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모에 관한 몇몇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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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 1936~2023)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실 저는 바티모에 대해 깊이 아는 편은 아니고, 몇몇 저작을 조금 읽어본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제 학위논문의 주제가 되어주신 인연으로, 바티모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흥미로운 일화를 몇 가지 나눠보고자 합니다.

바티모는 생전에 Not being God1이라는 자서전을 한권 남겼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자서전’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피에르조르지오 파테를리니(Piergiorgio Paterlini)가 대신 집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바티모가 직접 1인칭으로 말하는 듯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책 서문에서도 이 책에 대해 일종의 ‘(자)전기(auto)biography’라고 쓰고 있네요. 바티모는 이 책에서 철학적 논의 못지않게, 자신이 고민했던 문제들과 삶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철학적으로도 논쟁적이었던 분이지만, 그 삶 자체도 구설수(?)에 자주 오르셨던 분이었던지라 거기에 대한 짧은 일화들도 재밌구요.

바티모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허무주의자, 게이, 공산주의자, 카톨릭(nihilist, gay, communist, catholic)”2 이 네 단어는 그의 철학적·인간적 면모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는 그의 철학적 핵심인 ‘약한 사유(pensiero debole)’와 직결되며, 나머지 세 가지 정체성은 그의 삶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얽혀 있던 주제입니다. 철학적인 부분은 잠시 내려두고, 게이, 공산주의자, 가톨릭이라는 일견 양립불가능해보이는 면모들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동성애자

바티모의 사상은 꽤나 도발적인 지점들이 있어서(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도) 종종 이탈리아에서 논쟁이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는 역시 그가 동성애자라는 점입니다. 30살 즈음에도 약혼할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적고 있긴 하지만, 청소년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게 커밍아웃된게 꽤나 골때리는 사건 때문인데요. 바티모는 가톨릭 강세인 이탈리아에서 굳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나 친밀한 스승인 루이지 파레이손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당시 바티모가 소속된 급진당이 1976년 선거에 참여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선거명부에는 최소 한 명의 동성애자 후보가 포함되어야 했는데요(이게 이탈리아 전체인지, 급진당만의 규칙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급진당 산하 단체 푸오리(Fuori)에서 선거 후보명단을 제출하면서, 동성애자 후보로 바티모를 제출해버린거죠. 물론 바티모는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고 다음날 교수회의에서 다른 사람이 보여준 신문을 통해 알았다고 하네요. 일종의 아웃팅을 너무 급작스럽게, 그리고 최악의 방법으로 당하셨던 것 같습니다. (73-75)

또 이 책에서 바티모가 자주 언급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의 연인들인데요. 여기서 함께 동거하며 살았던 인물들로 잔피에로(Gianpiero)와 세르지오(Serigio)가 있습니다. 먼저 잔피에로는 바티모보다 13살 어린 학생으로 바티모를 처음만났을때는 만 18세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때 바티모는 만 31살 정도로 토리노 대학에서 미학 교수로 임용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구요. 잔피에로는 헝가리어를 잘하고 헝가리 문학 전문 연구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둘은 60년대 후반에 만나 잔피에로가 죽을 때까지 24년간 함께 했다고 술회합니다. 법적으로 결혼관계는 아니었지만, 그정도에 준하는 동반자적 관계였다고 술회하고 있고, 이후에도 그를 매우 그리워했다고 하네요. (66)

또 다른 연인은 세르지오였습니다. 세르지오는 바티모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미술학도였는데, 세르지오는 당시 바티모가 학장이었던 시기에 학생이었기에 아마도 바티모의 수업을 듣지 않았을까 추론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세르지오는 바티모가 강제로 아웃팅된 이후 바티모를 찾아가서 당돌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나도 당신들과(바티모와 잔피에로) 함께 살고 싶다.” 고요. 바티모는 일종의 일부일처적인 신념으로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곧 이것을 68세대식 공동체적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였다고 회상합니다. 셋이 함께 살게 된거죠. 폴리아모리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일종의 그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당연히 잔피에로는 세르지오를 불편하게 여겼던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세 사람이 자연히 함께 지냈던 모양입니다. (79) 이후 세르지오는 2003년에 폐암으로 고통받다가 수술을 거부하고 안락사로 죽게 되는데요. 바티모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연인을 먼저 보내어 꽤나 상실감이 심했다고 회고하곤 했습니다. 매주 일요일마다 둘이 묻힌 공동묘지에 찾아갔다고 하네요.

2. 공산주의

바티모는 철학자로만 머물지 않고,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도 깊이 발을 담갔습니다. 60~70년대에는 특히 마오주의에 매혹되었는데, 그 당시 학생운동과 함께 울려 퍼지던 구호들이 순진하지만 강렬했다고 회상합니다. 물론 그는 단순히 거리에 나선 활동가라기보다는,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를 연결해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이론적 정당성을 고민하는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 시절부터 그는 분명히 자신을 좌파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고, 사회주의 아니면 미래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143)

그런데 좌파로 산다는 게 늘 환영받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1978년, 토리노에서 극좌 테러조직 붉은여단(Brigate Rosse)의 재판이 열리던 무렵, 당시 인문학부 학장이었던 바티모는 뜻밖의 협박을 받게 됩니다. 붉은여단은 좌파이지만 자신들의 노선에 동참하지 않는 지식인들을 암살 대상에 올려놓았는데, 바티모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다. 어느 날 교수회의 중, 비서가 들어와 “붉은여단에서 전화를 했는데 당신을 죽이겠다고 했다”고 전했고, 집으로도 협박 전화가 이어졌습니다. 연인 잔피에로 역시 두려움에 떨었고, 결국 경찰 경호를 받으며 지인 집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81-83) 바티모는 그 단체 중에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있다는 것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84) 아마도 모든 종류의 '강한 사유'가 어떻게 실제적인 폭력으로 연결되는지 직접 경험하고 비폭력적인 약한 사유를 구상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책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하는데, 지금은 못찾겠네요.

