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다 아키라(淺田彰)는 1980년대 이후 일본 사상계에 소위 ‘뉴아카데미즘’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1981년 교토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83년에 고작 26살의 나이로 『구조와 힘』1이라는 저서를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일본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을 거의 최초로 해설한 작품으로 대단히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레비스트로스, 크리스테바, 바타이유, 라캉, 들뢰즈, 가타리 같은 당대의 최신 철학자들을 전방위적으로 매우 폭넓게 인용하면서도 그들의 이론을 평이한 문체와 깔끔한 도식으로 요약하고 있어서 이후 일본 사상계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이 이해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구조와 힘』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꽤나 흥미로운 ‘철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꽤나 중요한 ‘역사적’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철학적 면모 : 『구조와 힘』이 다루고 있는 레비스트로스, 크리스테바, 바타이유, 라캉, 들뢰즈, 가타리 같은 철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현대철학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요약·평가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논의일 수 있다. 물론, ‘구조(構造)’와 ‘힘(力)’ 사이의 대립이라는 도식, 혹은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사이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지난 40년 동안 이루어진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후속 연구를 반영하기에는 낡은 것으로 보인다. 신문과 방송에서 새로운 사상을 홍보하기 위해 발명해 낸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같은 엉성한 용어를 오늘날에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연구자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이 지닌 강점을 명료하게 기술하려는 작업 자체는 참고할 만하다. 특히, 이러한 작업은 2010년대 이후 소위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의 등장과 함께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이 새로운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지는 2010년대 이후의 분위기는 그들의 철학이 처음 형성되었던 1970-1980년대의 담론을 다시 성찰해 보도록 자극한다.
역사적 흔적 : 석사를 막 졸업한 대학원생이 쓴 저서가 일본 현대 사상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1980년대의 아사다 아키라, 나카자와 신이치, 하스미 시게히코, 가라타니 고진 등을 통해 오늘날의 아즈마 히로키와 사사키 아타루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현대 사상’이라는 흐름에서 『구조와 힘』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모든 것은 『구조와 힘』에서 시작되었다.”(사사키, 2011: 27)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책은 일본 현대 사상에 큰 기여를 하였다. 따라서 기존 사상계의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 하나의 독자적 사상계 전체를 새로 형성할 만큼의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일본과 유사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같은 비서구권 담론 장은 『구조와 힘』 이후 일본 현대 사상계의 형성 과정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을지도 모른다.
퓌지스, 카오스, 상징적 질서
『구조와 힘』은 문화가 어떻게 성립하고, 변화하고, 무너지는지를 기술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 책은 ‘잉여’라고 일컬어지는 상태로부터 문화가 출현하는 과정을 ‘퓌시스’, ‘카오스’, ‘상징적 질서’라는 세 단계로 설명한다.
태초의 잉여 : 어떠한 질서도 성립하기 이전에는 ‘잉여(excès)’가 있었다. 모든 논의는 “태초에 잉여가 있었다.”(아사다, 1995: 15)라는 선언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잉여’란 유기체가 따르는 자연적 질서와 인간이 따르는 상징적 질서로부터 어긋나 있는 상태이다. 모든 종류의 질서에 대해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선행하는 원초적 실재가 바로 잉여인 것이다. “[……] 일단 그러한 ‘어긋남’을 출발점으로 가정하고, 그로부터 어떠한 귀결이 나올 수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추적해보고자 한다.”(아사다, 1995: 15)
퓌지스 : 유기체는 자신에게 내재된 일정한 ‘상스(sens)’에 따라 행동한다. 즉, 생명을 지닌 존재는 본능에 주어진 일정한 ‘방향’과 ‘의미’를 향해 움직인다. “무기적 자연이 상스가 없는 세계인 데 반해, 유기적 자연은 상스를 가지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아사다, 1995: 17)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먹어야 하는지,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지, 어떠한 대상과 짝짓기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유기체가 살아가는 ‘환경 세계(Umwelt)’는 그 자체 속에 상호적으로 잘 조직된 질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양한 유기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질서인 ‘퓌시스’를 동경하기도 한다.
