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 여러분께 여쭙는 글

안녕하세요, 얼마 전 철학에 입문한 고등학생입니다.

제가 본디 일본사를 미래의 전공으로 생각하고 공부하던 사람이라 철학의 기초에 많이 모자라서 배움을 얻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철학이 아주 대중적인 학문이 아니다보니 철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을 만나는 일이 흔치 않아 혼자만의 고민으로 고뇌하던 도중 여러분들을 만나 보물을 발견한 것 처럼 기쁩니다. 저는 아주 부족하지만 여러분들의 담론을 보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려고 합니다. 백지라는 것은 갈 길이 멀지만 그만큼 무한한 여백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니까요.

장황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제가 학부생 분들께 여쭙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활발히 제시되지 않는 이유
    제가 철학계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예단하는 것이 무척 경솔한 일이겠으나 제가 생각하기로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많이 논의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역사와 철학 간의 상호작용에 큰 관심을 두고 있어서 이 점이 매우 궁금합니다.
    진리관을 세운다는 것은 그 무게에 알맞는 괴로운 연구와 신중함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만, 국내에 오래 연구하신 걸출한 학자분들이 많으신데 왜 그렇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자신이 사고한 결과가 이미 존재하는 주장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연구 환경의 현실적 어려움 등 다른 이유인가요?

  2. 공동 연구나 논쟁이 적은 것 같은데, 왜 그런가요?
    학교 과제를 하면서 논문을 살펴보아야 하는 일이 잦은데, 확실히 공동 연구의 수가 적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문학 계열 전체가 개인 연구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철학은 다른 입장이나 다른 학문도 수용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서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박 겉핥기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특히 근현대 철학 거장들의 논쟁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최근 국내에서는 그러한 논쟁이 적은 것 같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견해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왜인지 궁금합니다.

  3. AI나 기계의 사용 윤리에 관한 주장을 한 철학자를를 알려주세요.
    제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나, 제가 알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학생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탐구도 이런 주제로 진행할 것이기 때문에, 전공자 찬스를 좀 쓰고 싶습니다.

  4. “이건 꼭 읽어보아야 한다!” 싶은 책을 몇 권 소개해주세요.
    (다만 제가 아직 부족한 고등학생임을 유의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로티, 푸코, 비트겐슈타인, 헤겔, 맑스, 니체와 사르트르의 사상에는 관심이 많아 미약하개나마 지식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이 이외에는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일부만 답변해 주셔도 저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되는 은혜입니다.
아주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철학전공자가 아니고 철학도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지만,
3번에 대해서는 나름 도움을 드릴수있을 것 같습니다.
몇달전에 과제를 하다가 본 논문이 나름 흥미로웠거든요.

인공지능과 ai에게 인격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인데요,
ai인격의 인정가능여부에 따라서 '이루다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사용해야 하는가?' '인공지능 개발자와 회사의 법적 권리를 어떤 근거로 보호할 것인가?' 등등 여러가지 썰을 풀수있는 거리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을 대충 요약하자면,(다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마크 쿠헬버그(mark coeckelbergh)라는 철학자는 'ai나 인공지능에 대하여 인격을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하여 인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에 대하여 '(도덕 속성) 실재론적 접근'을 사용합니다. 인격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수있는 특정 속성(ex:의식, 감정, 쾌락고통감수능력 등등) 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존재자라면 인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접근이죠.

하지만 쿠헬버그는 이러한 실재론적 접근은 1.인간의 복잡한 도덕적 관행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다
(예를 들어, 감정로봇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 로봇은 사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알려줘도 그 사람의 도덕적 실천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또 강아지나 고양이에 대해 상당한 도덕적 배려를 하는 사람들도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동일한 태도로 대우하지는 않구요)
2.인공지능이 인격과 관련된 속성을 실제로 가지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라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는 방법은 같은 발생적 기원이나 비슷한 겉모습과 행동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로봇은 인간과 전혀 다른 기원과 생김새를 가지고 있죠. 혹은 마음을 기능주의적으로 정의한다면, 로봇의 발달에 따라 로봇이 마음을 가질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구요)

따라서 어떤 존재자의 도덕적 지위는 (존재자 내부에 있는 어떤 도덕 속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과학이나 철학의 범주화에 앞서 우리의 삶의 양식 속에서 실천되는 일상적 경험을 통하여 구성(construct)되는 것으로, 이는 인간과 해당 대상 사이의 구체적 상호작용이나 관계 맺기의 토양 위에서 자라나는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미래에 ai의 발달로 우리 삶의 문화에 ai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커진다면, 그때는 충분히 ai에게 인격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해서 모르지만) 논문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인용도 많이 나오구요.

