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의 영향력?

안녕하세요, 철학을 독학하는 철린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 정치학을 잘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르가논을 기초로 영혼론도 읽을 예정입니다. 그러다 문득 스쳐지나갔던 내용이 떠올랐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을 연구하면서 목적론 개념이 서양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드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적론이 서양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기억이 잘못된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윤리학과 정치학을 읽으려고 할 때 동물학이 큰 도움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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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두드러지는 목적론적 사유가 서양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해 자체가 틀린 것처럼 보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큰 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목적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거나, 또는 목적론적 사유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든가 하는 관점은 이후의 텍스트 독해에서도 유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정치학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영혼론을 읽을 예정이라고 말씀해주셨네요. 또 그걸 위해서 동물발생론을 읽는 게 좋은지 여쭤보셨고요. 제가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가 아니라서 도움이 된다, 안 된다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형이상학을 읽는 게 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요.

<형이상학> 자체도 쉽지 않은 책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형이상학>을 읽는 게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다른 저술에서도 사용되는 "실체", "형상", "원인", "현실태", "가능태", "본질", "질료", "목적" 등 핵심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어느 정도 미리 익혀두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되거든요. 단순히 영혼론 뿐만 아니라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저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물론 동물발생론도 도움이 안 되진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동물발생론을 직접 읽어보지 않기도 했고, 오히려 형이상학을 읽으면서 영혼론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을 얻은 입장에서, 차라리 핵심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 <형이상학>을 읽는 게 좀 더 나을 것 같이 보입니다.

물론 "<형이상학> 읽으세요!"하고 냉큼 사라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개인적으로 <형이상학>읽을 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던 책 두 권 정도만 추천 드릴게요.

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서울: 문예출판사, 2004.

에드워드 핼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입문> 경기 파주: 서광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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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궤변론을 제외한 오르가논들도 필독서일까요? 형이상학이 백과사전이라면 오르가논은 입문서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개정판이 있는 거 같은데 출판사가 달라서 고민이네요.

링크: Lecture Course on Aristotle's Metaphysics : Richard Dien Winfield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

이런 것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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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논이라고 한다면 보통 범주론, 명제에 관하여, 분석론 등등으로 알고 있어요. 논리학에 연관된 주제들이
다루어지는 걸로도 알고 있는데요,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윤리학 저술들에 당장 중요한지는 판단이 잘 안 서네요. 읽으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우선순위에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fearful: 이건 제가 오르가논을 다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거니 너무 신경쓰진 마세요.

중요한 건 필독서이든 아니든 간에, 독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좋을 것 같긴합니다. 제일 읽고 싶고 관심가는
책이 무엇인지, 그 책을 보충하기 위해 읽으려고 생각해둔 책이 무엇인지 정리해보시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제일 읽고 싶은 윤리학 저술들 먼저 읽으시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셔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ㅎㅎㅎ

앞서 얘기했던 “형이상학부터 시작하면 좋다”는 얘기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적인 철학적 입장이나 자주 사용되는 개념의 용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을 읽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얘기지, ”형이상학부터 읽어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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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도대체 이런 좋은 자료들을 어떻게 찾으시는건가요?!:face_with_open_eyes_and_hand_over_mouth::face_with_open_eyes_and_hand_over_m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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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핳... 그럼 앞서 말씀해주셨던 핼퍼 자료도 놓고 갑니다: Internet Archive: Digital Library of Free & Borrowable Texts, Movies, Music & Wayback Machine 두 개는 강의 녹취록이고 하나는 발표 녹취록이네요.

+) 지금 보니 Analogy & Science 주제를 보니 Metaphysics , Nicomachean Ethics , Physics , Parts of Animals , Meteorology 를 다루네요. 이 포스팅한테도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라부스도 같이 올립니다:
6010 (1).pdf (67.2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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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테네스가 도입한 목적론에서 해방되는 것이 서양철학의 흐름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도 목적에서 해방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자연과학은 여기에서 벗어 났지만 윤리학, 종교는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지요.