카오스 : 인간은 하나의 상스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만족되지 않는 충동을 따라 수많은 상스를 추구한다. 이러한 상스의 범람은 결국 어떠한 상스도 성립할 수 없는 ‘농상스(nonsens)’의 상태로 귀결되고 만다. 따라서 인간의 세계에서는 유기체의 세계와 달리 하나의 통일된 질서가 발견되지 않는다. 넘쳐흐르는 온갖 상스는 서로 끊임없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를 낳는다. “모두가 모두를 공격하고 죽이는 무차별성의 혼돈, 이것을 자연이라 부르기란 이제 불가능하다. 인간적 자연(human nature)은 카오스로 변한 자연, 즉 비(非)자연이다.”(아사다, 1995: 20)
상징적 질서 : 혼란스러운 농상스의 상태를 제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성립된 질서가 바로 문화이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 서로 충돌하는 상스에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고자 한다. “카오스에 던져진 인간은 퓌지스를 대신할 만한 어떤 질서를 구성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질서는 물론 불가결하다.”(아사다, 1995: 24) 인간이 구성해 낸 문화는 ‘자의성’, ‘변별성’, ‘공시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즉, (1) 문화는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질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성된 질서라는 점에서 ‘자의적’이다. (2) 문화는 선/악, 미/추, 성/속 같은 대립되는 항들을 나눈다는 점에서 ‘변별적’이다. (3) 문화는 대립되는 항의 한쪽을 규정하여 나머지 다른 한쪽까지 동시에 규정한다는 점에서 ‘공시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질서는 인간이 우주와 규범을 이해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문화에는 인간이 자신의 방식대로 지각한 우주인 ‘코스모스’와 인간이 자신의 방식대로 지각한 규범인 ‘노모스’가 모두 포함된다.
현상과 물자체: 관념론과 유물론
‘퓌지스’, ‘카오스’, ‘노모스’의 구별을 통해 통시적으로 해설된 내용은 ‘현상’과 ‘물자체’라는 구별을 통해 공시적으로 요약될 수도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극 중에서 ‘현상’은 상징적 질서에 대응하고, ‘물자체’는 잉여에 대응한다. 두 극을 각각 ‘구조’와 ‘힘’이라고 다시 명명해 보자. 이러한 경우 현상과 물자체 중 어느 쪽을 더욱 강조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대립이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관념론 : 관념론은 현상 바깥의 물자체를 인정하고자 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관에 매개된 현상이다. 여기서 ‘주관’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초월적 주관(transcendental subjectivity)’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가 말하는 ‘상징적 질서’와 다르지 않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낸 ‘상징적 질서’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상징적 질서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조주의란 관념론의 현대적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가 상징적 질서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 바깥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여기서 관념론의 현대적 변형을 본다.”(아키라, 1995: 87)
유물론 : 유물론은 현상 바깥의 물자체를 강조하고자 한다. 관념론에서는 물자체가 완전히 무시되거나 물자체가 현상에 종속된다.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손쉽게 간과된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세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 질서’를 절대화시킨다. 그러나 상징적 질서를 절대화한 상태에서는 상징적 질서를 극복할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유물론과 후기구조주의는 현상 바깥의 물자체와 구조 바깥의 힘에 대한 사유를 통해 관념론과 구조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상과 같은 입장(구조주의의 입장)에 서는 한에서는, 표상 체계의 구조만을 문제삼고 그 바깥을 무시하든가, 아니면 형상에 의해 규정된 질료라는 형태로만 고려하든가 하는 길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을 벗어나고자 한다면(그리고 적어도 참된 의미에서의 유물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우선은 이 이원론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아키라, 1995: 88)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크리스테바, 바타이유, 라캉
구조주의는 상징적 질서가 성립하고, 변화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상징적 질서에 내재된 원리를 바탕으로 해명한다. 우리는 구조주의에서 제시되는 상징적 질서의 형성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개인 A와 개인 B 사이의 상호적 투쟁 관계가 존재한다(Ⅰ). 이러한 관계가 A, ……, Z를 포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향해 평면적으로 전개된 상황에서는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Ⅱ). 따라서 사회 구성원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투쟁의 평면을 초월하는 절대자 0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관계에 조화로운 위치를 부여하고자 한다(Ⅲ). 이제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환은 절대자 0를 매개로 하는 ‘공통의 장’에서 성립한다(Ⅲ’).
