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윌프리드 셀라스, 「철학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1)

시간이 날 때마다 셀라스의 「철학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를 한 챕터씩 번역해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정식으로 출판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이 논문을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어서 공부 삼아 해보는 번역이에요. 제가 영어를 능숙하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어서, 아마 오역도 많고 어색한 문장도 많을 것 같은데, 이상한 부분이나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발견하신 분들은 언제든지 댓글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

Ⅰ. 철학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

  1. 철학적 탐색

철학의 목적은, 추상적으로 공식화하면,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물들이 어떻게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서로 관계 맺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1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물들(things in the broadest possible sense)’이라는 말 아래에 나는 ‘양배추와 왕’2뿐만 아니라, 숫자와 의무, 가능성과 손가락 튕기기, 미적 경험과 죽음 같은 급진적으로 다른 항목들을 포함시킨다. 철학에서 성공에 이른다는 것이란, 요즘의 표현 방식을 사용하자면, 이러한 사물들 모두에 관하여 ‘숙달한다는 것(to ‘know one’s way around’)’3일 텐데, 이것은 이야기 속 지네4가 ‘나는 어떻게 걷지?’와 같은 물음에 직면하기 전에 [걷는 법을] 숙달한 것과 같은 반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이지 않은 파악이 금지된다는 의미에서 반성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이다.

숙달한다는 것은, 요즘의 구분을 사용하자면, ‘사실을 아는 것(knowing that)’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어떻게 하는지 아는 것(knowing how)’의 한 형태이다. 자전거를 어떻게 타는지 아는 것과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의 다리에 의해 페달로 가해지는 지속적인 압력이 앞으로 나가는 동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아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주관에 좀 더 친숙한 예를 사용하자면, 수학에서 주어진 증명의 각 단계가 이전 단계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어떻게 증명을 찾는지 아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때로는 증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정해진 과정을 따를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흔하다.5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안다는 것(knowing how to do something)’이라고 적절하게 불릴 수 있는 무엇이든지 사실에 대한 지식(knowledge that)을, 다르게 말하자면, 진리나 팩트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ruth or fact)을 대다수 전제한다고 논증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오리는 어떻게 수영해야 하는지 안다.’라는 진술은 오리가 물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진술만큼이나 은유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특별히 인간적 활동의 층위에서 어떠한 것을 어떻게 하는지 안다는 것은 사실을 안다는 것을 상당량 전제할지도 모르며, 철학의 목적인 넓은 의미에서의 반성적 숙달(reflective knowing one’s way around)이 진리에 대한 반성적 지식을 상당량 전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철학적 ‘노하우(know-how)’에서 전제되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지식의 주제는, 어떤 의미에서, 특수한 학문 분야(discipline)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중요한 의미에서 철학은 다른 주제들이 다른 특수한 학문 분야에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배치되어 있는 특수한 주제를 갖지 않는다. 만약 철학자가 그러한 특수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면, 마치 그들이 다른 특수한 주제를, 처음에는 수학을 가지고서, 더 최근에는 심리학과 사회학을 가지고서, 그리고 현재에는, 이론 언어학의 특정한 측면을 가지고서, 비철학자들에게 2500년이 넘게 양도한 것처럼, 그들은 그 주제를 새로운 전문가 집단에 양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6 철학에서 특징적인 것은 주제가 아니라, 모든 특수한 학문 분야의 주제를 숙달하는 목적이다.

이제 특수한 학문 분야들은 그들의 주제를 숙달하며(know their way around)7, [그 학문 분야들] 각각은 자신의 주제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을 [숙달하는 방법을] 배운다(learn to do so). 하지만 각각의 특수한 학문 분야는 어떻게 그들의 전문 영역(bailiwick)이 전체로서의 [지적] 벌판(countryside as a whole)에 들어맞는지에 대한 감각 역시 가져야만 한다. 많은 경우 그러한 감각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유한 비반성적 ‘숙달’ 이상의 것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 전문가는 그의 주제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한 그의 사유의 방법과 원리 역시 어떻게 지적 지형(intellectual landscape)에 들어맞는지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성한다. [역사가가] 자신의 사유에 대해──그것의 목적, 기준, 난점에 대해──반성하는 것은 그의 본분 중 일부이다. 역사적 물음을 다루면서, 그는 그 자체로 일차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물음이 아닌 물음과 직면하고 그에 대해 대답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물음을, 마치 그것이 특수하게 역사적인 물음에 대답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다룬다.