아리스토테네스는 평생 목적론을 찾는 일에 매진했고 논리학 동물학에서 결국 목적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털레스 사상이 인류역사 2000년을 견인했지만 목적인은 역사발전을 퇴보시겼다고 저는 봅니다.

음... 어떤 이유로 서양철학의 흐름을 그렇게 독해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전거를 제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철학사에서 목적론에 대한 비판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는 주장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에티카> 1권 부록에 제시된 스피노자의 비판이라든지, 아니면 인간의 고정된 본질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르트르 같은 경우 같이 말이에요.

하지만 "서양철학의 흐름이 목적론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서술하게 된다면, 제 짧은 지식에서 보았을 때 몇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는 이 문장 자체가 목적론적 사유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러한 문장은 결국, "서양철학의 흐름은 목적론에서 해방된다는 목적을 지니고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과정이다"라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약 이 문장이 참이라고 한다면, 그 고찰 방식의 정당성이 설명되어야 해요. "실제로 역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 누군가는 정확하게 동일한 역사를 갖고 "철학사는 목적론을 둘러싼 부침의 과정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철학사가 정말 실제로 그러한 과정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의문스러워요.

"목적인이 역사발전을 퇴보시켰다"는 말씀도, 사실은 목적론적 사유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현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목적이 있고, 역사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되는 과정이다"라는 목적론적 사유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에요. 즉, 목적론적 사유에 따라서 보편적 목적을 상정하고, 그러한 목적에 얼마나 접근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역사의 발전"이나 "퇴보" 또는 "진보"라는 용어에 접근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목적인"이 어떻게 역사발전을 퇴보시켰는지 제시되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역사발전이 어떻게 퇴보되었나요? 더 나아가서 그 퇴보를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히려 반대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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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너무 심하게 표현했나요?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테네스를 공부하면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등의 변태를 배웁니다. 왜 애벌레가 나방이 되느냐를 설명해야하는데 이는 애벌레 속에 나방이 될 목적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 목적인은 중세에는 신의 소명이 되었고요. 지금도 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자, 철학자들이 있지요. 세상은 목적이 아니라 물질 자체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라는 사람들이 나타났지요. 천동설을 주장하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면서 신의 목적론이 아니라 만유인력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이 때부터 목적인이라는 변태는 스스히 사라졌습니다.

철학의 수많은 논의들이 있지만 큰 흐름에서 보면 목적인 퇴출이 가장 핵심적인 진보가 맞습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철학의 선택은 자신의 성향에 따르니 강요하고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나에게 증거를 강요하지도 마시고요.

무생물에서 목적을 퇴출했더라도 생명체가 있고 의식을 지닌 인간에게는 목적이 아직도 중요합니다. 생명체의 목적은 중세의 신이 내려 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세운 목적입니다. 이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발전합니다.

철학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등이 있지만 외부에서 부여된 목적이 있다면 철학의 양상은 완전히 다르게 흘려갑니다. 목적인이 사라진 근대 이후 근대 민주주의가 나타났다라고 목적론의 존재에 저는 가치를 둡니다.

제시해주신 내용이 정말 목적론적 사유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인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본질-형상-목적인이 서로에 대해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물질 자체의 본질적인 힘에 의해 움직인다"라는 것도 물체에 내재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목적론적 사유와 양립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선생님의 주장은, 목적론적 사유에서 "초월적 존재에 의해 주어진 목적" 개념이 핵심적이라는 것이지만,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그런 개념들이 점차 퇴출되었다는 주장으로 읽히네요. 목적인 개념은 중요성을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목적 개념은 중요하다는 주장을 제시하시는 것 같은데, 이것은 모순적이지 않나요? 한 개념이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하지 않고 퇴출되었다 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요?

제가 궁금한 건, 철학사를 그렇게 독해할만한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철학사에서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셨지요.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제가 받아들일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최소한,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개념에 대한 수용사를 어느 정도는 제시해주셔야 합니다. 중세철학에서 왜 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신의 소명으로서 이해된 목적인이 이후의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개략적으로나마 서술을 해주셔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그러하다"라고 하시면 생산적인 철학적 토론을 이끌어가는 데 상당한 난점이 뒤따릅니다.

