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계의 민주성에 대한 고찰

민주성은 본질적으로 상호견제라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는 권력의 집중을 막고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Charles de Secondat, Baron de Montesquieu)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에서 이를 명확히 표현하며 국가의 삼권분립 체계를 상호견제의 제도적 표현으로 제시했다. 그는 "권력이 권력을 억제하게 하라"는 원칙을 통해 입법, 행정, 사법의 분리를 주장하며, "모든 권력이 한 사람이나 한 기관에 집중되면 자유는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상호견제의 구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학술계는 과연 이러한 민주적 원칙을 따르는가?

학술계의 비민주성

학술계가 민주적인지에 대한 질문에 나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민주적 체계에서는 규칙이 제정되고, 구체화되며, 그에 따라 투명하게 실행되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학술계에서는 이러한 절차가 때로는 존재하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 분야는 적어도 경험적 근거를 통해 정당성을 보증하려는 노력을 보이며 투명성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실험 결과의 재현 가능성이나 피어 리뷰(peer review)와 같은 제도는 어느 정도 상호견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등 다른 학제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훨씬 모호하다. 연구의 주제 선정, 자금 배분, 출판 과정에서 권위와 네트워크가 개입하며, 이는 명확한 규칙이나 절차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학술계 내부의 권력 구조는 종종 불투명하고, 상호견제보다는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중적 차원에서 학술계의 비민주성 유지

그렇다면 학술계의 비민주성은 어떻게 대중적 차원에서 유지될 수 있었을까? 나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비민주적인 영역의 제한이다. 학술 담론은 주로 연구자라는 특정 집단 내에서 이루어진다. 비민주적인 절차나 원칙이 내부에서 기능하더라도, 그 영향이 외부로 확산되지 않는 구조적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일반 대중은 학술지 논문의 피어 리뷰 과정에서 발생하는 편파성이나 권력 다툼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학술계 내부의 비민주성은 전문가 집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제한되며, 대중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대중의 신뢰이다. 사람들은 연구자들이 제도적 규약 없이도 높은 윤리적 기준을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는 학술계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식의 권위자로서 쌓아온 이미지에서 비롯된다. 대중은 연구자들이 개인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추구하기보다는 진리 탐구라는 고귀한 목표를 위해 헌신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신뢰는 학술계가 비민주적 절차를 유지하더라도 외부의 비판을 받지 않는 방패막이로 작용해왔다.

학술계의 위기와 담론 권력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이유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학술계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만약 학술 담론이 내부의 비민주성을 외부로 확산시키거나,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경과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학술계는 단지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는 무소불위의 담론 권력 기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예를 들어, 최근 논란이 된 연구 자금의 정치적 편향성이나 특정 학문 분야에서의 이념적 경도성은 학술계가 중립성을 잃고 권력 투쟁의 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술계는 상호견제의 민주적 원칙을 회복하거나, 적어도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화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결론적으로, 학술계는 몽테스키외가 제시한 상호견제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 비민주성은 내부의 제한과 대중의 신뢰라는 두 기둥에 의해 유지되어 왔으나, 이 기둥이 흔들리면 학술계의 정당성과 권위는 근본적으로 도전받을 것이다. 학술계가 진정한 민주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권력의 투명한 분배와 상호견제의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이며, 이는 단순히 내부 개혁을 넘어 대중과의 새로운 신뢰 관계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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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계 안의 권력을 투명하게 분배할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담을 조금 덧붙이면, 리눅스 커널 개발자 커뮤니티 같은 소프트웨어 공학자 공동체도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로 운영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 안에서도 권력 획득 경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요. 기존의 '권력자'인 리누스 토르발스와 다른 리눅스 커널 부분 시스템 관리자들의 권력이 가장 커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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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bulhwi 님, 질문 감사합니다. 학술계 내 권력을 투명하게 분배할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보았는데, 저는 외부에서 규제책을 마련하는 것보다 학술장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 과잉 제도화되면 연구자들이 자발적으로 연구 주제를 찾고, 불확실한 가설들을 자유롭게 탐구할 동기 자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연구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창의성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과정인데, 피어 리뷰나 자금 배분에 지나친 규제와 투명성 요구가 붙으면 행정적 부담이 커지고, 연구자들이 '안전한' 주제나 가설에만 매달리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의사결정을 공개하고 외부 감시를 강화하면 연구자들이 제도적 승인을 받기 쉬운 프로젝트만 추구하게 될 테고, 혁신적인 시도는 줄어들 겁니다. 이런 상황은 학술계의 본래 목적인 지식 탐구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신뢰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학술계가 폐쇄적으로 운영되려면 연구자들 스스로 높은 윤리적 기준을 유지한다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죠. 문제는 그 신뢰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인데, 이를 제도로 일일이 잡아내려고 하다 보면 연구 자체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과도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차라리 내부의 자율성과 신뢰에 기반을 두고, 악용 사례가 드러날 때마다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학술계의 민주성을 완벽히 보장하는 제도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부작용이 더 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해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과도한 제도화와 대중화가 오히려 철학적 탐구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고 경고했죠. 스트라우스는 『자연권과 역사』(Natural Right and History)에서 철학이 대중적 요구나 정치적 질서에 종속될 때 그 본질을 잃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학술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과잉 제도화로 신뢰를 강제하기보다, 자율성을 지키는 폐쇄적 운영이 더 나은 길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통찰이 울림을 줍니다. 결국 고인물은 퍼지지 않게 하고, 너무나 맑은 물은 제도적 혼탁함에 희석되지 않게 하는 것이죠. 모아니면 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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