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그런 감정을 느끼신다니 거기에 대해서 제가 더 할 말은 없지만요. “자신에게 진심으로 너무 환멸이 들고” 있다고 하시기에 사목적 차원(?)에서 몇 가지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타등등 여러 위대한 것들의 편린을 엿본 후 그것들과 조금이라도 닮아보고자 발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어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되어감이 보이지 않는 것’과 ‘도달하지 못함’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는데,이를 혼동하는 듯 보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는 0%에서 1%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99%에서 100%로 가는 문제에 해당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되어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공부가 부족했던지, 실천이 부족했던지, 혹은 노력이 부족했던지 하는 이유일텐데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닐겁니다. 내가 유교의 군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부터 결심한다고 해서 곧 바로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점차 군자가 되어가는 출발점에 설 뿐이죠. 이 단계에서 여전히 소인배 같은 모습이 많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시작하는 단계에서의 미숙함은 당연하니까요.
(2)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그들과 같아 느끼는 것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곧바로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함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부처나, 유교의 군자,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의 상태를 어떤 이상적인 단계 – 완전함 – 로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불완전함이 환멸의 원인이신 거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여기에서 조금 더 고민해봐야할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완전함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앞서서는 간략한 예시를 위해 100%라는 표현을 썼지만, 100%라는 목적지가 정말로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고민해봐야 해요. 이른바 100%군자, 군자 그 자체 같은게 정말로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유학의 가르침인지 의심스럽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플라톤적으로 느껴져요. 저는 군자나 부처를 어떤 고정되어있는 도달점이라기 보다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해보여요. 특히 부처님에게 ‘부처의 이데아’같은 것을 기대하기에는 불교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 같아보이구요. 그러니까 문제는 선생님께서 곧바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함’에 대한 이상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전제했기에 발생하는 것 같아요. 불완전에서 오는 환멸은 불완전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잘못 세운 기준 때문에 생겨나는 착시인거죠. 완전함이 없다면, 당연히 불완전함도 없을테니까요.
(3) 그런 완전함이 없다면,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모두 폄훼되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어요.
이제는 그런 사람이 실존하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경지가 실존하는지에 대한 회의까지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경지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경지를 향한 노력을 멈춰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니체가 떠오르는데요. (전공도 아니고 지금 책도 없어서 자신은 없습니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bermensch)는 결코 지금 당장 눈앞에 “완결된 인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위버멘쉬는 고정되어있는 특정한 단계에 대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넘어가야 할 방향성과 과제를 말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위버멘쉬는 어디에 100%의 완성된 목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넘어가야 하고 새롭게 열려 있어야 하는 이상으로만 제시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위버멘쉬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위버멘쉬로 향하길 멈춘다면, 더 이상 위버멘쉬가 아니게 될거에요.
저는 부처나 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만약 군자가 스스로 군자에 달성했다고 여겨 군자가 되어가는 과정(=수양)을 멈춘다면 군자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 경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노력을 멈출 이유가 되지 못해보여요. 오히려 고정된 목표로 존재하지 않기에 오히려 우리를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요청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만, 보다 실제적이고 의미있게 부처나 군자라는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게 될거라고 생각해요. 비록 바로 공자급 군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더 군자가 되어간 나'는 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1) 출발점에서의 우리의 미숙함은 환멸의 대상이 되지 못할거에요. 오히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려 애쓰는 기특함으로 볼 수 있겠죠. 그리고 (2) 특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함이 우리의 흠이나 불완전함으로 보이지도 않을거에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포기이고 합리화이며 가장 추악한 것
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어지겠죠. 그 대신 (3)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더 나아지기 위해 분투하는 멋진 나를 발견하게 될거라고 생각해요. 이상적이지 않은 나의 모습을 환멸이나 비난 대신 연민으로 감싸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나를 위해 기특한 시선을 보내주는 것이 불안한 실존을 견뎌낼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해요.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에 불안함을 느끼신다면,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당신을 향해..... 농담입니다. 고생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