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대속 개념에 대한 단상

"자기 자신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절대적 수동성으로 만들어진다."1

"이 같은 수동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당한 동일성에 대한 소외가 아닌 자신으로의 반복의 수동성, 이런 것이 타자에 대한 자아의 대속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2

"자신의 수동성 또는 수난 속에 있는 예외적 단일성은 모든 것에 대한 구속과 대속의 부단한 사건이며, [……] '존재와 다른' 사건인 것이다."3

(1) 레비나스의 후기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대속(substitution)'이다. 이 개념은 레비나스의 대표작 『존재와 다르게』의 핵심 부분인 제4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특별히, 철학을 전공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레비나스의 대속 개념에 주목한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 대속적 희생(penal substitutional sacrifice)'을 당했다고 믿는 신앙인들은 종종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대속 사건의 의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2) 그러나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대속'은 사실 철저하게 20세기 현상학 운동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굉장히 이론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후설의 '초월론적 자아'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대한 비판의 과정에서 등장한다. 즉, 후설과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향적 주체'에 대한 기술로부터 현상학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두 사람의 철학에서 대상의 의미는 '나'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규정된다. 가령, 음식은 내가 '먹기 위한 것'이고, 연필은 내가 '적기 위한 것'이고, 의자는 내가 '앉기 위한 것'이고, 그림은 내가 '보기 위한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의 지향적 의도에 따라 정의되고, 규정되고, 명명되고, 설계된다. 레비나스는 바로 현상학의 '지향성(intentionality)' 개념이 함의하고 있는 이러한 주체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담론를 제시하고자 한다.4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의식의 지향성은 분명히 단지 자발적인 의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발적 의도의 주도적이고 기동적인 형태를 유지한다. 소여는 그 안에서 자신의 설계를 인식하고 그 자신의 설계로 그것을 부여하는 사유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소여에 대해 자신의 지배를 행사한다. [……] 이런 식으로 의식의 ​대자성 ​은 존재가 그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왕국에 대해 행사하는 힘 자체이다. 그것은 자아와 같은 것이며, 자신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는 의식 바로 그 자체에 있다."5

(3) 레비나스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강조하는 주제가 바로 우리 삶의 '수동성'이다. 즉, 삶에는 우리가 계획하거나 단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수없이 많이 벌어진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수동적으로 '당해야만' 할 뿐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의식의 지향성을 능동적인 의미 부여의 힘으로 기술하고자 한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수동성'을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핵심 비판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현상학이 어떻게 삶의 수동성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자임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존재하는 의식 또는 완전한 자유인 의식 속에서 사로잡힘의 수동성이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까? 능동적 근원이 의식 속으로 떨어지지 않는 고통의 겪음이나 수난이 어떻게 의식 속에서 가능할까?"6

(4)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성립시키기 위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상정하였던 '나'라는 주체가 언제나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수동성에 대한 고려 없이는 '나'라는 주체가 결코 제대로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철학 전체가 강조하는 내용이다. 즉, '나'라는 주체는 어딘가에 고정된 형태로 단단한 실재성을 지닌 채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침입을 받고 있다.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내가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명명할 수도, 설계할 수도 없는 사건들에 의해 구성된다. 가령, 내가 아무리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나의 정체성 속에는 나의 부모가 미친 영향력이 언제나 스며 들어 있다. 내가 아무리 방구석 히키코모리로 지내고 싶다고 하더라도, 나의 생활 양식 속에는 내가 속한 사회와 문화의 배경이 언제나 반영되어 있다. '나'라는 주체는 이렇듯 나와 이질적인, 나와 다른, 나의 바깥에 놓인, '타자'의 침입을 통해 구성된다. 내가 의지적으로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에 상관 없이, 나는 언제나 타자가 일으키는 사건을 통해 비로소 '나'가 된다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사실(facticity)'이다.

(5)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책임', '기소', '박해'라는 개념들은 모두 이러한 현사실을 기술하기 위한 일종의 은유적 장치이다. 이 개념들은 우리가 실제로 타자에게 윤리적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거나, 잘못을 범하였다거나, 괴로움을 당한다거나,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 단지 타자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구조적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즉, '나'의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성립하지 않는한다는 점에서, 나는 언제나 타자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이다. '나'의 정체성은 타자가 벌인 사건에 반응하여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나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이다. 타자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나를 '기소'하는 자이다. 타자는 '나'의 정체성을 안정된 상태 속에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박해'하는 자이다.