여기서 절대자 0은 상호적 투쟁 관계에서 배제되어 희생양 0’가 되는 방식으로 상징적 질서를 규제하는 위치에 오른다. 상호적 투쟁 관계에서 다른 개인과 동등하게 놓일 수 없는 대상만이 상호적 투쟁 관계 전체를 매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절대자는 언제나 희생양이기도 하고, 희생양은 언제나 절대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교환 관계를 매개하는 대상은 교환 관계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희생양’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환 관계를 매개하는 대상은 교환 관계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절대자’이다.
따라서 상징적 질서는 언제나 자신이 배제하는 카오스와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다. 상징적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질서의 바깥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징적 질서를 초월하는 절대자의 면모에는 상징적 질서에서 배제된 희생양의 면모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구조주의는 구조 바깥으로 배제된 카오스가 구조 속으로 솟아오르는 사건을 통해 단단한 상징적 질서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시작한 ‘구조’에 대한 분석이 크리스테바, 바타이유, 라캉에 이르러 ‘구조 바깥’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원시사회를 구성하는 ‘토테미즘’의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카오스를 관리하기 위한 ‘희생’의 제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레비스트로스). 상징적 질서를 탐구하고자 하는 ‘상징론’은 상징적 질서 바깥을 탐구하고자 하는 ‘기호론’을 요청한다(크리스테바). 상징적 질서와 기호론적 질서 사이의 관계는 ‘변증법’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바타이유). 자기 완결적이지 않은 상징계에서 성립하는 우리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여’를 지닐 수밖에 없다(라캉).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
그러나 구조주의는 구조와 구조 바깥 사이의 관계를 철저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상징론/기호론’이라는 이분법은 여전히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 이러한 도식은 구조를 넘어서는 힘을 기술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아사다가 제시하는 비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구조주의의 이분법은 자의적이다 : ‘구조’와 ‘구조 바깥’을 엄격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구조는 불연속적 단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주기적으로 변화한다기보다는 연속적 운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매 순간 변화한다. 이전 구조와 이후 구조를 나누는 기준은 자의적으로 설정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조와 구조 바깥을 일종의 ‘이망(hymen)’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망이 ‘혼인’과 ‘처녀막’이라는 상반되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결정 불가능한 개념인 것처럼 구조 역시 ‘안’과 ‘밖’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결정 불가능한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칼로 자른 듯한 분명한 이원론은 불가능해진다. 설사 구조와 그 바깥을 발견한다 해도, 양자는 분리/상호침투라는 결정 불가능한 흔들림을 내포하고 있는 이망적 연관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아사다, 1995: 98)
구조주의의 이분법은 근대 자본주의를 해명할 수 없다 : ‘상징론/기호론’이라는 이분법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근대 자본주의는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이분법에 잘 들어맞지 않는 형태로 작동한다. 즉, 고대 전제국가는 주기적 축제를 통해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를 갱신하였다는 점에서 ‘상징론/기호론’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해명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는 어떠한 고정된 구조도 상정하지 않은 상태로 새로운 요소를 끊임없이 흡수하여 양적으로 무한히 비대해지기만 한다는 점에서 ‘상징론/기호론’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해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단단한 틀의 상징적 질서도 없으며, 그것을 꿰뚫고 분출하는 축제의 혼돈도 없다. 구석구석까지 탈신비화된 등질적 공간 속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역동적 운동이 계속되는 사회, 이것이 바로 근대 사회다.”(아사다, 1995: 76) 근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구조’와 ‘구조 바깥’이라는 구별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의 이분법은 구조를 넘어서는 힘을 기술할 수 없다 : ‘상징론/기호론’이라는 이분법을 자의적으로 상정한 상태에서는 ‘힘’의 진정한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도식은 구조 바깥을 구조에 종속시킨다. 즉, 이러한 도식에서 ‘구조 바깥’이란 단지 ‘구조가 아닌 것’,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것’, ‘구조로부터 배제된 것’으로서 단순히 부정적으로 정의될 뿐이다. 