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벨러미, 『시민권』 - 5장

요즘 민주주의와 관련된 얘기가 나와서, 예전에 읽은 것들 몇 가지를 업로드해봅니다. 논의 진행에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벨러미는 수호자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로 다음을 제시한다: “정부가 추구해야만 하는 목적이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에 대한 ‘객관적’인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다(189).” 이로부터 벨러미는 “배를 운행하는 것과 관련된 세부적인 기술적 문제들은 선장이 담당한다고 하더라도, 배의 목적지를 제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승객들이다”라는 주장을 펼친다(Ibid.). 나는 근거로부터 이 주장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근거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합리적인 주장은 ‘배의 목적지를 제대로 정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은 없다’이다.

2.
위에서 비판한 지식과 정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벨러미의 입장이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판단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행위와 무관한 어떤 정치/제도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수한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한 특정 문제에 대한 해법이다. 즉, 정치적 토론과 논리적 주장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은 초월적 판단이 아니라 그 상황에 맞는 개별적 판단이다. 그리고 이 개별적 판단은 다양한 경험과 의견들 간의 비판적, 상호 반영적, 설득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객관성을 얻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의미에서 객관성은 초월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한 다양한 관점의 합산도 아니다.

3.
벨러미가 수호자주의를 비판하는 또다른 근거로는 다음이 제시된다: “판결문에 적힌 판사들의 논리는 당연히 법적인 한계 내에서 작성되는데,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해 제기된 도덕적이고 경험적인 문제들 전부에 대한 완전한 숙고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불편부당함에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192).” 나는 판사가 불편부당함을 보장하는 중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벨러미에 동의할 수 있지만, --물론 이에 대해서도 법 직권주의 옹호자는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 벨러미가 법에 대해 상당히 특이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적이고 경험적인 문제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과 확립된 규범이 육화된 것이 법이라는 대단히 상식적인 주장에 비추어봤을 때, “법과 법적인 것이 도덕적이고 경험적인 문제들 전부에 대한 완전한 숙고를 배제”한다는 주장에 누가 쉽사리 동의할 수 있을까(Ibid)?

4.
벨러미는 불편부당함이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위 인용문에서, 그리고 “두 대안들이 결여하고 있는 세 가지 특성이 확보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 셋째는 의견 충돌을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불편부당함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195). 하지만 불편부당함이 추구할 만한 것이라거나, 선이라거나, 따라야 할 도덕적 옳음(혹은 좋음)이라는 벨러미의 믿음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불편부당함이라는 이상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를 함축한다: (1) 그것은 개별 특수성을 떼어내 버릴 것을 요구한다 (2) 그것은 보편/특수, 공적/사적, 이성/감성을 구분하고, 뒤의 것들을 앞의 것들 보다 하등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벨러미 자신이 그렇게 현실성 얘기를 좋아하니 얘기하자면, (1)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못한다. 게다가 규범적으로도 추구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 집단의 개별·특수적인 관점들이 보편성을 주장하는 방식을 은폐하고 의사 결정 구조의 계급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2)은 현대의 철학자 대부분은 동의하지 못하는 정당화되지 못하는 주장일 뿐이다.

사실 나는 벨러미가 불편부당함을 왜 추구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전체적인 맥락 수준에서는 --오히려 불편부당함이라는 이상을 비판하는 자들처럼— 의사 결정에 관여하고 영향을 받는 모든 개별·특수적인 집단들에게 목소리와 표결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민주적 구조에서 상이한 관점을 가진 타인들과 상호 작용함에 따라 나타나는 공적 공정성(public fairness)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불편부당함이 아닌 공적 공정성을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불편부당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벨러미는 아직도 불편부당함이라는 근대의 신화적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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