특수한 학문 분야에 대한 반성은 그 학문 분야의 이상적 실천가가 자신의 특수한 주제와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전체로서의 지적 지형에 대한 반성적 통찰에 비추어 볼 것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곧장 이끌 수 있다. 특수한 학문 분야가 철학에 의해 완성된다는 플라톤적 관념에는 많은 진리가 있지만, 철학자가 전문가처럼 각각의 학문 분야를 숙달해야만 한다는 추가적 관념은 과학 혁명이 시작된 이후로 더더욱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이 되었다.8 다만 철학자가 전문가처럼 각각의 학문 분야를 숙달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가 그 학문 분야의 주제에 대해 숙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가 철학적 목적에 가까워져야 할 경우에는 그렇게 [숙달]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과학과 학문 분야의 증대란 지성계의 흔한 특징이다. 그에 못지않게 흔한 것은 이러한 다양성 사이에 학문적 다리가 건설됨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성의 통합이다. 나는 이러한 통합에 대해 이후의 장에서 말할 것이 있다.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모든 사물을 함께 바라보는 것(seeing all things together)’이라는 과제가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로 특수성으로 분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특수화를 위한 자리가 존재한다. 우리가 부분을 숙달하지 않고서는 전체로서의 고속도로 체계를 숙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물을 주요한 집단으로 나누는 법(major grouping of things)에 대해 숙달하지 않고서는 ‘사물 일반(things in general)’을 숙달하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기획을 구별시켜주는 것은 ‘전체에 대한 안목(eye on the whole)’이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자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전문가로부터 구별시켜줄 것이 거의 없는데, 가령 역사철학자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역사학자로부터 구별시켜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성 내부의 물음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에 관여하기보다도,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다른 지적 연구와 동맹을 맺는지를 더욱 반성하기는 바라는 한, 그는 철학적인 태도를 지닌다고(philosophically-minded) 적절하게 말해진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전체에 대한 우리의 안목’을 내내 응시하지 않고도 그러한 안목을 가질 수 있다.9 [‘전체에 대한 우리의 안목’을 내내 응시하고자 하는] 전자10는 무익한 시도이다. 더 나아가, 다른 전문가처럼, 전문적인 철학자는 전체에 대한 그의 감각의 많은 부분을 우리의 공통적 유산인 반성 이전적 정위(pre-reflective orientation)로부터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는 그가 철학적 사유의 본성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한, 적절한 의미에서 전체에 대한 그의 안목을 가진다고 말해질 수 없다. 철학 자체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반성이야 말로 넓은 의미에서 반성적 전문가와 대조되는 철학자의 독특한 특성이며, 철학적 기획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반성이 부재할 경우에는, 우리는 기껏해야 가능적인 철학자(potential philosopher)일 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철학자의 목표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분석하는(analyse)’ 것이라는 사실이 종종 말해졌다. 하지만 ‘분석(analysis)’이라는 용어가 철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에 실질적인(substantive) 기여를 하지는 않는다는 함의에는 도움이 되며, 우리가 그러한 것을 아는 방식(manner)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과 관계되기는 하더라도, 그 용어는 ‘종합(synthesis)’이라는 대조되는 용어에 의해 대부분의 경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대조로 인해 [철학자의 목표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라는] 해당 진술은 철학이 더더욱 근시안적이고, 부분 속에서 부분을 쫓고 있으며, 시야로부터 새로운 부분이 보이게 됨에 따라 차례대로 각각의 부분을 상실하고 있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11 그러므로 우리는 근시로서의 철학에 대한 분석적 관념을 참된 철학에 대한 종합적 비전과 대조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만일 ‘분석’과 ‘종합’ 사이의 대조가 은유에서 실효성을 지니는 함축어라면, 순수하게 분석적인 철학이란 용어상 모순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분석’을 동일한 전체 영역에 대해 더더욱 작은 축척을 지닌 지도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유비──이 유비는 개괄적 요소(synoptic element)를 더 제대로 다룬다──로 이해하더라도, 그 유비는 혼란을 일으키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을 원본이 되는 대축척 지도로부터 소축척 지도를 만드는 일에 비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의 더 작은 축적을 지닌 지도란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12

