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위기에 대한 유학의 역할에 대하여

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적 학문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든 유학은 사회적 위기와 마주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유학은 두 가지 위기를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혐오와 대립이 심화와 도덕적 방향성 상실이라는 범세계적인 위기가 있고 내부적으로는 대중들의 무관심과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이라는 의심에 의한 존립의 위기가 있다. 외부적인 위기는 어느 시대든 그 내용은 바뀌어왔어도 항상 존재해왔으나, 오랜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정통 이데올로기로서 자리매김 했었던 유학으로서 후자의 위기는 비교적 낯설고 위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이와 같은 존립의 위기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는 성리학이 태동하였던 송나라시기에 주희가 겪었던 정치적, 학문적 탄압을 잘 알고 있다. 주희의 학문은 정치권력과 비대칭적인 위치에 놓여있었으나, 결국 유학의 정통으로 청나라 멸망 이전까지, 적어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어떻게 이런 비대칭의 극복이 가능했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유학이 겪고 있는 내부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과 사회적 문제 등 외부적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서로 완전히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이다. 유학은 현대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어떤 구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때,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긴급한 문제 중 하나는, 이 세계 안에 “개소리”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해리 프랑크퍼트는 사실과 관련 없는, 즉 진실의 판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 개소리의 활발한 유통을 지적한다. 거짓말은 진실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이지만, 개소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진실과 관련 없이 그럴싸한 말을 던지는 것이다. 프랑크퍼트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거짓말보다 더 해로운 것이 바로 이 개소리이다. 거짓말은 적어도 남을 속이기 위해 진실을 감추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지만, 개소리는 진실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무엇이 진실인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될 때, 무엇보다 감정의 호소가 진실을 호도할 때, 우리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대한 토대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길 잃음은 21세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실제적인 위기이다. 성별, 인종, 국가, 세대, 이데올로기 간의 혐오가 만연하고, 각 집단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으며,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대들, 즉 사실에 대한 존중과 민주적 숙고들이 무시되고 있다.

이런 개소리들의 배양의 이면에는 합리성에 대한 회의, 그리고 도덕이란 본능적인 감정들의 상호작용에 불과하다는 데이비스 흄 이래로의 도덕 감정론의 전통이 깔려있다. 하버마스의 영향을 받은 조지프 히스 등의 새로운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가 다시 합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것만이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우리는 감정과 이성의 이분법이 아닌 제 3의 길을 유학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유학에서 감정은 도덕적 행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흄의 도덕 감정론과 달리, 유학에서의 감정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반영함으로써 선의 가능성을 고유하게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유학의 도덕적 시스템이 개인의 감정적 반응 위에만 정초되어있다고 할 수는 없다. 주희에 따르면, 유학은 감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성(意)의 역할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성은 서양에서의 이성과 달리 역사적인 것이다. 리쩌허우는 유학에서의 이성이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감정에 기반한 것으로서 삶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평상시의 수양을 통해 심적 토대를 마련해야만 이 이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이로써 유학은 감정과 이성 사이의 존재론적인 이분법을 극복함과 동시에,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발휘를 위한 공부의 역할을 역설한다. 즉, 근대 합리론과 달리, 도덕에 있어서의 감정의 역할은 여전히 긍정하면서도, 감정의 무절제를 통제할 이론적 장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유학으로의 회귀가 현대 사회의 문제들, 특히 도덕 감정론이 초래한 위기들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방안이 아닐 것이다. 전통적 유학으로 회귀는 유학이 그 역사 안에서 발전시켜왔던 전근대적 특징들에 대한 필연적인 긍정을 불러오고 이것은 이론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21세기 혐오와 대립이라는 감정적 충돌을 위기로서 겪고 있는 현대의 윤리학에게, 합리성도 도덕 감정론도 아닌 새로운 윤리체계가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은 유학에 어떠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우리는 유학이 제시하고 있는,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하게 발전시켜왔던, 인간 심성론에 주목함으로써 도덕 감정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이때 전통적인 이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학문들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존의 이해를 수정하여야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발전을 바탕으로, 사회에 만연한 개소리에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존의 도덕 감정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응은 합리성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감정에 대한 고려에 입각한 합리성의 활용의 형태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정 불변하는 형이상학적 기준으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적 토대와 함께 성장하는 이성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학은 스스로를 재규정해나가며 전반적으로 변화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 역설적으로, 유학은 외부에 놓여있는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존립의 위기라는 내부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혹시 성공적이라면, 그때에 천명과 도통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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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짧게 몇 가지 생각나는 바를 적습니다.

  1. 우선 문제 제기 측면에서 두 가지 문제를 구분되어야할 것 같습니다. 크게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를 '개소리의 난립'과 그로 인한 의견의 양극화를 제시하였고 -> 그 원인으로 두 가지 a) 합리성에 대한 회의와 b) 흄 방식의 도덕 감정론을 지목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저 두 문제를 구분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a) 합리성에 대한 회의는 b)에서 제시된 도덕의 문제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무엇이 모두가 동의하는 '진실' 혹은 참인지 알 수 없고, 그런 것도 없다는 일종의 인식론적 문제가 a)라면, b)는 그것과 구분되는 윤리적 문제로 보입니다. (일종에 왜 사람들이 윤리적이여야하나를 묻는? 그런 메타윤리학적 질문으로 일단 저에겐 보입니다.)

