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는 목적인을 "사물 바깥에 존재해서, 그 사물로 하게끔 운동하도록 만드는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을 하시는 군요. 그걸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까닭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방해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셨네요.
근데, 제 말씀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제시한 서술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나 목적론적 사유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혼자 갖고 계신 "목적인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투사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목적인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은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5권(Δ), 1013a24-1013b
(...) 목적, 즉 지향 대상이라는 뜻의 원인이 있는데,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무엇 때문에 산책을 할까? 이에 대해 우리는 '건강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며,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원인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어떤 것이 운동을 일으킨 다음 그 목적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오는 것들도 원인이라고 불리는데, 예컨대 건강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오는 체중감량, 배설, 약초, 도구가 그렇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은 사물의 인과 관계 중 하나로 이해됩니다. 먼저 우리는 특정한 행위를 하고자 할 때, 그 이유로서 목적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가 그 행위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결과이며 따라서 그 행위는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원인이겠죠. 여기서 목적이나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 원인, 그 중에서도 목적으로서 원인(목적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인이 "사물 바깥에 존재해서, 그 사물로 하게끔 운동하도록 만드는 초월적 존재"이느냐, 라고 한다면 꼭 그렇진 않습니다. 한 사물로 하여금 특정한 형상을 지니게끔 만드는 원인으로서 목적인이나, 그러한 운동을 유발하는 원인으로서 목적인은 사물 바깥에 놓인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 자체에 내재적인 형상과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제9권(Θ), 1050a5-28, 1050b4-6
하지만 실체에서도 그렇다. 첫째로, (a) 생성에서 뒤서는 것은 형상과 실체에서 앞선다는 이유에서 그렇고(예를 들면 어른이 아이보다 앞서고 사람이 씨보다 앞서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생겨나는 것은 모두 원리이자 목적으로 향해 나아간다는 이유에서도 그런데(왜냐하면 지향 대상은 원리이며, 생성은 목적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현실태는 목적이요 이것을 위해서 가능태가 획득된다. 왜냐하면 동물들이 보는 것은 시각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들은 보기 위해서 시각을 갖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집짓는 기술은 집을 짓기 위해서 있으며 이론적 지식은 이론적 고찰활동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이론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 이론적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분명히 실체와 형상은 현실태이다. 이런 근거에서 분명 현실태가 실체의 측면에서 가능태에 앞서며, 앞서 말했듯이 현실태가 있으면 항상 다른 현실태가 그것에 시간적으로 앞서고, 이는 영원한 첫째 원동자의 현실적 활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어느 경우에서든 현실적인 것이 잠재적인 것보다 우선하고 있다는 논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재적인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잠재적인 것, 가령 능력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은 그것의 실현을 목적으로 두고 있겠죠. 가령 우리가 지나치곤 하는 공사판, 건축되는 건물은 완공된 건물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경우에서도, 건물의 건축은 특정한 형상으로 완공된 건물을 논리적으로도, 형이상학적으로도 전제하고 있겠네요. 그러나 이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목적이나 목적인은 논의되고 있는 사물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대상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의 내재적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DNA라든지, 미생물의 변태라든지 하는 것들도 충분히 목적론적 사유로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생물체든지, 그 생물체 안에 내재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문제는, 선생님께서 "목적"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설령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과 "의지"를 연결시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랬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각 생물체나 이를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방식으로 "목적"과 "의지"를 서로에 대해 연결시키고 있는지 면밀하게 논의되어야 해요.
이러한 주장은 설명 부담을 많이 지닙니다. <형이상학>과 <영혼에 대하여> 원 저자의 생각이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원 저자의 책을 직접 찾아보고 논증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원 저자가 하지 않은 것을 갖고, 또 그 시대에 가능하지 않았던 조건들과 사실들을 갖고 원 저자의 공과를 평가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주장을 했으니, 내가 갖고 있는 인상만으로 이 정도 비판을 해도 되겠다"라고 한다면 그건 정당하지 못합니다. 막말로, 중간에 원자재나 원자재 대금 빼돌리고, 품질 깎아먹은 사람을 비판해야지, 성실하게 원자재 제공한 사람에게 그 비판을 덮어 씌우는 게 맞는 일일까요?
표현에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제시하신 주장들은 너무 큰 설명 부담을 지니고 있어요. 이런 지적들이 정말 귀찮으시겠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나 "정확한 철학을 방해했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표현은 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인식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명확하게 주어져 있다는 관점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방해했다"는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진행을 왜곡했다고 읽힐 수 있는데, 그러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확한 철학"을 방해했지만, 우리는 그가 정확한 철학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철학"을 갖고 있다면, 도대체 그 "정확한 철학"은 무엇이고 그 "정확함"을 판단할 척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에 의해 정당화 되는가?"
라는 물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누군가를 면박주려고도, 으스대려고도, 가르치려 드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 자신부터 앎이 짧으니까요. 다만, 철학적 토론 공간에서 무언갈 하시려면, 최소한 그 공간에서 요구되는 규칙을 지키셨으면 해요. 우리는 다같이 철학에 대한 앎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모이고 또 그런 규칙을 세운 것이지, 단순히 인상비평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제 권고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신 줄로 알고, 더 이상 얘기를 이어나가지 않을게요. 본문 작성자께도 괜한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