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가사가 '헤어졌으나'로 알고있었는데요. 어느날 같이 공부하는 형한테
"헤어졌다니, 이거 완전 급진신학적인 찬양 아니에요?" 했다가
"그거 '해어졌으나'야"라는 말에 시무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쩌다 석사 논문의 주제랑 연관될 거 같아 블로그에 혼자 끄적인 글을 올려봅니다. 아무튼 헤어졌으나로 믿고 살려고요.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새찬송가 199장 찬양의 가사는 어린시절 어머니가 성경말씀을 들려주시는 기억을 되짚으면서, 그 말씀이 지금 자신에게도 얼머나 귀하고 의미있는지 고백하는 가사다. 화자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고하면서 어린아이인 자신에게 어머니가 성경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을 기억한다. 그 때 들었던 이야기, 곧 다니엘의 용맹스럽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던 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눈물 흘리던 일들... 화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사랑하고, 귀하다고 고백한다. 화자는 자신이 성서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제 성경이 다 해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찬양의 가사대로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게 좋겠지만, 나는 이 찬양에서 말하는 "해어짐"을 "헤어짐"으로 바꿔 여기서부터 이 찬양을 급진신학(Radical Theology)적이고 포스트모던적으로 이해하는 장난을 쳐보고자 한다.
1. 비록 헤어졌으나
먼저 성서와 헤어졌다는 것의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화자는 어린시절에 어머니가 말씀해주시던 세계 안에서 살아가던 아이였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역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성년이 된다. 이제 성년이 된 화자는 더 이상 "엘리야가 바람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일"과 같은 성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화자는 성서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성년이 된 인간(세상)이라는 표현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용어에서 빌려온 것으로,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여 더 이상 인간의 부족한 이성을 보충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작업가설(Arbeitshypothese)서의 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의미한다. 그 동안 신을 통해 이해해오던 많은 것들이 이제 인간의 힘 스스로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는 자각에서부터 인간은 성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헤어짐'의 선언은 탈-종교, 무신론, 세속화 등의 용어로 환원되어 이해되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찬양의 가사로 돌아가보자.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화자는 "비록 헤어졌으나" 여전히 성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성서가 소중한 이유는 실제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는지 여부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한 음성과 무릎 위 안겨서 느껴지던 온기, 그리고 엘리야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용맹함과 끈기가 바로 성년이된 지금까지도 소중하고 사랑할만한 대상인 셈이다. 물론 이 작업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벗겨내어 보다 실존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떠올리게 하지만 나는 본회퍼가 지적한대로 불트만이 너무 덜 나갔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단지 신화적 개념을 종교적 개념과 분리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 둘 모두를 함께 "비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할 수 있어야"(1) (2)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서를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여전히 그것을 "귀하고 귀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단지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추억 때문에 귀한 것 이외에도 말이다. 바꿔 말하면 본회퍼의 용어대로 그것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한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2. 예수 세상계실 때
본회퍼가 마지막으로 고민한 위의 질문은 아쉽게도 그의 처형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미처 완성하지 못한 아이디어는 이후 후학들에게 넘어가 몇몇 사조를 이끌기도 했다.3 그러나 나는 여기서 조금 의외의 인물인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안니 바티모(Gianni Vattimo)를 끌고오고자 한다. 앞서 급진신학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대표적인 급진신학자 존 카푸토와 공동 연구를 진행했을 뿐 바티모 자체를 급진 신학자라고 분류하는 경우는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티모의 사유는 분명히 급진 신학적인 사유와 닿아있으며 충분히 그렇게 분류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히 본회퍼가 급진 신학적 아이디어의 선구자라고 보기 때문에 본회퍼와 바티모 사이에 충분한 친연성이 있으며, 더 나아가 바티모가 말하는 "세속화된 그리스도교(secularized christianity)"가 본회퍼가 구상한 비종교적 그리스도교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구체적으로 다 다룰 수는 없기에 이후 논문 -(사실 하나 썼는데 떨어졌다)- 에서 확장할 것이다.