이 두 문제를 구분해야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라면 정치적 - 공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을 보통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정치적 합의가 엉망진창이 된 이유가 b)와 같은 잘못된 윤리적 문제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건 비약이 있어 보입니다.

  1. 유학에서 말하는 감정 - 이성 / 정 - 의의 구분 역시 쉽사리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유학의 '이성'을 i) 감정에 의해 구성되는 ii)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하셨는데,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감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감정이 어떤 동기이고, 이성은 이 동기를 수행하는 어떤 수단/도구라는 의미인가요? 그렇다면 이 견해는 흄의 견해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ii) 역사적이라는 말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 공부와 수양을 강조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저 역시 꽤 긍정적이지만, 이정도의 소략한 견해만으로는 저는 이 입장이 가진 단점만이 보여서, 비판적일 따름입니다. 수양을 강조하는 건 좋지만, 그 수양이 정확히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바꾸기에, 어떻게 인간이 변하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면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 철학이 가진 용어와 과학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는 오리엔탈리즘이자, 자아도취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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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많이 되는 코멘트입니다. 감사합니다!

  1. 저는 민주주의 내에서 그 구성원들의 인식론적 능력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체계 내의 구성원들이 결국 정치적 권력의 근원이면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별개로, 합리성에 대한 회의에 따라 감정 중심의 윤리학이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 영미윤리학의 한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조지프 히스의 분석대로 이런 윤리학의 대두가 현대의 진실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경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론적인 정당화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 중심의 윤리학을 전반적으로 반대하진 않더라도, 진실을 호도하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현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즉각적인 처방은 아니더라도 이론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진실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프랑크퍼트의 분석대로 문제라면, 이 지점은 인식론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가 겹치는 흥미로운 지점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진실을 신경쓰지 않도록 부추기는 이론이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가 볼 땐 합리성에 대한 회의와 제시되고 있는 윤리적 문제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2. 이에 대해서는 본문은 다소 수정하였습니다. 다만 여전히 자세히 설명하진 못했습니다.
    흄의 견해와 달리, 이성이 감정의 수단/도구라는 의도로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적지 못한 것과, 간략하게 적더라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 것은 저의 능력부족입니다.
    저는 리쩌허우의 설명과 주희 그리고 율곡의 정과 의의 관계에 대한 언급들을 기반으로, 성리학자들은 이성이 존재론적으로는 감정으로부터 발하지만, 그 기능으론 역으로 감정을 주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서양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흄의 차분한 숙고와 욕구의 관계가 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독창적인 유학의 사유라고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능력과 공부가 부족해 이번 본문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좀 더 발전시켜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역사적이라는 표현은 리쩌허우의 표현으로서, 고정적이지 않고 경험과 문화 등 여러 요소들에 의해 구축되어 나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 그리고 현대의 모든 윤리 문제가 반드시 인간 이해와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이해와 연관된 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 이해를 입구로해서 현실참여적인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1. 마지막 비판에는 완전히 동의합니다. 오리엔탈리즘과 자아도취로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다만 수양이 지향하는 구체적인 도덕적 내용은 아직 제 관심사가 아닌 듯합니다. 저는 유학이 지향하는 도덕적 지향점은 어느정도 변수로 남겨둘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학으로부터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심성에 대한 이해, 심성과 인식론적 능력과의 연결, 나아가 인식론적 능력과 도덕적 판단/행위의 연관 등 구조적 문제입니다. 물론 도덕적 내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는 있겠지만, 효제자나 예로 대표되는 구체적인 덕목과 행위규범들이 유학이 가지고 있는 심성-인식-윤리 구조를 이해하여, 제 나름의 윤리적 이해를 제시함에 있어 필수적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누스바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 이론을 이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존하거나 발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전개함에 있어 철저히 활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유학의 틀을 벗어나, 현대 윤리 담론과의 대화 안에서 잠정적으로 결정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답을 적고 나니, 제 생각의 부족함과 유치함만이 더 돋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배움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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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도 예전에 리쩌허우의 논어 해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유학에서 '감정'이 지닌 의의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더라고요.

(2)

저는 유학이 쾌/불쾌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양 도덕감정론에 비해 특징을 지닌다고 생각해요. 고대의 에피쿠로스부터 근대의 홉스와 스피노자를 거쳐 20세기 프로이트에게까지 이어지는 감정론에서는, 감정을 기본적으로 쾌/불쾌의 이분법으로 설명하더라고요. 그런데 맹자는 애초에 그런 식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측은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을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단초로 제시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게 '쾌'로도 환원되지 않고, '불쾌'로도 환원되지 않는 감정의 다양한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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