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성의 인식론적 이해에 대한 윌리엄슨의 비판

티모시 윌리엄슨(Timothy Williamson)의 The Philosophy of Philosophy 4장 " Epistemological Conceptions of Analyticity" sec.3에 수록된 논증의 핵심만 간단히 옮겨봤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해당 챕터의 sec.1, sec.3 정도만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아주 재밌게 읽은 부분이었고, 그럴싸한데?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뭣보다 의미와 이해에 대한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겠다 싶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보충해주실 내용이 있다면 환영입니다!)


주장: 분석성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는 전략은 성공적이지 못하다.

분석성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는 전략에 따르면 어떤 분석명제 s는 다음을 참으로 만든다.

(UA) Necessarily, whoever understands the sentence s assents to it.

윌리엄슨은 다음 문장을 예로 든다.

(S) Every vixen is a vixen.

그리고 (S)가 (UA)를 참으로 만들지 못하는 경우를 두 가지 제시한다.

사례 1
피터는 "There is at least one F"가 참이라는 것이 "Every F is a G"가 참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피터는 "There is at least one vixen"이 거짓이라고 믿는다 (이 명제를 '(N)'이라 하자).
피터는 일종의 음모론에 빠져서 사실 이 지구 상에 여우(foxes)란 건 없고 따라서 암여우(vixens)도 없으며 여우랍시고 떠도는 모든 사진은 조작된 것이라고 믿는다고 해보자.
피터는 (N)이 거짓이라고 믿으므로 따라서 (S)에 동의(assent)하지 않을 것이다.

사례 2
스티븐은 모호한(vague) 용어의 경계선 사례(borderline cases)에 대한 문장은 진릿값을 갖지 않는다고 믿는다.
"Every F is a G"는 모든 x에 대해서 "if x is an F, then x is a G"가 참인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참이고,
이 조건문이 참이 되는 경우는 "x is an F"가 거짓이거나 "x is a G"가 참인 경우이며
거짓이 되는 경우는 "x is an F"가 참이고 "x is a G"가 거짓인 경우이다.
그런데 스티븐은 여우의 진화론적 조상 개체 중에 암컷인 것들은 "fox"라는 모호한 용어의 경계선 사례이자 동시에 "vixen"의 경계선 사례라고 믿는다.
따라서 각 조건문의 전후건을 구성하는 명제가 진릿값을 갖지 않으므로,
조건문 전체, 나아가 (S)는 진릿값을 갖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스티븐은 (S)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례에서 피터와 스티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론, 추론규칙, 배경 믿음과 다른 어떤 것을 적어도 하나 가진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vixen"과 "female fox"를 동의어로 간주한다. 이들에게 의미에 관한 몰이해가 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가 올바르게 구성되었다면 두 사람은 (S)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S)에 대해 (UA)는 성립하지 않는다.

"혹시 이들이 논리적 용어에 대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에 대해 윌리엄슨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이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공적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윌리엄슨은 잘못된 의미론이나 이상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반드시 언어적 능력의 결함의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위와 같은 문제는 추론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간단히 언급하면,
(1) 밴 맥기(Vann McGee)는 전건긍정식에 따른 추론이 타당하지 않은 사례를 논문에서 주장한 바 있다. 대략 사례만 놓고 보면 이렇다.

1980년 미국 선거에서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이 민주당 지미 카터를 확실히 누르고 당선되었고, 다른 공화당원인 존 앤더슨은 그보다 한참 못한 3등이었다. 이때, 다음 두 전제를 보자. "만일 공화당원이 선거에 이겼다면, 그리고 만일 당선자가 레이건이 아니라면 당선자는 앤더슨일 것이다. 그런데 공화당원이 선거에서 이겼다." 전건긍정식을 적용하면 "만일 당선자가 레이건이 아니라면 당선자는 앤더슨일 것이다"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맥기에 따르면 이 결론을 거부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