단순히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근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 이러저러한 근거를 요구하지 말아라"라는 것은, 그 주장을 받아들일 여지와 같이 탐구를 진행해 나갈 여지를 차단합니다. 주장에 대해 근거를 요구하는 건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영화를 감상하고 나서 감상평에 대해 얘기할 때, 상대방의 해석에서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그 이유를 물어보진 않나요? 마찬가지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요구하는 것은 일상적인 대화 뿐만 아니라 철학적 토론에서도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관심 있는 철학의 선택이 개인적 성향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근거 제시를 통한 주장의 정당화는 성향과 무관하게 요구되는 학문적 기본 소양입니다. 적절한 근거가 제시된다면 저도 선생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고, 아니면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토론을 이어나갈 수도 있겠죠. 이런 점에서 제가 증거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께서 입증의 책임을 지니시는 겁니다. 다른 학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아닌게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지금 "철학 토론의 표준화"를 지향하는 공간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공간에서는 당연히 철학계 내에서 받아들여지는 규칙들이 분명히 있고요. 그 규칙들 중에서는 주장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이런 거에요. 제가 과학계에서, 제 직관에 의거한 주장을 이리저리 제시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들은 안 그럴 수 있다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내 주장에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지 말아라"라고 한다면, 이건 좀 아쉬운 일이 아닐까요? 공동의 탐구와 생산적 토론의 기회가 사라지게 되니까요.

저는 선생님께서 이 커뮤니티를 통해 즐거운 철학 공부를 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공간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는 최소한의 규칙이나 책임이 요구됩니다. 학술적인 공간이기도 한 만큼 근거 제시를 통한 정당화는 당연한 책임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 근거의 내용이 어떤지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주장의 제기-근거를 통한 정당화하는 형식적 측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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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하셨군요.

세상에는 무생물, 미생물, 인간 등이 있습니다. 무생물의 거동은 자연법칙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것이 인류가 수많은 역사속에서 얻어낸 결실이지요. 그런데 이전에는 무생물의 거동도 목적인의 영향으로 해석했지요. 해도 달도 부동의 원동자가 돌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생물의 변태도 목적인에 의해 변화된다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목적인이 아니라 몸속에 든 dna가 역할을 하지요.

인간도 DNA가 올챙이 정자에서 인간의 모습을 만듭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한 의간의 의지입니다.

목적은 의지의 발로인데 만유인력, dna는 의지와 상관없으니 무생물 미생물에 적용된 목적인은 잘못된 인식이었지요. 이 인식의 주창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니 2000년동안 정확한 철학을 방해 했다고 저는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이 없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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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목적인을 "사물 바깥에 존재해서, 그 사물로 하게끔 운동하도록 만드는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을 하시는 군요. 그걸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까닭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방해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셨네요.

근데, 제 말씀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제시한 서술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나 목적론적 사유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혼자 갖고 계신 "목적인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투사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목적인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은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5권(Δ), 1013a24-1013b

(...) 목적, 즉 지향 대상이라는 뜻의 원인이 있는데,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무엇 때문에 산책을 할까? 이에 대해 우리는 '건강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며,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원인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어떤 것이 운동을 일으킨 다음 그 목적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오는 것들도 원인이라고 불리는데, 예컨대 건강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오는 체중감량, 배설, 약초, 도구가 그렇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은 사물의 인과 관계 중 하나로 이해됩니다. 먼저 우리는 특정한 행위를 하고자 할 때, 그 이유로서 목적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가 그 행위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결과이며 따라서 그 행위는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원인이겠죠. 여기서 목적이나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 원인, 그 중에서도 목적으로서 원인(목적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인이 "사물 바깥에 존재해서, 그 사물로 하게끔 운동하도록 만드는 초월적 존재"이느냐, 라고 한다면 꼭 그렇진 않습니다. 한 사물로 하여금 특정한 형상을 지니게끔 만드는 원인으로서 목적인이나, 그러한 운동을 유발하는 원인으로서 목적인은 사물 바깥에 놓인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 자체에 내재적인 형상과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9권(Θ), 1050a5-28, 1050b4-6