구조 바깥을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요소로서 사유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구조 바깥이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과연 가능할지조차 의문스럽다. 구조 바깥조차 구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는 사유는 결국 구조 바깥이란 존재하지조차 않는다는 사유를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사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상과 같은 이해를 통해 정적인 이원론이 역동화하며, 무시되고 있던 질료적 측면이 능동적인 동인으로 과정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구조에서 거슬러올라갔을 때 발견되는 비정상적인 잔여에 불과하다. 추상에 의해 구조가 추출된 후에 남는 이 잔여는 구체적이기는커녕 더 추상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고, 아무런 규정도 받지 못한 채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분의 침입으로 인해 구조가 변동한다는 설명이 유효할 것일지는 의문이다.(아사다, 1995: 94)
포스트구조주의: 들뢰즈와 가타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명확한 안과 밖을 지닌 단단한 구조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구조’라고 일컫는 상징적 질서는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힘’을 특정한 시점에서 고정적 형식으로 파악한 결과이다. 구조와 구조 바깥이란 힘이 끊임없이 뒤엉키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추상물이라는 것이다. 아사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들뢰즈/가타리처럼 특히 힘의 뒤엉킴이 있었다고 말해보자. 예컨대 연결과 단절을 반복하면서 작동하고 있는 기계들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지금 그런 스냅 사진을 찍었다고 해보자. 거기에 찍혀 나온 여러 기계들의 모습, 응결된 정적인 설계도를 사람들은 구조라 부른다. 그렇다면 조금 사이를 두고서 한 장 더 찍어 보기로 하자. 두 장의 사진이 약간의 차이를 보일 경우 그 원인을 찾는다면, 구조의 외부에 남아 있는 무형의 질료(물질─에너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의 기계는 구조와 그 바깥으로 추상된다. 바꿔 말하면 힘이 뒤엉킨 운동은 정적인 형상과 벌거벗은 물질─에너지라는 질료로 추상된다.(아사다, 1995: 96)
근대 자본주의 역시 ‘화폐’라는 하나의 흡입구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힘의 운동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우리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클라인 병의 모델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해명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화폐’라는 가치가 교환이 이루어지는 공통의 장을 통일시키는 절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화폐’라는 가치가 그 자체로 교환 관계에서 유통되는 물품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따라서 화폐는 상징적 장에서 매개를 주도하는 대상이자 상징적 장에서 교환되는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끊임없이 증식시킨다. 모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화폐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화폐를 증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은 점점 확대된다. 마치 클라인 병에서 흡입구를 따라 한 방향을 맴도는 액체의 운동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과 유사하다.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단일한 방향의 운동을 수많은 방향의 운동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러한 전략은 “클라인 병에서 리좀으로”(아사다, 1995: 189)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즉, 근대인이 수행하는 운동은 마치 클라인 병에 부어진 액체처럼 한 방향을 맴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가기 위한 경주는 화폐를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악순환을 계속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무한한 힘의 운동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무한한 힘의 운동을 어떻게 해방시킬 것인지를 사유해야 한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이야기하는 ‘리좀’란 바로 고정된 방향이 없는 힘을 기술한 형태이다. 클라인 병의 형태로 갇힌 힘이 리좀의 형태로 뻗어나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가능하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고자 하는 끊임없는 도주야 말로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사다에 대한 비판
아사다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사유를 ‘구조’와 ‘힘’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요약한다. 그는 구조에 대한 사유가 지닌 한계를 힘에 대한 사유로 극복하고자 한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사안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아사다가 프랑스 현대철학을 요약하는 방식은 과연 적절한가? 아사다가 구조에 대한 사유를 극복하기 위해 대안으로 제시한 힘에 대한 사유는 과연 정당한가?