비록 그 유비가 증가의 차원을 더하는 동안 이미 알려진 것의 구조 내부에 있는 개괄적 요소와 작업의 주제를 보존하면서 그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 유비는 두 가지 점에서 혼란을 일으킨다.13 (a) 이 유비는 특수한 학문 분야들이 혼동되어 있다고 암시한다.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주제를 명료화하기 위해 철학자를 기다려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철학의 창조적인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가 자신의 영역을 숙달하지 못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전문가가, 자신의 인근 영역을, 자신의 인근 영역으로서 숙달하지만, 전체로서의 지형의 일부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숙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14

(b) 이 유비는 철학에 의해 발생하는 본질적 변화가 처음부터 전체로서 파악된 그림 내부의 세부 사항 바깥에 서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물론, 전체로서 반성적으로 파악되는 하나의 그림이 존재하는 한, 그 반성적 비전의 통일성은 초기 자료라기보다는 과제이다.15 그러므로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반성적 층위에서의 조사는, 부분을 먼저 살피지 않고서는 통일성이 보이지 않는 크고 복잡한 그림 그리기 계획에 더 가깝게 비교된다. 그러나 이 유비는 우리가 현대 철학자의 원본적 자료 속에 통일성이 결핍되어 있는 두 번째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 한 완전하지 않다. 그[현대 철학자]는 하나의 그림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두 개의, 그리고, 사실상, 많은 그림과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16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복수성은 사실-조사적인 것, 윤리적인 것, 미적인 것, 논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및 경험의 다른 측면들 사이의 구별에 관련되는 것이 아닌데, 이러한 것들은 단지 전체로서 반성적으로 파악되는 하나의 복잡한 그림의 측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복수성]은 현대철학자가 자신의 기획의 시작에서부터 직면하는 결정적인 이중성에 대한 하나의 조건(term)을 구성한다. 여기서 가장 적합한 유비는 지형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이 하나의 정합적 경험 속에서 융합되는 입체적 비전(stereoscopic vision)이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하나의 복잡하면서도 많은 차원을 지닌 그림, 곧 그가 그러한 것[복잡하면서도 많은 차원을 지닌 그림]으로서 제대로 인식하게 되어야만 하는 그림의 통일성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을 지닌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서에 대한 두 가지 그림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인데, 각각은 [자신이] 세계-내-인간(man-in-the-world)에 대한 완전한 그림이라고 주장하며, 철학자는, 개별적 조사 이후에, 각각을 하나의 비전 속에 융합시켜야만 한다.17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각각, 세계-내-인간에 대한 현시적(manifest) 이미지와 과학적(scientific) 이미지로 지칭하자. 우선, 그것들을 이미지들로 부름으로써, 나는 둘 중 어느 하나나 둘 모두에 ‘실재’의 지위를 주는 것을 거부할 의도는 없다. 나는, 후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들을 ‘괄호치는(bracketing)’ 것이며, 곧 그들을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으로부터 철학적 반성과 평가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미지’라는 용어는 유용하게도 애매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 용어는 대상──가령, 나무──과 평면 위에 있는 대상에 대한 투사, 혹은 벽 위에 있는 대상의 그림자 사이의 대조를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물론, 비록 의존적 상태이기는 하지만, 상상되는 대상만큼이나 실재적이다.

다른 의미에서, ‘이미지(image)’는 상상되는(imagined) 무엇이며, 비록 그 대상에 대한 상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상상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이미지가 그저 상상적(imaginary)이거나 비실제적(unreal)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된 것은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가 옆방에서 춤추고 있다고 우리가 상상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춤추고] 있을 때처럼 말이다. 이러한 애매성은 철학자가 인간적 이해 위에 있는 세계-내-인간에 대한 두 가지 투사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내가 암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투사 중 하나를 나는 현시적 이미지라고 부를 것이며, 다른 하나를 과학적 이미지라고 부를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 강연장18이나 미합중국 헌법처럼 세계의 한 부분이자 구획으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이러한 이미지들에 직면하는 것에 더하여, 그[철학자]는 ‘상상된 사물들(things imaged)’이라는 의미에서의──또는 언젠가 내가 더 낫게 말한 것처럼, ‘구상된(conceived)’ 사물들이라는 의미에서의──이미지들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지’를 이러한 의미에서 관념(conception)을 위한 은유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구상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일상적인 의미에서, 상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친숙하기 때문이다.19 그렇다면 철학자는, 동일하게 공적이고, 동일하게 자의적이지 않은, 세계-내-인간에 대한 두 가지 관념에 직면하며, 그는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의 입체적 비전에서 일치하는지(fall together)를 보려는 시도를 회피할 수 없다.

