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이지 않은 자신에게 진심으로 너무 환멸이 들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반응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철학을 배우며 여러 인간상과 찬란한 것들을 보아 왔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통찰하여 집착을 초월하며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가진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과 부처를 보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성의 강인함으로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아파테이아의 철인을 보았습니다.

유교에서는 스스로의 인의를 지키며 세상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수양의 정점

인의 군자를 보았습니다.

기타등등 여러 위대한 것들의 편린을 엿본 후

그것들과 조금이라도 닮아보고자 발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어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런 사람이 실존하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경지가 실존하는지에 대한 회의까지 들고 있습니다.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를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고
우월감을 느끼고
허세를 느끼고
하찮은 것들을 느끼는 자신에게 있어서

환멸이 들고 있습니다.

겉보기에 그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그들과 같아 느끼는 것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미약함과 하찮음에 연민이 들다가도
부모가 아이에게 답답함에 화를 내듯

스스로에게 비판인지 비난인지도 모를 상스러운 말을 쏟아내는 자신을 보자면

다시 한번 그 환멸이 찾아오곤 합니다.

불완전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을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제게 그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포기이고 합리화이며 가장 추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흔들림 없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흔들리는 자신을 경멸하고
그런 자신을 다시 한번 보고
회의와 환멸 속에서 돌고 도는 느낌입니다.

완전하지 않음에서 오는 고통과
완전하지 않음을 경멸함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환멸입니다.

3개의 좋아요

본인이 그런 감정을 느끼신다니 거기에 대해서 제가 더 할 말은 없지만요. “자신에게 진심으로 너무 환멸이 들고” 있다고 하시기에 사목적 차원(?)에서 몇 가지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타등등 여러 위대한 것들의 편린을 엿본 후 그것들과 조금이라도 닮아보고자 발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어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되어감이 보이지 않는 것’과 ‘도달하지 못함’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는데,이를 혼동하는 듯 보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는 0%에서 1%로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99%에서 100%로 가는 문제에 해당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되어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공부가 부족했던지, 실천이 부족했던지, 혹은 노력이 부족했던지 하는 이유일텐데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닐겁니다. 내가 유교의 군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부터 결심한다고 해서 곧 바로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점차 군자가 되어가는 출발점에 설 뿐이죠. 이 단계에서 여전히 소인배 같은 모습이 많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시작하는 단계에서의 미숙함은 당연하니까요.

(2)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그들과 같아 느끼는 것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곧바로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함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부처나, 유교의 군자,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의 상태를 어떤 이상적인 단계 – 완전함 – 로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불완전함이 환멸의 원인이신 거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여기에서 조금 더 고민해봐야할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완전함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앞서서는 간략한 예시를 위해 100%라는 표현을 썼지만, 100%라는 목적지가 정말로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고민해봐야 해요. 이른바 100%군자, 군자 그 자체 같은게 정말로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유학의 가르침인지 의심스럽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플라톤적으로 느껴져요. 저는 군자나 부처를 어떤 고정되어있는 도달점이라기 보다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해보여요. 특히 부처님에게 ‘부처의 이데아’같은 것을 기대하기에는 불교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 같아보이구요. 그러니까 문제는 선생님께서 곧바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함’에 대한 이상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전제했기에 발생하는 것 같아요. 불완전에서 오는 환멸은 불완전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잘못 세운 기준 때문에 생겨나는 착시인거죠. 완전함이 없다면, 당연히 불완전함도 없을테니까요.

(3) 그런 완전함이 없다면,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모두 폄훼되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어요.

이제는 그런 사람이 실존하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경지가 실존하는지에 대한 회의까지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경지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경지를 향한 노력을 멈춰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니체가 떠오르는데요. (전공도 아니고 지금 책도 없어서 자신은 없습니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bermensch)는 결코 지금 당장 눈앞에 “완결된 인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위버멘쉬는 고정되어있는 특정한 단계에 대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넘어가야 할 방향성과 과제를 말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위버멘쉬는 어디에 100%의 완성된 목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넘어가야 하고 새롭게 열려 있어야 하는 이상으로만 제시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위버멘쉬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위버멘쉬로 향하길 멈춘다면, 더 이상 위버멘쉬가 아니게 될거에요.

