제를 깊게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성향주의와 규범주의 사이의 어딘가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elief/

(2) '안다'와 '믿는다'

약간 곁가지로 새는 논의이긴 하지만, 예전에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인상적인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의 인터뷰였는데, 진행자가 융에게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고 하니까 융이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대답하기 어렵군요. 나는 [신을] 압니다. 나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융이 사용한 '믿는다'와 '안다'의 구별이 작성자님이 염두에 두신 구별과 비슷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구별은 철학에서 표준적으로 통용되는 구별은 아니긴 하지만, (전통적인 인식론의 JTB 도식에서는 '알기' 위해서조차 '믿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믿는다'가 반드시 불확실한 상황에서만 성립하는 태도인지에 대해서 철학적 논쟁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부정가능성이 없는 명제

댓글에서 이루어진 논쟁에 한 가지 개인적인 의견을 첨언하자면, '부정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는 철학 내부에서는 커다란 의문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러한 명제가 존재한다고 손쉽게 가정하고서 그 위에 다른 논의를 진행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절대적 진리'나 '객관성'의 존재는 고대 그리스의 고르기아스나 프로타고라스 당시부터 의문시되었을 만큼 철학의 고전적 논쟁 주제니까요.

더욱이, 현대철학에서는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skeptical paradox)'이 수학적 공리로부터 유도된 정리조차도 회의의 가능성 앞에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기호가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상, 우리가 과연 "68+57"과 같은 계산으로부터 125를 도출해야 하는지 5를 도출해야 하는지는 엄격하게 말해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크립키의 지적이죠. "+"라는 기호를 '더하기(plus)'라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125가 도출되지만, '겹하기(quus)'라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5가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훨씬 심각한 것은,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반면 그 해석을 고정시켜 줄 어떠한 초사실도 존재하지 않다 보니, 우리가 과연 서로 상이한 해석들 중에서 정확히 어떤 해석을 따르고 있는지가 우리 자신에게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식의 회의주의는 일반화할 경우 결국 모든 종류의 연역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습니다. 물론, 회의적 역설에 대한 철학적 대응법들도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적어도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와 같은 강력한 회의주의 때문에, '부정가능성'이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공리로부터 단일하게 유도된 정리가 반드시 참일 수 있다는 생각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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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가능성이 논리적 관계에서 기인한다면, 그건 youn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의미 회의주의를 제시하는 입장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연역 논리의 정당성을 인정한다한들 그 안에서 수학적 명제만이 특별한 위치를 지닐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믿음의 자연발생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거없이 무언가를 믿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 없이 무언가를 '믿습니다'.

동의합니다. 근거 없이 무언가를 믿기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에 대한 의식적 검토 과정 근거의 타당성이나 합리성을 따질 수 있습니다. 저의 의견은 이 '정당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의미는 의식적 수준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정당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출처를 알 수 없이 내면에서 발생한 느낌'이나 '외적인 자극으로 생겨난 사실'이나 '이전에 믿는 사실로부터의 조합' 같은 근거를 마련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근거의 정당성을 떠나서요.

분석철학에서 technical term으로 사용되는 "믿음 belief"에 대한 것이라면, 믿음은 그 명제의 객관성이나 논리적 필연성과 무관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저 명제태도 중의 하나로서, 주체가 해당 명제와 맺는 일종의 관계같은 것입니다. 어떤 명제(혹은 사태)를 희망하거나 두려워할 수 있듯이, 똑같이 그 명제 혹은 그에 상응하는 사태를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명제가 질문자가 제안하듯 부정불가능한 것이라면, 그 주체는 부정불가능한 명제를 믿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따라서 해당 명제의 정당성이나, 주체의 성찰 정도에 대해 중립적입니다.

위의 논의로 미루어볼 때, 질문자께서 "믿음"이라는 용어에 대한 모종의 불만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은 "belief"가 (구어적 표현이나 특히 한국어에서는 구별이 잘 안되는) "faith"의 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철학적 용어로서의 belief는 그러한 어감과 무관합니다.

I believe that "오늘은 목요일이다"
I believe that "2+2=4"
I believe that "신은 존재한다"
[...]

모두 belief의 층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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