해석에 대한 비판
구조와 구조 바깥의 상호작용이 절대자 0와 희생양 0’을 꼭짓점으로 하는 쌍원뿔 형태로 도식화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다. 이러한 논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 구조’에 내재하고 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레비스트로스, 크리스테바, 바타이유, 라캉의 구조주의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제시된다. 19-20세기 철학에서 등장한 서로 다른 이론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텍스트 독해력과 함께 상당한 통찰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구조와 힘』은 구조주의에 대한 요약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논의를 꿰뚫는 학술적 역량을 인정하더라도 구조주의에 대한 요약이 아주 엄밀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우리는 상호적 투쟁 관계에서 배제된 희생양이 상호적 투쟁 관계를 규제하는 절대자가 된다는 주장을 아무 근거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주인/노예, 절대자/희생양, 아버지/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 역전의 문제는 헤겔, 지라르, 프로이트에게서 서로 다른 철학적, 인류학적, 정신분석학적 이유로 정당화된다. 따라서 세 인물이 이야기하는 결론이 유사하다는 사실만으로 세 인물이 완전히 동일한 논리를 제시하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헤겔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크게 두 번의 관계 역전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자기의식과 자기의식의 투쟁에서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각오한 쪽이 ‘주인’이 되고 그렇지 못한 쪽이 ‘노예’가 되는 사건이다. 두 번째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역설적이게도 노동하는 노예가 ‘사유하는 의식’을 실현시키고 노동하지 않는 주인이 도태되는 사건이다. 헤겔 연구자 사이에서는 두 가지 역전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단순히 희생을 통해 절대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즉, 첫 번째 역전에서 주인은 ‘죽음을 각오하였기 때문에’ 주인이 된 것이지 ‘죽었기 때문에’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역전에서 노예 역시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유하는 의식을 실현시킨 것이지 ‘죽었기 때문에’ 사유하는 의식을 실현시킨 것은 아니다.
지라르 : 희생양 메커니즘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회의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모방 경쟁이 심화되어 사회의 갈등이 극한에 이르게 된 상황에서는 공동체 구성원이 희생양을 선정하여 그에게 모든 악의 책임을 떠넘기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분열되었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희생양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다시 단합에 이른다. 이러한 단합은 일종의 오류추리가 발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희생양이 살해당한 이후에 사회의 갈등이 해소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희생양이 실제로 사회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신화를 도출해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가 희생양을 절대자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일으킨다고 지적해야 한다. 희생양은 단순히 ‘죽었기 때문에’ 절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악의 책임을 특정한 개인에게 사후적으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오류추리가 희생양을 절대자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프로이트 : 아버지 살해 구조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전제된다. 즉,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하여 부족 내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품는 동시에 아버지를 숭배하여 안정된 질서 속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 역시 품는다. 여기서 아버지 살해가 곧바로 아버지 숭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성립한다. 아버지가 사라진 세계란 아들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장소이다.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사라진 빈자리를 메워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이러한 양가감정에서 죽은 아버지를 숭배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난다. 따라서 아버지 살해 구조에서 역시 아버지가 단순히 ‘죽었기 때문에’ 절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양가감정’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전제 없이는 아버지 살해가 아버지 숭배로 귀결되는 이유가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19-20세기 철학에서 등장한 서로 다른 사유가 과연 ‘구조주의’라는 용어 아래에 하나로 포괄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절대자 0와 희생양 0’을 꼭짓점으로 하는 쌍원뿔 형태로 구조주의를 도식화하려는 시도는 사실 많은 허점을 안고 있다. 헤겔, 지라르, 프로이트의 이론과 레비스트로스, 크리스테바, 바타이유, 라캉의 구조주의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논의를 한꺼번에 뒤섞어버리고자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헤겔, 지라르, 프로이트는 자신들이 상정하고 있는 철학적, 인류학적, 정신분석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주인/노예, 절대자/희생양, 아버지/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 역전을 기술하고 있다. 각각의 전제는 결코 그 자체로 자명하지도 않고, 서로 치환되지도 않고, 객관적으로 일반화되지도 않는다.