저는 부처나 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만약 군자가 스스로 군자에 달성했다고 여겨 군자가 되어가는 과정(=수양)을 멈춘다면 군자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 경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노력을 멈출 이유가 되지 못해보여요. 오히려 고정된 목표로 존재하지 않기에 오히려 우리를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요청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만, 보다 실제적이고 의미있게 부처나 군자라는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게 될거라고 생각해요. 비록 바로 공자급 군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더 군자가 되어간 나'는 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1) 출발점에서의 우리의 미숙함은 환멸의 대상이 되지 못할거에요. 오히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려 애쓰는 기특함으로 볼 수 있겠죠. 그리고 (2) 특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함이 우리의 흠이나 불완전함으로 보이지도 않을거에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포기이고 합리화이며 가장 추악한 것

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어지겠죠. 그 대신 (3)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더 나아지기 위해 분투하는 멋진 나를 발견하게 될거라고 생각해요. 이상적이지 않은 나의 모습을 환멸이나 비난 대신 연민으로 감싸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나를 위해 기특한 시선을 보내주는 것이 불안한 실존을 견뎌낼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해요.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에 불안함을 느끼신다면,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당신을 향해..... 농담입니다. 고생하십쇼.

8개의 좋아요

솔직히, 저는 철학이 실존적 불안이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고민하시는 문제에 대해 두 권의 책을 추천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1)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읽으면서 무척 감동을 받았던 책입니다. 틸리히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 중 한 명입니다. (아도르노의 교수 자격 논문을 지도한 인물이기도 했고, 폴 리쾨르의 전임자로 시카고 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근무하기도 했죠.) 이 책에서 틸리히는 '받아들여짐을 받아들이는 용기'(the courage to accept acceptance,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기술합니다. 그는 인간이 실존적 문제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운명과 죽음', '공허함과 무의미함', '죄책감과 정죄' 같은 '비존재' 혹은 '무'의 위협이 인간을 매 순간 엄습하더라도, 그 위협 앞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긍정할 수 있는 '힘' 혹은 '용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힘과 용기의 표현이 '신앙'의 상징들 속에서 확인된다고 지적합니다.

https://blog.naver.com/1019milk/80199590685

(2)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해석의 갈등』은 뛰어난 철학적 해석학 이론서이기도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책 속에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이고 구원이 어떠한 사건에 대한 리쾨르 자신의 실존주의적이고 일종의 신학적이기도 한 입장이 담겨 있습니다. 리쾨르도 틸리히처럼 종교적 상징에 나타난 진리에 주목하는 철학자입니다. 특별히, 그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이야기를 포함한) 고대 근동 신화에서 '흠', '죄', '허물'의 상징들이 인간의 의지에 내재된 내적 갈등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분석하고, 그런 의지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이 '받아들여졌다'고 혹은 '용납되었다고' 경험하는 사건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서 나타나 있다고 해명합니다. 리쾨르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욱 넘치도록 사랑하신다.”라는 기독교 신앙의 고백이야말로 실존적 한계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자각과 더불어, 그 한계를 인정하고 넘어서는 '존재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죠.

https://blog.naver.com/1019milk/223011063842

  • 그리스도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시고 계십... 아앗!
7개의 좋아요

제가 철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아 이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키에르케고르 같으시네요.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다음에 책방 갈 때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3개의 좋아요

군자나 보살이 과정적인 것에 본질을 두고 있고 그 둘의 칭송되어 마땅한 점이 그러한 과정적이고 내적인 것이라면 많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특정 수준 이상의 완성됨이라는 것이 아닌 그것을 향한 향상심과 동기, 노력 자체에 비로소 "군자다움, 부처다움"이 있는 거니까요.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