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에 나오는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의 이데아론에 대한 대화를 논증화 해봤습니다

<플라톤의 주장>

  1. 공통성의 원리: 서로 다른 여러가지가 A라면 그 까닭은 그들이 A의 이데아라는 한 가지 요소를 분유하거나 모방하기 때문이다.
  2. 분리의 원리: A의 이데아는 A인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3. 자기서술의 원리: A의 이데아는 A 그 자체다.
  4. 유일성의 원리: 오직 A의 이데아만이 진정으로, 참으로, 전적으로 A다.

<파르메니데스의 반론>

1.1. 공통성의 원리에서 분유한다는 것은, 특수한 A가 A의 이데아 중 '일부’를 공유한다는 뜻이거나, A의 이데아 '전체’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1.2.1 전자의 경우, 예를 들어 코끼리가 큼의 이데아 중 일부를 공유한다면, 코끼리는 큼의 이데아보다 작기 때문에, 동시에 작음의 이데아 중 일부도 공유하게 된다.
1.2.2. 코끼리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1.2.3. 어떤 것이 서로 모순되는 두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의 속성은 비교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코끼리는 생쥐에 비하면 크지만, 흰수염고래에 비하면 작다.
1.2.4. 코끼리의 크고 작음은 비교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1.2.2와 1.2.3으로부터) 그런데 비교대상과의 관계는 이데아 그 자체가 아니다. 즉, 코끼리의 큼은 큼의 이데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통성의 원리와 모순)

1.3. 후자의 경우, 예를 들어 코끼리가 큼의 이데아 중 전체를 공유한다면, 큼의 이데아는 모든 수많은 코끼리들에게로 흩어지게 된다. (분리의 원리나 유일성의 원리 등 이데아의 단일성과 관련된 원리들과 모순)

1.4. 공통성의 원리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거나, 분리의 원리나 유일성의 원리와 모순되므로, 이들 중 한 쪽을 철회해야 한다.

2.1.1. 공통성의 원리에 따르면, 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 등은 큼의 이데아로부터 자신들이 크다는 것을 이끌어낸다.
2.1.2. 자기서술의 원리에 따르면, 큼의 이데아는 큼 그 자체이기 때문에, 큼의 집합{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에 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큼의 집합은 {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 큼의 이데아}가 된다.

2.2.1. 다시 공통성의 원리에 따르면, 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 큼의 이데아 등은 큼의 이데아²로부터 자신들이 크다는 것을 이끌어낸다.
2.2.2 다시 자기서술의 원리에 따르면, 큼의 이데아²는 큼 그 자체이기 따문에, 큼의 집합{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 큼의 이데아}에 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큼의 집합은 {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 큼의 이데아, 큼의 이데아²}가 된다.

2.3. 공통성의 원리나 자기서술의 원리가 동시에 성립한다면, 이러한 과정이 무한퇴행되므로, 둘 중 하나는 철회해야 한다.

3.1.1. 노섭은 노예다.
3.1.2. 공통성의 원리에 따르면, 노섭은 노예의 이데아와 유사하기 때문에 노예다.

3.2.1. 포드는 노섭의 주인이다.
3.2.2. 공통성의 원리에 따르면, 포드는 주인의 이데아와 유사하기 때문에 주인이다.

3.3.1. 노예의 이데아는 주인의 이데아의 소유다.
3.3.2. 그런데 노섭은 포드의 소유다. (3.2.1 반복)
3.3.3. 하지만 노섭은 주인의 이데아의 소유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포드도 노예의 이데아의 주인이 아니다. 즉, 공통성의 원리가 성립해도,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와 현실적인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

<플라톤의 재반박>

  1. 본질적인 서술과 우연적인 서술을 구별해야한다. 만약 A임이 B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면, B는 본질적으로 A다. 만약 A임이 사실상 B이기는 하지만 A임이 B임의 일부는 아닐 경우, B는 우연적으로 A다. 예를 들어, 소나무는 본질적으로 나무지만, 우연적으로 푸르다.

5.1. 첫번째로, 큼의 이데아는 본질적으로 크지만, 코끼리는 우연적으로 크다. 따라서 큼의 이데아가 크다는 것과 코끼리가 크다는 것은 용법부터가 다르다. 즉, 분유는 이데아 중 '일부’를 공유한다는 뜻도 아니고, '전체’를 포함한다는 뜻도 아니다. 분유는 그 이데아와 같은 술어를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우연적으로 갖는다는 뜻이다.
5.2. 두번째도 마찬가지로, 큼의 이데아가 크다는 것과 코끼리가 크다는 것은 용법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큼의 이데아는 큼의 집합{코끼리, 흰수염고래, 배, 비행기}에 속할 수 없다.
5.3. 세번째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주인에 속함은 노예의 이데아의 일부지만, 현실적인 노섭과 포드의 ‘관계’ 그리고 노예의 이데아와 주인의 이데아의 '관계’는 본질적이 아니라 우연적이다.