(6) 이러한 기술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예시 중 하나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일 것이다. 실제로,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를 향한 운동을 아이의 출산에 비유한다. 즉,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모'라는 주체는 어딘가에 미리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 사람은 자신의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부모가 되어간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가르치면서, 사람은 자신이 아이를 통해 점점 부모로 형성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결국 '부모'라는 주체를 만드는 것은 부모의 타자인 '아이'이다. 사람은 자신의 아이에게 사로잡히고, 자신의 아이가 벌이는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아이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아이를 위해 고통당하는 과정에서 '부모'라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오직 자기 자신의 존재만을 향유하고 염려하는 일에 몰두하던 젊은 시절을 벗어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존재와 다르게(otherwise than being)'라고 표현하는 사건이다.

(7) '대속'이란 주체가 타자의 침입을 통해 형성되는 모습을 포괄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대속'이라는 개념을 결코 당위적인 의미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레비나스의 철학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대속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7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레비나스의 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대속적 삶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옹호하고 있지도 ​않다 ​.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대속'이란 단지 주체가 성립하는 방식을 현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용어일 뿐이다. '나'라는 주체의 정체성은 언제나 타자의 침입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나'는 언제나 타자가 벌이는 사건에 사로잡혀 있고, 반응하고 있고, 개입하고 있는 '대속적 주체'라는 것이다. 결국 레비나스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일종의 '대속'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우리가 실제로 누군가를 대신하는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아는 한 실체가 속성들을 지니는 것처럼, 또 실체가 자신의 변화 속에서 사건들로 지녔던 속성들을 지니는 것처럼 단지 자아가 지닐 수도 있을 소위 몇몇 도덕적인 성향들을 지닌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수동성 또는 수난 속에 있는 예외적인 단일성은 모든 것에 대한 구속과 대속의 부단한 사건이며, 존재에 있어서 자신에서 벗어남의 사건, 자신의 존재로부터 스스로를 비우는 사건,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무나 선험적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구속인 '존재와 다른' 사건인 것이다."8

(8) 말하자면, 레비나스는 '삶'이라는 게임의 구조를 그려내는 작업을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마치 누군가가 체스 게임을 설명하면서 "체스란 둘 이상의 참가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사람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체스'라는 게임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상대방'이라는 타자가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한 사람이 폰을 움직이면 다른 사람은 비숍을 움직여서 반응하는 과정에서 '체스'라는 게임이 전개된다는 기술처럼 말이다.9 여기에는 어떻게 해야 체스를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즉, 타자를 대하는 상황에서 고려해야 하는 실천적 지침이 무엇인지, 현실의 구체적 사안 속에서 우리가 타자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각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논의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단지, 게임의 조건, 구조, 규칙, 방식에 대한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이민자나, 장애인이나, 외국인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학이나 정치학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크게 실망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책 어디에서도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7) 실제로, 레비나스는 애초에 대속이 결코 의지적 선택의 행위가 아니라고 매우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타자를 위한 대속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 반대로, 이러한 식의 의지적 선택의 문제는 레비나스에게서 완전히 배제된다. 즉, 대속은 '해야하는가/하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선택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주체의 성립 과정에서 우리가 언제나 '하고 있는' 행위일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속죄로서의 ​자신은 능동성과 수동성 이편에 있다."10

"우리는 사로잡힘에서 어떤 자유로운 앙가쥬망 위에서 쉬지 못하는 책임을 구별해낸다. 존재 안으로 책임을 진입시키는 것은 오직 선택 없이 실행될 수 있을 뿐이다."11

"대속은 하나의 능동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으로 전환할 수 없는 하나의 수동성이며, 능동-수동 선택지의 이편에 있으며, 그들을 주제화하는 ​말해진 것 ​속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명사 ​또는 ​동사 ​와 같은 문법적 범주에 따를 수 없는 예외이다."12

"자신은 에고보다 더 오랜, 원리 이전에 있는 완전한 인질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속에서의 존재의 ​자신 ​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저 너머에 있는 자신의 종교성이다."13

" ​자아 ​는 타자들을 위해 속죄 '할 수 있는' 한 존재자가 아니다. 즉 자아는 비자발적인 본래적 속죄이다. 왜냐하면 마치 ​자아 ​의 일치와 단일성이 이미 타자의 무게를 책임지는 것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의지의 주도성에 선행하기 때문이다."14