‘현시적’과 ‘과학적’ 사이의 대조에 대해 내 용어 사용 방식대로 설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그것들이, 마찰 없는 물체나 이상 기체가 이상화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처럼, 둘 다 ‘이상화된 것(idealization)’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과학적 이상화가 물리적 체계의 발전을 조명하는 것처럼, 그것들[‘현시적’과 ‘과학적’이라는 용어들]도 철학적 아이디어의 발전이 지닌 내적 역동성을 조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그것들은 막스 베버의 사회학 속 ‘이념형(ideal type)’과 비교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각각의 이미지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현시적 이미지라고 부를 것의 주된 개요가 역사 이전의 안개 속에서 형태를 갖춘 반면, 과학적 이미지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눈앞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복잡해진다.

※ 오역에 대한 지적 및 번역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블로그 포스트

https://blog.naver.com/1019milk/222260095628

​원문

Sellars, Wilfrid., “Philosophy and the Scientific Image of Man”,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 Atascadero, California: Ridgeview Publishing Company, 1991, pp. 1-5.

  1. 철학의 목적이란 사물들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들(things)’이라는 용어는 온갖 종류의 대상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서로 관계 맺는다(hang together)’라는 용어 역시 온갖 종류의 질서를 포괄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정의되고 있다(역자 주).
  2. ‘양배추와 왕’이라는 표현은 오 헨리(O. Henry)가 쓴 『양배추와 왕(Cabbages and Kings)』이라는 제목의 장편 소설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역자 주).
  3. “know one’s way around ~”라는 표현은 직역할 경우 “~을 하는 자신의 방법을 안다.”라는 의미이다. 셀라스는 이 표현을 일종의 개념어처럼 동명사 형태로 자주 사용한다. 따라서 본고는 이 표현을 ‘숙달하다’, ‘숙달하는 것’, ‘숙달’처럼 한 단어로 옮기기로 한다(역자 주).
  4. 소위 ‘지네의 딜레마(The Centipede’s Dilemma)’라는 우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설명이다. 어느 날 두꺼비가 달리고 있는 지네에게 “어떤 발을 어떤 발 다음에 움직이는 거니?”하고 묻자 지네가 평소 몸을 움직일 때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문제를 의식하게 되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역자 주).
  5. 원문은 “Sometimes being able to find a proof is a matter of being able to follow a set procedure; more often it is not.”이다. 증명을 찾기 위해 정해진 과정을 따르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다는 의미이다(역자 주).
  6. 즉, 철학은 자신만의 특수한 주제를 갖고 있지 않다. 만약 그러한 주제가 있다면, 그 주제는 이미 다른 전문가 집단이 다룰 수 있도록 양도되었을 것이다. 철학이 다루어온 주제들이 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이론 언어학자 같은 다른 전문가 집단에게 2500년 동안 끊임없이 양도되었던 것처럼 말이다(역자 주).
  7. 원문은 “Now the special disciplines know their way around in their subject-matters”이다. 이 문장은 문법 구조 그대로 직역할 경우 “이제 특수한 학문 분야들은 그들의 주제에서 ~을 하는 자신들의 방법을 안다.” 정도가 될 수 있다. 여기서 “in their subject-matter”는 곧이어 등장하는 뒷문장의 “in the process of discovering truths about its subject-matter”와 병렬적 구조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역은 “~을 하는”에 포함되어야 하는 목적어를 명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know one’s way around”라는 표현이 다른 여러 곳에서 하나의 개념어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본고는 두 문장에서 전치사 ‘in’ 이하의 내용을 “know their way around”의 의미상 목적어로 번역하였다. 실제로, “I believe in God”과 같은 문장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번역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전치사 ‘in’ 이하의 단어는 종종 그 앞에 등장하는 동사의 목적어로 번역될 수 있다(역자 주).
  8. 즉, 특수한 학문 분야가 철학에 의해 완성된다는 ‘플라톤적 관념(Platonic conception)’은 철학자가 각각의 특수한 학문 분야를 숙달해야 한다는 ‘추가적 관념(companion conception)’까지도 수반한다(역자 주).
  9. ‘전체에 대한 안목’을 얻기 위해 반드시 철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그런 안목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자신의 작업이 다른 분야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반성하고자 하는 전문가는 이미 ‘철학적’이다. 그는 굳이 철학을 통해 ‘전체에 대한 안목’을 얻으려 하지 않고서도 이미 그러한 안목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역자 주).