아무튼 바티모는 해석학자로서 니체를 인용하며 모든 진리가 해석에 불과하다는 급진적인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재밌는 지점은 바티모에게 이런 주장이 무척 급진적이거나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부터 기인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에서부터 벌써 해석학적이었고, 18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는 "생산적 해석"(4) 은 유대-그리스도교의 공헌으로 가능했다. 바티모는 성서 전통 내에서부터 벌써 해석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여러 예시를 제안하는데, 그 중 가장 인상깊은 예시는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오래된 예언자와 구약성서의 증언을 끊임없이 해석하며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살아있는 해석(living interpratation) 자체이다. 이 예시에서 바티모가 추구하는 해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해석은 단지 고정된 문자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삶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내지는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해석되어지는 과정이자 사건이다. 예수는 오래된 예언의 충실한 해석자였다. 그것은 이사야가 의도한 객관적인 의미를 파악해서 그대로 살아냈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살아움직이며 생동하는 해석 자체로서 그렇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한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예수가 세상에서 죽임 당한 일은 이미 2천년 전에 지나간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어머니에게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게 현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고 죽기까지 사랑하심의 역사役事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과거 텍스트와의 대화에서 오늘날 어머니의 삶에 직결되는 궁극적인 사랑과 구원을 해석(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화자에게 역시 인상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화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어머니의 눈물과 연결지으면서 또 다시 자신의 해석의 과정을 작동시킨다. 그렇게 이야기와 해석은 끊임없이 변형하면서 살아 움직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이 '감동'은 바티모가 이러한 자유로운 해석의 과정이 성령의 활동이라고 언급했다는 점과 같이 생각해볼수도 있겠다. (우리는 자유롭게 성서와 대화하며 해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되는 것은 아닐까? )
-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그렇다면 바티모가 말하는 것이 단지 모든 것은 해석이고 상대적이기에 어떤 것도 말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인가? '자유로운' 해석의 과정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물론 바티모는 '모든 강한 진리가 약화되어가는 과정'으로 허무주의의 도래를 긍정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세속화"되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아무말이나 괜찮다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바티모는 하이데거의 사유로부터 우리의 해석이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역사와 전통과 맥락으로부터 끊임없이 응답할 것을 요구받고 그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해석적 공동체 내에서 언제나 더 나은 대답 - 곧 해석을 위해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오늘 우리게 가장 나은 응답을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바티모는 이런 해석 과정이 어떠한 기준도 없이 이뤄지는 난상토론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유일하게 '세속화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메세지, 바로 사랑(charity)은 해석적 공동체를 이끌어주는 기준으로서 작용한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전통 - (성서, 예전, 교리 등)과 창조적으로 대화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또 해석할 것을 요청하는 역사를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해석하며 또 실천해나가는 자로 부름 받는다. 이렇게 강요와 억압, 독단성과 오만으로 점철된 형이상학적 진리 주장을 벗어나, 독단을 허무는 해방, 강함을 무너트리는 약함, 소외되어있는 목소리를 일깨우는 사랑의 실천으로 새로운, 그러나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신앙의 언어는 회복된다.
결국 성서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모든 예전와 전통과 신학과 신앙이 '어떻게 주의 뜻대로 살아가느냐'하는 해석의 문제다. 그리고 너무나 명확하게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의 해석에 따르면) 주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사랑할 것으로 귀결된다. 화자는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전히 "비록 헤어진" 상태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구성하고 삶의 많은 기억을 형성해낸 성경의 내러티브는 화자가 삶을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영향을 미치며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해석으로 그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 비록 성경 말씀의 문자를 직접 읽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체화된 말씀 - 혹은 화자의 삶으로 성육한 말씀은 (바티모의 표현에 따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도록 이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은 귀하고 귀하다. 심지어, 헤어진 자들이나, 만나지도 않은 자들에게까지도, 거칠게 표현하자면 모두에게 성서의 말씀은 귀하고 귀해질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이해할 때 디트리히 본회퍼가 구상한 것처럼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비-종교적으로, 그러나 신앙의 언어를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생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김순현 옮김 (서울: 복있는사람, 2016), 256.
(2) 본회퍼는 비종교적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면서 전적으로 '비종교적인 새로운 형태의 그리스도교'를 그 답변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구상한 비종교적 그리스도교(Nonreligious Christianity)는 더 이상 이전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진리를 고수하거나 또는 아예 주관성으로 빠져버리는 실수를 반복하는 기독교가 아니었다. 이 두가지 선택 모두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 두가지 선택을 강요하는 근대 인식론적 도식을 거부한다는 것을 뜻했다. 즉, 한쪽으로는 객관, 보편, 과학의 시험을 그리스도교 신앙이 통과해야한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한쪽으로는 이 시험의 요청에 응하지 않기 위해 단지 주관적인 영역에 머물러야한다는 주장으로 대략 16-18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조를 거부해야한다는 것이다.(시대 논쟁을 할 생각은 없다. 대략적이다.) 이는 본래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치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자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회퍼의 진짜 의도는 역설적으로 '신앙의 언어가 부활하는 것'에 대한 사유에 있었다. 이는 "아마도 전적으로 비종교적일" "예수님께서 쓰셨던 언어처럼 해방과 구원의 힘을 가진 새로운 언어" 로서 신앙의 회복이다.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내는 그리스도교, 그러나 그것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과 유익을 주면서 관여"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그리스도교였다.
(3) 대표적으로 이른바 6-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사신死神신학(Death of God Theology)자들, 곧 하비 콕스, 알타이저나 해밀턴같은 사람들은 본회퍼에게 깊게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에서 종교를 제거하고 그 의미를 살려보려는 대담한 시도를 펼친다. 다만, 각각은 그 나름의 시도를 통해 돌파구를 발견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충분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알타이저는 헤겔을 차용하여 변증법적 과정에서 신의 죽음으로 인간과 합일되는 도식을 만들어냈으나 여전히 근대적이고 인식론적 사고구조에 갇혀있는 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이후 존 카푸토나 리처드 커니와 같은 종교철학자들이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또 제임스 스미스와 같은 학자는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주장하며 앞서 문제가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인식론적 전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다만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사람이 바티모기에 깊게 다루지는 않겠다.
(4) Gianni Vattimo, After Christian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 63. 텍스트 내에 감춰져있는 고정된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넘어서 필자보다 글을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창조적 해석 과정이다. 이제 텍스트에 고정불변하는 의미가 감춰져있고 해석자는 이를 충실히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