  1. 따라서 이데아의 원리들을 철회할 필요가 없다.

<나의 평가>

플라톤의 재반박은 전반적으로 타당한 논증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두번째 재반박이다. 본질적인 큼의 이데아가 우연적인 큰 것들의 집합에 속할 수 없는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임은 우연적임보다 엄격한 속성인데, 더 엄격한 속성을 가진 것이 덜 엄격한 속성을 가진 것들의 집합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질적으로 모범적인, 더 엄격한) 모범생은 (우연적으로 모범적일 수 있는, 덜 엄격한) 재학생의 집합에 속한다. 이러한 나의 반론을 재반박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임과 우연적임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것을 보여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세번째 재반박의 지엽적인 부분이다. 본질적으로 주인에 속함이 노예의 이데아의 일부지만, 노예의 이데아와 주인의 이데아의 관계는 우연적이라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주인에 속함이 노예의 이데아의 일부라고 했을 때, '본질적으로 주인에 속함’이라는 말 자체가 주인과의 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은, 현실적인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이데아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예의 이데아가 본질적으로 '포드(현실적인 주인)'에 속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예의 이데아와 주인의 이데아의 관계는 본질적이지만, 노섭과 포드의 관계는 우연적이라고 재반박하는 편이 더 적절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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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김한글 : 네이버 블로그

글의 구성에 대한 가르침, 내용에 대한 가르침, 그 외 인생에서의 가르침 모두 환영입니다.

:crazy_face:

다른 글들에 댓글을 남기고 싶어도 아는게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네요 ㅠㅠ 논의에 참여하기 위해서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원 종합시험 이후로 꺼내보지 않기를 잘했네요. 다시 봐도 머리가 아픕니다. 그럼에도 세 번째 재반박에 대한 논평이 재미있어서 댓글을 답니다.

이 부분이 핵심인 것 같네요. 말씀하신대로 플라톤은 복잡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본질적 서술과 우연적 서술을 구분하여 전자를 이데아들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후자를 현실적 존재자들과 관련해서 사용했는데, 세 번째 반박에 대한 재반박 부분에선 노예의 이데아와 주인의 이데아의 “관계”를 우연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GEUL님은 이 “관계”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일관성이 있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리스 철학에서 실체의 기본 조건이 자기독립성이기 때문에 “관계”라는 속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제가 공부를 날림으로 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관계”를 본질적 속성으로 보게 되면 위에 언급하신 ‘분리의 원리’를 위배하게 되어 플라톤 논변의 일관성을 훼손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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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굉장히 잘 해주셨네요. 이해가 깔끔하게 됩니다. 저는, GEUL1993님이 비판하신 것처럼, 플라톤의 재반박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아요. 이데아와 같은 술어를 본질적으로 갖든 우연적으로 갖든 소위 '제3인 논증’을 피하기는 힘들다고 보거든요. 본질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술어가 일치하는 대상들은 하나의 집합 아래에 묶일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플라톤처럼 큼의 이데아는 큼의 집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일종의 '유형 이론’을 받아들여 이데아가 속하는 집합과 개별자가 속하는 집합이 구별된다는 가정을 해야 하는데, 이런 가정은 단순히 제3인 논증을 회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도입될 뿐인 것으로 보여요. 굳이 이 가정을 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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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노예의 이데아와 주인의 이데아의 관계는 본질적이지만, 노섭과 포드의 관계는 우연적이라고 재반박하는 편이 더 적절해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을 덧붙이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따르면 구분을 하나 해야 되는데요. 노섭과 포드의 주종관계가 우연적이라고 할 때는, 하필 이 사람이 하필 저 사람과 주종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는 우연적이지만, 주인의 정의에 종이 포함되고 종의 정의에 주인이 포함된다는 점에서는 주종관계로서의 노섭과 포드의 관계는 본질적입니다. 노섭이 종이라면 누가 됐든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하고 포드가 주인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섭이 종의 이데아와 유사해서 종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갖는 한에서 그 자신 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진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노섭은 종이다’는 어느 정도 참이 아니라 그냥 참이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노섭과 포드는 주종관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노섭과 포드는 필연적으로 주종관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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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늦은 댓글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유형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3인 논증을 회피할 수 있게 하는 논리학적 장점이 있지만 플라톤이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과 이데아 사이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이 현실에서 소수의 철학자를 통해 이데아를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본질적인 성질인 이데아와 우연적인 성격인 현실계를 완벽히 분리해서 생각하면 무의미 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철학적 논증이 왜 중요힌지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플라톤의 재반박에 대한 비판글에 동감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