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AI·데이터법정책학과에서 브랜덤의 추론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였습니다. <AI·데이터법정책연구>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른 분들이 돌아가면서 강의를 맡았는데, 11주차(마지막 주) 강의를 제가 담당하게 되었네요. "규범은 사실로 환원될 수 있는가?: 로버트 브랜덤의 추론주의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20세기 언어철학의 흐름과 로버트 브랜덤의 추론주의가 지닌 의의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왔습니다.
규범은 사실로 환원될 수 있는가?: 로버트 브랜덤의 추론주의를 중심으로(1)
https://blog.naver.com/1019milk/223659517040
규범은 사실로 환원될 수 있는가?: 로버트 브랜덤의 추론주의를 중심으로(2)
https://blog.naver.com/1019milk/223659518303
정말 우연한 계기로 이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네요. 2021년에 제가 후배 대학원생 한 명과 함께 로버트 브랜덤의 Making It Explicit 제1장을 한 학기동안 다루는 세미나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 주 6쪽 정도 책을 읽어나가면서, 제가 내용을 발제하고 참여하신 분들과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세미나였습니다. 지금도 그 세미나 영상이 제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어요.
그런데 이 세미나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정영진 교수님이 참여하고 계셨던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어 놀랐네요. 몇 주 전에 정영진 교수님께서 제게 연락을 주셔서, 제 세미나 내용을 인상적으로 들었다고 말씀하시며, 브랜덤의 추론주의에 대해 특강을 진행해 달라고 요청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사실'과 '규범'의 관계에 대한 브랜덤의 논의를 중심으로 추론주의에 대해 개략적인 소개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시면서, 만약 가능하다면, 브랜덤의 논의가 법학이나 AI 기술 분야에서 응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다루어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철학의 이론적인 논의들을 실천적인 주제들에 적용할 때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과 사람들이 흔히 관심을 가지는 사안 사이에 갭이 큰 경우가 많아서요. 하지만 이번 강의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충분히 제가 가진 제한된 지식으로도 꽤나 유의미한 논의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사실', '규범', '규칙'은 브랜덤의 추론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들일 뿐더러, 더 나아가 브랜덤은 실제로도 AI 기능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논문인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nalytic Pragmatism"를 쓰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법철학을 다룬 글들에서도 브랜덤이 종종 인용되는 것을 보기도 하였고요.
게다가 브랜덤의 추론주의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강의라 준비하는 데 그다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동안 유사한 내용들을 대학원생 세미나나 논문 등에서 이미 여러 번 다룬 적이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30쪽 분량의 꽤 긴 강의 원고를 쓰는데 3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 학위논문 한 단락을 쓰는 데 하루 종일이 걸리는 데 비해 엄청나게 빨리 쓴 것이죠.)
강의가 중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이라 처음에는 걱정도 조금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언어 장벽을 넘기 어렵다 보니, 수업 조교님이 제 강의 원고를 번역하신 다음, 실제 강의에서는 제가 내용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원고를 그대로 읽는 다소 무미건조한 강의가 되지 않을까 했죠.
그런데 막상 강의실에 도착해서 보니,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더라고요. 자동 번역 시스템도 잘 구비되어 있었던 데다, 조교님이 중간중간마다 통역을 정말 잘 해 주셔서, 평소에 말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큰 장애 없이 강의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어로 번역된 원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학생분들이 읽고 나면, 제가 그에 대한 세부 설명을 한국어로 덧붙이고, 그러면 조교님이 다시 내용을 통역해 주시는 방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분들도 제 기대 이상으로 정말 열심히 참여해 주셔서, 저도 괜히 신났습니다.
정영진 교수님께서도 내용에 굉장히 몰입해 주셔서 더욱 감사했네요. 강의가 끝난 후에도 거의 2시간동안 브랜덤의 추론주의에 대해 평소 궁금하셨던 내용들을 저에게 질문해 주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아직 박사 학위도 정식으로 따지 못한 학생일 뿐인데도, 교수님께서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저를 대해 주시니 정말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교수님 덕분에, 철학과 대학원에서조차 자주 하지 못하는 브랜덤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여하튼 저에게는 이번 강의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브랜덤의 철학을 법철학과 AI 기술에 대한 논의에 적용시켜 본 것도 처음이었고, 철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에서 강의를 한 것도 처음이었고, 통역을 통해 강의를 한 것도 처음이었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저도 철학적 고민의 지평을 한결 확장할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하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