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신 바와 인용이 맥도웰이 의도하는 바에 부합한다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제가 쓴 단어긴 하지만 "보편성"이라는 단어가 오해를 유발하기 딱 좋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맥도웰의 글에서 "universal"이라는 단어를 거의 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보편성"의 어감이 마치 문화/역사와 무관하게 모든 주체들에게 선험적으로 전제된 믿음/지식들의 목록을 표상시키는 것 같아서요. 그러나 사실 맥도웰이 개념적 질서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이성적/자발적 사유가 위치하는 그러한 space of reasons가 "단일하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즉 spaces 가 아닌 one space라는 것이죠. 각기 주체들은 모두 이 space of reasons에 서서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심지어 상이한 논리적 체계들 역시 "우리"에 의해 이성적으로 분석/비교되는 한에서 모두 동일한 space of reasons에 놓인다고 할 수 있겠죠.
반대로, 문화/역사와 무관하게 모든 주체들이 동의해야 하는 보편적 믿음/지식들의 목록을 강조하는 이들은, 객관성이 주관성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실재론 및 소여의 신화에 빠져있다고 맥도웰이 비판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호네트의 비판은 여전히 (실천적 맥락에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그러한 "보편성"의 신화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들은 단일한 space of reasons가 있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단일한 목록의 믿음/지식들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맥도웰의 개념주의와 그의 다원주의는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단일한 space of reasons에서 주어진 (특히 실천적) 이유들이 다양한 삶의 형식과 결합가능하다는 주장으로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성급하게 이것을 상대주의라고 규정하는 거죠. 주체들이 다른 세계관들과 마주하는 해석의 과정 속에서 주체들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들이 확장되고 이를 통해 "보편에 이를 가능성"이 오히려 열리게 되는 것인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