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즈에 전해진 칸트의 유산

요약한 텍스트: 황경식 (1995). 롤즈에 전해진 칸트의 유산. 철학연구, 423-447
강조표시는 제가 했습니당

롤즈는 윤리학 방법론에 대한 당대의 관심이 직관주의와 공리주의에만 집중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칸트의 윤리설을 하나의 유력한 대안으로 소개하면서 두 가지 점이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칸트의 정언명법이 순전히 형식적 원리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지윅에 있어서와 같이 어떤 사람에게 옳은 것은 그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유사한 모든 사람에게도 옳다는 식의 공정의 원리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황금률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정언명법이 황금률과 다르다는 것은 상식적인 해석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칸트 해석의 천박성은 철학의 통념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황금률이 아닌것같기도 하다.) 둘째, 롤즈에 의하면 우리는 가능한 한 칸트의 도덕론의 구조를, 그 형이상학적 배경의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중지를 한채로, 실재론적이고 경험론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우선 롤즈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하나의 절차로 해석함으로써 정언명법적 절차(Categorical Imperative Procedure)로 부르고자 하며, 그것이 다음의 네 단계로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첫번째 단계는 행위자의 자연적 욕구나 경향성의 관점에서 볼 떄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준칙을 선정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정언명법적 절차는 합리적 행위자가 그 자신의 이해 관계와 인간사의 현실적 조건 안에서 가지게 된 준칙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준칙은 다음과 같은 가언명법의 형태를 띌 것이다. '첫번째, 나는 사태 y를 가져오기 위해 상황 c에서 행위 x를 해야한다.' 다음은 이 준칙을 보편화시킨 두번쨰 단계이다. '두번째, 모든 사람은 상황 c에서 행위x를 행해야 한다.' 세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두번째 단계를 하나의 자연법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에 이르게 된다. '세번째, 모든 사람은 상황c에서 언제나 행위 x를 행해야 한다. (마치 자연법에 의거한 것처럼)' 정언명법적 절차의 네 번째 단계는 가장 복잡한 단계로서 세 번째 단계에서 생각해낸 하나의 자연법을 이미 알려진 기존 자연법 속에 도입함으로써 만들어진 전체 자연법 체계가 효력을 발휘하는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추정해 보는 단계이다. 즉 하나의 준칙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서는 각 준칙 당 하나의 사회 체제를 상상해봐야 하는 셈이다.

이상과 같은 롤즈의 해석법에 따르면 칸트의 정언 명법은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우리가 우리의 합리적이고 신중한 준칙(제1단계)으로부터 행위할 수 있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조건은 첫째, 우리가 그러한 준칙에 상응하는 체제에서 그러한 행위를 수행할 것을 의욕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리고 둘째, 우리가 그러한 사회 체제 자체에서 존재하기를 욕구하는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회 형태안에서 존재하기를 합리적으로 욕구할 수 없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 행위를 의욕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이 비록 현재 우리의 여건(기존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진지한 준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첫쨰 조건은 개념 상의 모순(contradiction in concept) 여부를, 둘쨰 조건은 의지 상의 모순(contradiction in will)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개념 상의 모순은 예를 들어 허위 약속이라는 준칙을 배척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합리적 행위자는 그들이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 합당한 근거가 있는 행위만을 의욕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의지 상의 모순은 제안된 준칙과 합리적 존재의 본성 간에 모순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다. 합리적 존재가 제안된 준칙에 상응하는 사회에서 그에 따라 행위할 의향을 가질 수 있더라도 (개념 상의 모순), 그러한 사회 자체를 의욕할 수 없을 경우 그러한 준칙은 배척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나 실천적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합리적 개인은 그러한 준칙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합리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의 본성상 기본적 욕구(basic need)를 지닌 존재이고, 자기가 자족적 존재가 아니며 타인의 도움없이는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위의 사례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해명하거나 보다 일반적으로 전개한 적이 없으나, 롤즈는 인간의 진정한 필요나 기본 욕구에 대한 적절한 개념에 기초해서 정언명법적 절차를 진행해 갈 것을 요구하는 의지상의 모순 기준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즉 타인에 대해서 무관심하라는 준칙에 기초한 사회가, 기본적 욕구에 따라 타인을 도우라는 준칙에 기초한 사회보다 욕구할 만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롤즈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인간의 기본 욕구에 대한 견해를 칸트의 저술에서 찾기 어려운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단지 정언명법적 절차에서 최종단계의 추론이 제1단계의 행위자 중심의 타산적 추론에 특정한 제약을 가하게 된다는 점과 인간의 기본 욕구에 대한 입장이 전제될 경우 그에 의거해서 특정 준칙에 기초한 갖가지 사회 형태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임을 지적한다. 1)