하지만 실체에서도 그렇다. 첫째로, (a) 생성에서 뒤서는 것은 형상과 실체에서 앞선다는 이유에서 그렇고(예를 들면 어른이 아이보다 앞서고 사람이 씨보다 앞서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생겨나는 것은 모두 원리이자 목적으로 향해 나아간다는 이유에서도 그런데(왜냐하면 지향 대상은 원리이며, 생성은 목적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현실태는 목적이요 이것을 위해서 가능태가 획득된다. 왜냐하면 동물들이 보는 것은 시각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들은 보기 위해서 시각을 갖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집짓는 기술은 집을 짓기 위해서 있으며 이론적 지식은 이론적 고찰활동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이론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 이론적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분명히 실체와 형상은 현실태이다. 이런 근거에서 분명 현실태가 실체의 측면에서 가능태에 앞서며, 앞서 말했듯이 현실태가 있으면 항상 다른 현실태가 그것에 시간적으로 앞서고, 이는 영원한 첫째 원동자의 현실적 활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어느 경우에서든 현실적인 것이 잠재적인 것보다 우선하고 있다는 논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재적인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잠재적인 것, 가령 능력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은 그것의 실현을 목적으로 두고 있겠죠. 가령 우리가 지나치곤 하는 공사판, 건축되는 건물은 완공된 건물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경우에서도, 건물의 건축은 특정한 형상으로 완공된 건물을 논리적으로도, 형이상학적으로도 전제하고 있겠네요. 그러나 이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목적이나 목적인은 논의되고 있는 사물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대상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의 내재적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DNA라든지, 미생물의 변태라든지 하는 것들도 충분히 목적론적 사유로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생물체든지, 그 생물체 안에 내재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문제는, 선생님께서 "목적"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설령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과 "의지"를 연결시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랬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각 생물체나 이를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방식으로 "목적"과 "의지"를 서로에 대해 연결시키고 있는지 면밀하게 논의되어야 해요.

이러한 주장은 설명 부담을 많이 지닙니다. <형이상학>과 <영혼에 대하여> 원 저자의 생각이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원 저자의 책을 직접 찾아보고 논증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원 저자가 하지 않은 것을 갖고, 또 그 시대에 가능하지 않았던 조건들과 사실들을 갖고 원 저자의 공과를 평가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주장을 했으니, 내가 갖고 있는 인상만으로 이 정도 비판을 해도 되겠다"라고 한다면 그건 정당하지 못합니다. 막말로, 중간에 원자재나 원자재 대금 빼돌리고, 품질 깎아먹은 사람을 비판해야지, 성실하게 원자재 제공한 사람에게 그 비판을 덮어 씌우는 게 맞는 일일까요?

표현에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제시하신 주장들은 너무 큰 설명 부담을 지니고 있어요. 이런 지적들이 정말 귀찮으시겠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나 "정확한 철학을 방해했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표현은 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인식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명확하게 주어져 있다는 관점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방해했다"는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진행을 왜곡했다고 읽힐 수 있는데, 그러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확한 철학"을 방해했지만, 우리는 그가 정확한 철학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철학"을 갖고 있다면, 도대체 그 "정확한 철학"은 무엇이고 그 "정확함"을 판단할 척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에 의해 정당화 되는가?"

라는 물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누군가를 면박주려고도, 으스대려고도, 가르치려 드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 자신부터 앎이 짧으니까요. 다만, 철학적 토론 공간에서 무언갈 하시려면, 최소한 그 공간에서 요구되는 규칙을 지키셨으면 해요. 우리는 다같이 철학에 대한 앎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모이고 또 그런 규칙을 세운 것이지, 단순히 인상비평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제 권고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신 줄로 알고, 더 이상 얘기를 이어나가지 않을게요. 본문 작성자께도 괜한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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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덕분에 저도 댓글로 배운 게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