그럼에도 바티모는 현실 정치로부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1999년에는 결국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5년 동안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철학자이자 정치인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그가 단순히 이론만을 사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 생각을 사회적·정치적 실험으로 옮기려 했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의원 시절에도 성매매 합법화 옹호 발언 같은 문제로 논란이 있었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회주의적 가치들을 주장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약한 사유를 공산주의에 적용하여 약한 공산주의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바티모 사후에도 바티모의 제자인 산티아고 자발라가 이 이론을 이어받아 지금도 연구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3. 가톨릭

게다가 바티모는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정통’적인 신앙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본인은 나름 신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미사 보조를 맡기도 하고, 가톨릭 청소년 모임에 참여하며 거의 ‘작은 성인’처럼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평범한 이탈리아 소년들과 같이 성당에 나갔다고 합니다.(40-41) 그러나 동성애적 정체성과 공산주의 사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는 신앙을 점차 포기했습니다. 특히 독일 유학 시절, 이탈리아 가톨릭 문화와 멀어지면서 교회를 가지 않게되었다고 술회하죠. (27)

그런데 말년에 그는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옵니다. 여전히 동성애자였고, 여전히 공산주의자였지만, 이 서로 조화될 수 없어 보이는 정체성들을 ‘약한 사유’로 연결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절대적 교리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해석과 사랑의 실천을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 가톨릭을 새롭게 이해한 것이죠. 그가 회심한 뒤 저술한 책들을 보면 이 생각이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바티모가 보기에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교리를 약화시키고, 사랑이라는 해석의 기준을 따라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능한 하나님이면서도 자기를 비워(kenosis) 인간으로 온 것처럼, 하늘의 진리와 도덕, 형이상학적 권위 또한 스스로를 비워 약화된 해석으로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약화의 과정’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교 덕분에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신앙은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비판을 불러왔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종교를 꾸며낸 것”이라는 비난이 따라붙었죠. 하지만 바티모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판 자체가 바티모에겐 너무 ‘강한 주장’처럼 보였기 때문이었겠죠.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꾸며냈다고 비난한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내가 싫어하는 종교를 따라 살아야만 하는 건가? 사실이다. 나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주로 안정제처럼, 마음을 달래주는 무언가로서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된다는 건가?” (161) (chat gpt 번역)

4. 오늘날 바티모

제가 바티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종의 염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극단화되어가는 정치 지형이 굉장히 염려스러웠거든요. 어느순간부터 대화란 존재하지 않고 이쪽 아니면 저쪽,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만이 횡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믿는 바가 진리라고 믿기때문이라고 느껴집니다. 자신이 가진것이 진리이고, 이것을 따르는것이 선이라면, 여기에 반하는 모든 입장은 '멍청하거나', '악한' 사람들에 불과할테니까요. 여기서는 대화나 소통의 문제가 필요없게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수단 마저도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정당화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화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는 언제나 제 화두였습니다. 혹자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모두가 동의하는 명백한 진리를 바탕으로 대화에 나서면 된다고 믿는 것 같지만, 그런게 있다면, 혹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죠. 적어도 지금까지의 제 경험상 그런 모두가 동의하는 토대를 찾기란 굉장히 어려워보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대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서로가 자신의 진리를 비울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내가 가진게 진리가 아닐 수 있고, 하나의 해석 - '내 주관적 해석' -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말이나 행동, 판단하기 이전에 좀더 차분히 대화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바티모가 약한 사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바티모는 ‘약한 사유’를 통해 진리의 절대적 권위를 비워내고, 서로 다른 해석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야만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무제한적인 상대주의를 거부하면서 우리가 속해있는 역사와, 그리고 해석의 한계가 되어주는 사랑(caritas)를 바탕으로 하자는 얘기를 덧붙이죠.그런 점에서 바티모의 사유는 극단이 치닫는 이 시대에 꽤 깊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에 대한 집착이 서로를 배제하고 갈라놓는 시대에, 바티모는 오히려 진리를 약화시키는 것이 공존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거든요. 갈등이 이렇게 심해진 오늘날, 어떤 명령이 아니라 약한 사랑을 제안하면서 공존의 길을 모색한 바티모의 사유야 말로 한번쯤 되돌아볼만하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1. Gianni Vattimo and Piergiorgio Paterlini, Not being Go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9).

  2. Gay, Communist, and Catholic: Reflections on the Passing of Gianni Vattimo - Religion and Glob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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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 대해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후 바티모는 Simone Caminada라는 자신의 조교와 연애를 했는데요. 대충 50살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카미나다가 바티모의 재산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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