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철학
YOUN님의 ⌜레비나스의 대속 개념에 대한 단상⌟을 읽다가, 체스의 예화를 보니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한 말이 문득 스쳤다.
"철학에서 논제들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에 관해서는 결코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128)
체스의 예화를 보니 인식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논제들은 철학적 논제로 수립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적어도 '체스'라는 단어를 '롤토체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체스란 둘 이상의 참가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다."라는 서술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논제로 보인다. 그리고 YOUN님께서 평가하신 것처럼, 이런 탐구는 무력하다.
나도 YOUN님처럼 '최선의 수'를 고민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최선의 수'는 보편타당한게 아니라 아주 특정한 맥락과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한 철학에서 벗어나 논제를 수립하려 한다면 '어떤 인식론' 혹은 '어떤 형이상학', 아니면 '어떤 실재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이제 '어떤 철학'이 되어야 하고, 되고 있다면 '어떤 철학'을 더이상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철학이 거대한 궁전을 지었지만, 그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철학이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보편타당한 진리를 발견하려는 철학자는 정말 존재할까?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어떤 철학자'들이 믿기 때문에, 그들은 우연하게 같은 곳에 서있다. 적어도 칸트가 만든 벽이 브레이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면, 더이상 '어떤 철학'이 영원한 사상의 평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점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사상의 평화를 불러올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이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력한 이해나 공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철학
얼마전 뉴스를 보니 "대체육"이라는 단어 사용에 대해 축산협회가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령, '대체육' 혹은 '비건육'에서 강조되는 부분은 '대체' 혹은 '비건'이다. 둘이 다름에도 당당히 종합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육'이 가진 위상을 대체육 관계자들이 열망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폭력적인 교사를 비판했던 역사는 지금의 교사를 온순하게 만들지만, 비판의 이유가 '교사의 회초리'를 가지고 싶었던 것으로 밝혀지는 건 꽤 충격적이다. 터무니없던 권위가 지금의 시대에 매력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우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집을 버릴 수 밖에 없다. 노이라트의 은유도 '어떤 철학'이 아닌 '철학' 앞에선 기만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선 사실은 '철학'안에서 '철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이 '어떤'철학일 수 밖에 없음을, 우리가 '어떤'이라는 수식어를 철학에서 더이상 때어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활동이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과거의 철학을 정리한 뒤에 우리가 "잠시 큰 꿈을 꾸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철학의 원대했던 이상을 마음에 그리고 철학에 뛰어드려는 사람들이 더이상 생겨나지 않게끔하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열심히 사니까, 각자의 노고에 공감하면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얼빠진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경쟁하는 상황에서 타인의 욕심을 공감하고 이해하는건 자발적인 도태일 뿐인데 말이다. (이기심을 긍정할때 도출되는 시스템은 자본주의와 비슷한 것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점점 몹쓸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