(8) 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대속 개념이 다소 무력하다고 평가한다. 주체가 성립하는 과정을 기술하는 작업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대속적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삶'이라는 게임을 단순히 설명하는 작업에만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 게임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최선의 수'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대속'이라는 사건이 주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을 넘어서 참된 삶을 위한 최선의 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 내가 지향하는 작업 중 하나이다. 이러한 작업은, 굳이 구분하자면, 레비나스의 철학보다는 본회퍼의 신학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강령을 정당화하려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얼마 전에 이미 이러한 윤리적 강령을 옹호하는 논문을 투고하기는 했는데, 솔직히 심사자들이 내가 말하려는 논의의 철학적 맥락을 어마나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1. 엠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본질의 저편』, 김연숙·박한표 옮김, 인간사랑, 2010, 198쪽.
  2. Ibid., 217쪽.
  3. Ibid., 221쪽.
  4. 따라서 『존재와 다르게』의 제1장은 "지향성으로부터 느낌으로"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 전체는 명시적으로든지 암묵적으로든지 기존 현상학의 지향성 개념을 갱신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5. Ibid., 193쪽.
  6. Ibid., 193쪽.
  7. 오히려 이러한 주장은 레비나스보다는 본회퍼에게서 발견된다. '타자를 위한 존재(being-there-for-others)'라는 본회퍼의 개념은 그리스도인이 예수와 같은 대속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촉구하기 위해 제시된다.
  8. Ibid., 221쪽.
  9. 실제로, 바버는 이 점에서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게임(game of giving and asking for reasons)'이라는 상호주관적 모델로 언어적 실천을 해명하고자 하는 브랜덤의 추론주의가가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타자 철학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See M. Baber, The Intentional Spectrum and Intersubjectivity: Phenomenology and the Pittsburgh Neo-Hegelians, Athens: Ohio University Press, 2011, pp. 113-127.).
  10. Ibid., 220쪽.
  11. Ibid.
  12. Ibid., 221-222쪽.
  13. Ibid., 223쪽.
  14. Ibid.,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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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레비나스를 잘 모르긴 하지만 생각을 조금 적어봅니다. 레비나스는 유대교 신자이며 탈무드에 대한 연구서를 몇권 출판하기도 했죠. 레비나스는 유대교적 메시아니즘(기독교와 상당히 다른)의 맥락에서 메시아를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상정하고 타인을 위해 짐을 짊어지는 메시아의 상을 '나'의 참모습이라 본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컨텍스트에서 볼 때, 우리 개개인이 대속적 주체로 살아간다는 그의 주장과 그의 타자철학의 의미가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지는 않을까요.그래서 그의 '대속'개념이 단순히 주체의 구조에 대한 기슬에 머무는 것은 아닐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런 개개인의 '메시아적' 대속의 의미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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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가 유대교적 배경에서 철학을 전개한 것은 맞지만, 저는 그 유대교적 배경이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어떤 부분'에 영향을 주었는지가 구체적으로 지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비나스는 분명 구약성서와 탈무드에서 우리 삶에 벌어지는 타자적 사건들과 주체의 수동적 측면에 대한 영감을 받았죠. 이런 요소들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 문화의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대교 전통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다만, 그렇다고 레비나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19:18) 같은 구약성서의 구체적인 윤리 강령을 자기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아요. 오히려 레비나스는 여러 텍스트에서 자신이 이런 윤리 강령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거든요. 아래의 필립 네모와의 대담도 마찬가지고요.

네모 : 당신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경험이 바로 그것인 것 같다. 중립의 존재론 곧 윤리 없는 존재론인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그 경험을 바탕으로 넘는 것 같다. 그러한 윤리경험을 바탕으로 당신은 어떤 특정한 규범을 만드는가? 왜냐하면 윤리란 규범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규범들을 만들어야 하는가?

레비나스 : 내 일은 어떤 특정한 윤리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윤리가 무엇인지 그 뜻을 찾으려 했을 뿐이다. 철학이 늘 체계를 따라야 하는 법은 없다고 본다. 누구보다도 훗설이 그런 것을 해보려 했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바탕으로 무슨 윤리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116쪽.)

여기서 레비나스가 '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무엇인지 그 뜻을 찾으려는 것'을 자기 철학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해요. 그러니까,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사건들을(주체가 타자에게 사로잡히고, 종속되고, 박해받고, 몰두하게 되는 모든 '대속'의 사건들을) 현상학적으로 충실하게 기술해서 보여주려는 것이지, "너는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윤리 강령을 주장하려 하지는 않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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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레비나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인용해주신 <윤리와 무한>도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철저히 알지 못하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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