번역서도 있는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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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활발히 제시되지 않는 이유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크게 두 부분으로 할 수 있겠는데요, (1)

자신이 사고한 결과가 이미 존재하는 주장이기 때문

인 점과, 문제 자체가 틀렸다는, 즉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활발히 제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학 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도, groundbreaking한 논의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따라서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거나 수정, 보완, 또는 다른 분야로 확장하거나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현대에 와서 비교적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내놓아지는 것이 줄어들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정보 공유가 활발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 연구에 참여하게 되면서, 철학사는 정말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고, 당연히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많이 제시되고, 그 중 많은 것들이 knock-down argument을 만나 무너지고, 또 많은 것들이 수정되어 발전되었습니다.

왜 철학적 관점이 활발히 제시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느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새로운 관점들이 전통적인 이름 아래 분류된다는 점일 수도 있겠는데, 단순히 그렇다고 해서, 예를 들어 콰인의 실용주의가 퍼스와 듀이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맥도웰의 '경험주의'가 록크와 흄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는, 철학도 다른 학문처럼 역사가 쌓이고 성공적이거나 미심쩍은 논증이 누적되면서, 상당히 정교해지고 전문화되었다는 점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지와는 별개로, 적어도 교양 또는 학부 수준으로 공부하기에 (비교적) 많은 배경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파인의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제와 진리제조에 관한 다양한 이론, 러셀-콰인 전통의 존재론에서의 부정 존재자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발생하는지, 또 물론 일정 수준의 논리학적 배경 지식이 없다면 입문조차 쉽지 않기에, 학술계 밖에도 소개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활발히 제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1. 공동 연구나 논쟁이 적은 것 같은데, 왜 그런가요?

이 질문이, 예를 들어 공학 방면처럼 하나의 논문을 기본적으로 수 명에서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이 같이 쓰지 않느냐는 질문이라면, 연구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규모의 실험을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연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연구가 연구실 단위, 또는 적어도 팀 단위로 진행될 이유도 딱히 없으니까요.

만일 이 질문이 연구자 간 논쟁이 적은 것 같다는 질문이라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논쟁이 하나의 논문 안에서, 또는 한 권의 책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여러 편의 논문 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연구가 하나의 논문, 또는 하나의 책에 각각의 입장에서 소개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원하신다면 교과서나, companion, anthology와 같은 이름으로 편집되어 나온 책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논문만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대체로 다양한 견해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비판하거나 적용하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해 나간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철학계의 특성상, 너무나도 다양한 논의가 '철학'이라는 이름 하에서 진행되고 있고, 따라서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논의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의 사회철학에 관한 연구와, 이차원 의미론에 관한 연구 사이에 접점을 찾아서 공동 연구를 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으니까요 (간혹 그 전에 상관없다고 여겼던 것들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내서 큰 진전을 이루는 연구도 물론 나옵니다). 그러나 (모호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같은 주제의 논의로 분류되는 연구 사이에서는 정말로 많은 논쟁이 일어납니다.
연관된 또 다른 문제는, 연구자의 수가 철학의 범위에 비해서 좁다는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국내 학계에서 논쟁이 덜 일어나는 이유로 저는 이 원인을 꼽고 싶은데, 아무래도 철학 연구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비해, 각각의 연구자들의 관심이 닿을 수 있는 논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논쟁이 애초에 일어날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연구자들이 안타깝게도 그리 많지 않은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국내 학자들이 국내 연구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지적이 물론 있는데, 이는 이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파국과 미래 칼럼의 <서로 읽거나 인용하지 않는 논문들> 섹션을 참고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서강올빼미에도 관련된 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1. AI나 기계의 사용 윤리에 관한 주장을 한 철학자들을 알려주세요.

저는 그 방면은 전혀 몰라 답은 못 드릴 것 같지만, 어떤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궁금하다면 일단 닥치고 SEP에 검색해 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AI 윤리 관련해서도 항목이 있네요. Eth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 and Robot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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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해주신 내용만 보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꼭 시간 내서 읽어보겠습니다!

상세한 답변 정말 고맙습니다. 저의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몇 가지의 오류를 정정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해주신 SEP라는 사이트 또한 무척 유용합니다. 수리철학과 관련된 탐구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는데, 덕분에 관련 내용을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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