  10. 영어 문장 구조상 원문에는 ‘후자(the latter)’라고 되어 있다. 이전 문장인 “And, indeed, one can ‘have one’s eye on the whole’ without staring at it all the time.”에서 동사 ‘have’와 ‘stare’가 병렬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원문의 ‘후자’란 바로 “staring at it all the time”을 의미하는 것이다(역자 주).
  11. ‘분석(analysis)’이란 주어진 문장을 논리적 통사론에 따라 더 근본적인 구성 요소로 환원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철학이 단순히 주어진 문장을 분석하는 학문일 경우 철학자는 자신이 이미 아는 내용을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에 근시안적으로 주목해야 한다(역자 주).
  12. 여기서 셀라스는 대축척 지도(lage scale map)와 소축척 지도(small scale map)를 서로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대축척 지도는 거리를 축소한 값을 크게 하여 좁은 범위를 표현한 지도이고, 소축척 지도는 거리를 축소한 값을 작게 하여 넓은 범위를 표현한 지도이다. 따라서 좁은 범위를 표현하는 대축척 지도를 분석하여 넓은 범위를 표현하는 소축척 지도를 만드는 작업이란 불가능하다. 넓은 범위를 표현하는 소축척 지도를 분석하여 좁은 범위를 표현하는 대축적 지도가 만드는 작업만이 가능할 뿐이다(역자 주).
  13. 원문은 “Even if the analogy is changed to that of bringing a picture into focus, which preserves the synoptic element and the theme of working within the framework of what is already known while adding a dimension of gain, the analogy is disturbing in two respects.”이다. 즉, 전문가가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에 대한 그림에 점점 초점을 맞추는 과정을 떠올려 보자. 전문가가 대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은 대상에 대한 그림이 뚜렷해지는 과정에서 모두 보존된다. 새롭게 증가된 지식이 그동안 쌓인 지식을 망각 속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유비가 철학이 수행하는 작업을 묘사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셀라스는 이러한 새로운 유비조차 두 가지 문제를 지닌다고 지적한다(역자 주).
  14. 즉, 전문가는 인근 영역을 ‘인근 영역’으로서는(as his neighbourhood) 숙달할 수 있지만 ‘전체로서의 지형의 일부’로서는(as a part of the landscape as a whole) 숙달하지 못한다(역자 주).
  15. 즉, 대상에 대한 그림을 명료화하는 과정에서는 ‘그림’이라는 전체가 미리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러나 철학이 대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는 ‘전체에 대한 안목’이 미리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안목은 철학이 탐구의 끝에서 성취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역자 주).
  16. 현대철학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단일한 그림을 갖고 있지 않다. 특별히, 우리 시대의 철학자들은, 셀라스가 ‘과학적 이미지(scientific image)’와 ‘현시적 이미지(manifest image)’라고 부르는 두 가지 그림을 원리적으로 어떻게 통일시켜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더 나아가, 철학자들은 상이한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성립한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세계에 대한 상이한 그림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조화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역자 주).
  17. 원리적으로 경쟁하는 두 가지 그림을 어떻게 하나의 비전 속에서 융합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철학자들을 고민스럽게 한다. 현대철학은 ‘세계-내-인간’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자처하는 두 가지 상이한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각각의 그림은 자신이 ‘완전한’ 이미지라고 주장하기 위해 상대편 그림을 ‘완전한’ 이미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에 대한 안목’을 지향하는 철학의 기획은 시작에서부터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역자 주).
  18. 「철학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미지」는 셀라스가 1960년 12월에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행한 두 차례의 강연을 편집한 논문이다. 따라서 셀라스는 ‘이 강연장(this platform)’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이 강연을 하고 있는 피츠버그 대학교의 강연장을 지칭하고 있다(역자 주).
  19. 우리 머릿속에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구상된(conceived)’ 모든 것은 ‘관념(conception)’이다. 관념 중에는 능동적으로 ‘상상된(imagined)’ 이미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모든 관념이 상상된 이미지인 것은 아니다(역자 주).
6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