이어서 롤즈는 이상과 같은 절차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점을 지적하는데 이는 칸트와 롤즈 자신의 정의론을 대비함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첫쨰, 정언명법적 절차의 제1단계에 있어서 제시되는 행위자의 준칙은 인간 삶의 정상적 과정에서 생겨나며, 진지하고 합리적인 개인에 의해 견지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그 절차가 현실적으로 생겨나는 준칙에만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절차를 검증하려는 목적으로 자의적으로 고안된 준칙을 배제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둘쨰, 준칙에 의거해서 그에 대응하는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 우리는 자연법과 정상적인 인간 능력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에 의거한다는 점인데, 다시 말하면 보편적 지침의 검증을 위해서는 일반적인 경험적 지식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셋째, 정언명법적 절차의 마지막 단계의 추론은 정보에 대한 어떤 제한이 요구됨을 가정하고 있으며, 인간의 기본적이지 않은 욕구,가치관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지식의 제한은 모든 사람이 정언명법적 절차에 의거할 경우 유사한 결론에 이를 것을 보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 셋째의 조건 없이는 그 절차가 모든 이들의 합치되는 결론을 가져오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롤즈는 위에 나온 둘쨰와 셋째를 통합하여 '무지의 베일'이라는 조건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2)

또한 롤즈는 실천적 추론체계로서 정언명법적 절차의 구조적 특징을 다음 세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행위자의 자연적 경향성을 충족시키는 타산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볼때 합리적 결정을 내리라는 요구가 두 곳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그 하나는 첫 번째 단계의 준칙에 이르는 행위자의 숙고 과정에서이다. 즉 행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한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수단을 택해야 한다. 또 하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네 번쨰 단계의 의지 상의 모순 기준에서, 즉 지식의 제약에 의해 규정된 보편적 관점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어떤 준칙에 의거한 사회를 욕구하는지(=어떤 사회가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더 충족시키는지)를 검증할 경우에 나타난다. 두번째 구조적 특징은 순수 실천 이성이 경험적 실천 이성에 시종일관 우선한다는 점이다. 주어진 자연적 욕구나 경향성을 충족하기 위한 타산적 합리성은 순수 실천 이성에 따라 구성된 절차의 특정 단계에서만 허용되며, 타산적 합리성이 요구되는 정언명법의 절차에서도 타산적 계산은 순수 실천 이성이 명하는 제약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3) 가령 네 번째 단계에서 준칙에 상응하는 사회를 상상할때 인간의 기본적이지 않은 욕구, 인간과 사회의 우연적인 특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존에 존재하는 자연법, 합리적 인간의 기본 욕구와 정상적인 인간 능력은 알 수 있다. 순수 실천 이성이 구성한 절차 자체는 자연적 경향성이나 욕구 충족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절차를 거친 것만을 추구하도록 제약하는 것이다.

롤즈에 의하면 칸트의 목적의 왕국의 성원들은 이성적 존재로서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며, 목적 왕국이라는 관념 아래 그 원칙을 준수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규제하게 된다.


  1. 이 문단 위까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칸트의 정언명법 해석을 롤즈가 그저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뿐이고, 이 문단부터 정언명법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본다. 칸트의 의지 상의 모순 기준에서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모순되는 준칙이 무엇인지 판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롤즈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준칙이 무엇인지를 판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모순되지는 않지만 다른 행동의 규칙보다 특정 욕구를 더 충족시키는 준칙이 있을 수 있으므로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계효용체감이 없다고 생각했을때, 밥을 한공기 먹는다/밥을 두공기 먹는다)

  2. (내가 이해하기로는) 칸트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규칙이 무엇인지 구성하는 것이고, 롤즈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롤즈에 따르면 정의의 여건(인간들의 제한된 상상력과 이타심, 자원의 적절한 부족함)은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협동의 원칙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필연적이지 않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부 경험적 지식은 도덕규칙을 구성하는데 사용될 수 없지만 롤즈에게는 가능하다.

  3. 즉 황경식의 말은 롤즈가 재해석한 칸트 정언명법의 절차를 진행하는 현실세계의 인간이나 혹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해관심을 고려할 필요가 없고 오직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해관심을 충족시킬것이라고 기대되는 원칙을 선택하면 되지만, 이때 이 합리성은 도덕원칙(롤즈의 경우는 공정한 협동의 원칙)을 구성한다는 동기 아래 이성적으로 구성된 절차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이다.

  • 원초적 입장의 목적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개인들 간에 공정한 협동의 원칙을 세워보자는 것이므로, 당사자들의 합리성(욕구를 충족하는데 적절한 수단을 선택하려한다는 의미에서) 을 전제하지 않고서 협동의 원칙을 세운다는 것은 원칙을 세우는 목적 자체와 모순된다.

    또한 롤즈의 이론에서 '원초적 입장 당사자들의 심리적 성향'과 '현실세계 인간들의 심리적 성향'은 구분되므로, 원초적 입장 당사자들의 심리적 성향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현실세계 인간들에게 상호무관심적인 합리성을 요구하는 개인주의 이론이라 비판할 수는 없다. (이민열 (2021). 존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조건과 헌법해석의 지침. 법철학연구, 222-244에서는 원초적입장 당사자들이 상호무관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결국 같은 원칙을 도출하면서 이론에 불필요한 가정만 복잡하게 늘리는 것이거나(서로에게 대칭적으로 이타적일 경우), 아니면 이타적인 자연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설정하는 원칙을 도출하게 된다(서로에게 비대칭적으로 이타적일 경우)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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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을 번역하신 황경식 교수님의 박사학위논문과 기타논문을 묶은 <사회정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책에 들어있는 논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고나니깐 이제 <정의론>이나 롤즈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의 글을 다시 읽으면 예전보다 훨씬 이해가 잘 될 것 같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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