이론에 대한 비판
구조주의에 대한 해석은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영향을 준다. 구조주의를 무엇이라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구조주의를 어떻게 비판해야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주의가 구조와 구조 바깥의 상호작용에서 ‘구조’를 더 강조하는 입장으로 규정된 상황에서는 ‘관념론/유물론’, ‘상징적 질서/카오스’, ‘절대자/희생양’, ‘상징론/기호론’, ‘구조/힘’이라는 이분법이 마치 당연한 구분처럼 전제되고 만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아무리 ‘힘’을 더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상정한 이분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세 가지 논제를 통해 더욱 정교하게 제시될 수 있다.
구조는 구조 바깥을 전제하지 않는다 : 구조가 변화하거나 무너지는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구조 바깥을 상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 구조에 저항하는 대상은 ‘구조 바깥’이 아니라 ‘다른 구조’이다. 즉, 한 입장은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다른 입장과 만날 때에야 비로소 지적 충격을 받게 된다(가다머). 우리는 우리 자신과 상대편 대화자가 제시하는 주장이 얼마나 추론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지를 매 순간 평가하는 방식으로 기존 주장을 폐기하거나 새로운 주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브랜덤). 여기서 한 믿음을 정당화하는 대상은 다른 믿음밖에 없다(데이비슨). 비개념적 대상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지적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인과의 질서와 인식의 질서를 혼동하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셀라스). 따라서 어떠한 입장이 우리에게 동의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입장은 우리에게 이해되어야 한다(로티). 어떠한 대상이 우리의 사유에 마찰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그 대상은 우리의 사유에 포함되어야 한다(맥도웰). 구조가 성립하고, 변화하고, 무너지는 사건은 ‘구조 바깥’과 무관하게 ‘구조와 구조의 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구조 바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 구조 바깥을 상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형이상학적 독단에 빠지고 만다. ‘구조/힘’이라는 이분법에서 구조주의가 ‘구조’를 절대화한다는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가 ‘힘’을 절대화한다는 비판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단단한 ‘구조’라는 표상이 형이상학적 독단인 것처럼 넘치는 ‘힘’이라는 표상 역시 형이상학적 독단이다. 힘의 뒤엉킴이 ‘구조/힘’이라는 이분법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은 여전히 이분법이 상정하고 있는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잉여’, ‘힘’, ‘카오스’, ‘차이’, ‘기호’, ‘과잉’, ‘물질’, ‘다수’ 따위를 구조 바깥에 상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분법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2 ‘구조/힘’이라는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강조하는 입장과 ‘힘’을 강조하는 입장이 모두 형이상학적 독단에 빠져 있다고 지적해야 한다. 애초에 구조가 경험을 매개한다는 주장과 힘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주장은 서로 양자택일 관계에 놓일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구조 속에서 매개되는 대상만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힘일 수 있다. 구조와 구조 바깥이란 단순히 특정한 이론적 맥락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 이미지일 뿐이다.
구조 바깥에는 해방이 없다 : 구조 바깥에 호소하는 입장은 해방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힘을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야 한다는 원론적 주장은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라고 보기 어렵다. 가령, “클라인 병에서 리좀으로”라는 슬로건은 근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빈부격차, 실업, 대공황, 금융위기 등 근대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하게 된 심각한 문제 앞에서 끝없는 도주만을 외치는 태도는 대단히 무책임하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실증적 경제 이론을 통해 대안적 사회 구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빈부격차의 안정화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지, 시장주도의 경제정책과 정부주도의 경제정책 중 무엇이 현 시점에서 국내총생산의 증가에 더 도움이 되는지, 금융위기로 직장과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제도적 안정망을 제공해줄 수 있는 정치가는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참고
아사다, 아키라.,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에서 힘으로』, 이정우 옮김, 새길, 1995.
사사키, 아쓰시., 『현대 일본 사상: 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 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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