이 반례가 얼마나 성공적인 것과 별개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일 전건긍정식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건문 기호의 의미를 구성하는 규칙이라면 밴 맥기는 조건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2) 양진주의(dialetheism)은 선언적 삼단논법(disjunctive syllogism)을 올바른 추론형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단순조건문(p->q)는 선언(~p∨q)와 동치이고, 전건긍정식과 선언적 삼단논법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들도 조건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3) 사례 2의 스티븐과 약간 다르게 사이먼은 다음 규칙을 받아들인다.
-첫째, 연언지를 구성하는 두 명제 중 하나가 진릿값 미정(indefinite)이면 연언지 전체는 진릿값 미정이다.
-둘째, 참과 진릿값 미정은 발화에 적절한 의미값이지만 거짓은 그렇지 않다.
사이먼은 발화의 적절한 의미값을 갖는 명제에만 찬성한다. (사이먼에게 중요한 것은 거짓을 피하는 것이다)
사이먼은 연언지 제거 규칙(A&B // A)의 결론에 찬성하지 않을 수 있다. "A"가 거짓이고 "B"가 진릿값 미정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A&B"는 진릿값 미정으로, 사이먼은 찬성할 테지만 "A"는 거짓이기 때문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이스터에그 (세미나 때 얘기한 내용)
1> 사례 1의 피터는 피터 스트로슨의 전제(presupposition)에 대한 아이디어와 버트런드 러셀의 확정기술구 논의를 섞어 만든 캐릭터입니다. 스트로슨은 "Every vixen is a vixen"이라는 문장이 "There is at least one vixen"을 전제한다고 봤는데 사례 1의 피터는 이걸 러셀이 확정기술구가 존재명제를 함축하는 것처럼 함축하는 걸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2> 사례 2의 스티븐은 3치 논리 체계를 제시한 유명한 두 사람 중 하나인 스티븐 클리니(Stephen Kleene)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사례 2에서 스티븐이 받아들이는 건 strong kleene logic의 조건문 진리조건이고, 사례 3에서 사이먼이 받아들이는 건 weak kleene logic의 연언문 진리조건입니다. (교수님은 사례 3의 사이먼은 아마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일 것 같다고 짐작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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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주제에 대한 윌리엄슨과 보고시안 사이의 수십년간에 걸친 논쟁이 책으로 출간된 바 있는데 저 역시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Boghossian, Paul & Williamson, Timothy (2020). Debating the a Priori . Oxford, United Kingdom: Oxford University Press. Edited by Timothy Williamson.
이 책에서 위 사례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례들이 검토되는데요. 제가 칸트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분석성에 대한 보고시안의 옹호가 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ㅋㅋ

사이먼 사례에 대한 보고시안의 반박을 짧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위 책 83쪽).

  1. 첫째로 "진리값 미정인 명제에 찬성한다"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불분명하다. 즉 어떤 진리값-미정인 명제가 참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사태인가? P가 진리값-미정인 명제라면 (일상 속에서 경계선 사례에 대한 무수히 많은 명제들이 여기에 속한다), 사이먼은 P뿐만 아니라 -P 역시 찬성해야(혹은 참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찬성"이 무슨 짓거리인지가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2. 윌리엄슨은 사이먼이 연언 "&"에 대해서 우리와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보고시안이 보기에 이것이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사이먼은 "&"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입/제거 추론규칙과 다른 종류의 추론규칙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성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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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저도 그 책이 좀 궁금하긴 했는데 당시에는 제가 올린 이 챕터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 못할 때였던지라..

2번에 대해서 윌리엄슨이 뭐라고 답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ㅎㅎ 제가 본 저 챕터에서윌리엄슨은 특정 기호와 관련된 논리적 추론규칙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더라도 자연언어 "그리고"에 대한 이해가 일반적인 언어사용자들과 다르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강하게 확신하는 것 같았어요. 거기서도 혹시 의미 외재주의에 기반한 반론을 제시하는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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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슨의 직접적 반론은 책 챕터5에 나옵니다. 내용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대충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외재주의적 설명에 기대는 것 같았어요. 아마 The Philosophy of Philosophy 에 나온 내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사실 윌리엄슨과 보고시안이 철학적으로 상이한 전통과 입장에 서 있다보니, 솔직히 논쟁이 전개되면 될수록 상호간에 직접적인 반박이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누구의 입장이 해당 사태를 더 잘 설명하는가에 대한 경쟁(직관 싸움?)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윌리엄슨은 대체로 인식론적/의미론적 외재주의를 취하고 있고, 보고시안은 인식론적 내재주의와 (적어도 부분적으로) 추론주의적 의미론을 옹호하고 있죠.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반론이 후반으로 갈수록 겉도는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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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슨은 정말 난 사람 같습니다. 로컬한 논쟁들에서 자기 진지를 구축하면서 종국에는 그걸 큰 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전형적인 대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The Philosophy of Philosophy를 어릴 때(?) 잠깐 훑었던 것도 같은데, 그때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라고 생각을 못했네요. 한 번 정독해 봐야겠습니다. 소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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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래서 석사논문 쓸 당시에 윌리엄슨에 빠져서 팬심으로 책도 사서 읽고 했었습니다 ㅋㅋㅋ 지금 저 책으로 세미나를 하시는 교수님도, 크립키가 죽고 없는 시점에 M&E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철학자가 누구냐 하면 (약간 인정하긴 싫지만) 티모시 윌리엄슨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오리엔테이션 때 언급하시더라고요.

예전에는 인식론 때문에 관심이 생겼다면 요즘은 철학적 방법론 측면에서 윌리엄슨이 무슨 얘길하나에 더 끌리는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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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저가 이해한 바는 믿음에 근거한 추론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추론 근거로 둘 수가 있나요? 추론하기 전에 믿음을 사실로 확인하여 참거짓으로 해소해야 할 듯 한데.
굳이 논리학을 적용하려면 믿음이 참인 경우와 거짓인 경우를 나누어 각각 경우에 대해 답을 내리든지.
또 다른 방법은 베이지안 통계추론 방식을 처음부터 사용하든지.
믿음을 처리하도로 확장하려는 논리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형이상학의 헛소리를 몰아내기 위한 분석철학이 헛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댓글이 헛소리 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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