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그래, 그래, 아멘
―미래에 대해서, 세계의 약속에 대해서,
세계에 대한 끝없는 해석 가능성과 재해석 가능성에 대해서.”
(Caputo, 2020: 310)
존 카푸토(J. Caputo)의 『포스트모던 해석학』은 하이데거로부터 바티모와 로티에 이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를 바탕으로 철학적 해석학이 법, 보건의료, 정보기술, 종교의 영역에서 지닐 수 있는 의의를 이야기한다. 특별히, 그의 책은 대단히 독창적이게도 철학적 해석학에서 제시된 논의들이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들은 ‘신’이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삶에 언제나 숨어 있는 희망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고는 먼저 철학적 해석학이 어떠한 과정에서 발전하였고 어떠한 분야에 적용되는지에 대한 카푸토의 설명을 요약할 것이다(Ⅰ). 다음으로, 철학적 해석학이 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카푸토의 관점을 소개할 것이다(Ⅱ). 마지막으로,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 ‘신’이라는 상징을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종교에 대한 재해석으로서 얼마나 설득력을 지니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Ⅲ).
Ⅰ. 하이데거에게서 바티모와 로티에게로
카푸토는 오늘날 철학적 해석학이 강조하는 요점을 “해석은 끝까지 간다(Interpretation goes all the way down).”(Caputo, 2020: 13)1라는 논제로 표현한다. 철학적 해석학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든 시선이 언제나 해석에 매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는 어디까지가 ‘해석’이고 어디부터가 ‘사실’인지를 명확하게 나눌 수가 없다. 우리가 수행하는 해석들을 아무리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의 끝에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제시되는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이다. 하이데거에게서 바티모와 로티에 이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는 바로 이러한 해석의 편재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해석이 현존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라고 강조하였고, 가다머(H. G. Gadamer)는 해석에 대해 중립적인 ‘방법’ 따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비판하였으며, 데리다(J. Derrida)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해석이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였고, 바티모(G. Vattimo)와 로티(R. Rorty)는 윤리, 정치, 종교 등 우리 삶의 구체적인 사안들에 해석의 편재성에 대한 통찰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
하이데거와 가다머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논제를 받아들여 우리 자신과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성찰하고자 하는 입장은 ‘약한 사유(weak thinking)’2라고 일컬어진다. 약한 사유는 실재의 본성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거대 서사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던 서양 형이상학의 ‘강한 사유(strong thinking)’와 대비된다.3 문화와 제도를 정당화하였던 지난 세기의 이데올로기들이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의 삶의 다양한 영역들을 ‘해석’이라는 측면으로부터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약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카푸토는 법, 보건의료, 정보기술의 영역에서 철학적 해석학이 줄 수 있는 새로운 관점에 주목한다. 가령, 철학적 해석학은 정의가 성문법적 규정 속에 갇히지 않는 이념으로서 언제나 법 너머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간호 행위가 단순히 미리 정해진 의료 프로그램에 따라 환자를 관리하는 활동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자신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인간의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조건과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정보체계를 성립시키려는 시도가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어떠한 성문법적 규정도, 의료 프로그램도, 정보체계도 해석을 종결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결코 특정한 규정, 프로그램, 체계를 절대화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카푸토의 이러한 설명은 ‘이론’의 측면에서나 ‘실천’의 측면에서나 매우 흥미롭다. 즉, ‘이론’의 측면에서, 국내외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철학적 해석학 관련 개론서들은 19세기의 슐라이어마허에게서 20세기 중반의 가다머와 리쾨르에 이르는 매우 고전적인 이론만을 언급할 뿐이다. 카푸토의 책처럼 철학적 해석학의 역사를 가장 최신의 이론까지 포괄하여 다루고 있는 글을 찾기란 힘들다. 바티모와 로티 등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을 지배하고 있는 논의까지도 철학적 해석학의 역사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카푸토의 책은 가다머와 리쾨르 이후에 전개된 사유의 방향을 살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유익하다. 또한, ‘실천’의 측면에서, 철학적 해석학 관련 전문 논문들이나 연구서들조차 아카데믹한 철학을 벗어난 실천의 맥락에 자신들의 논의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4 카푸토의 책처럼 철학적 해석학의 통찰을 다양한 영역에 적용시켜 설명하고 있는 글을 찾기란 힘들다.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논제로부터 제시된 약한 사유가 어떻게 법, 보건의료, 정보기술의 영역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카푸토의 책은 철학적 해석학의 실천적 용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Ⅱ. 바티모와 로티에게서 신에게로
법, 보건의료, 정보기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적 해석학의 적용은 단순히 잡다한 방법이나 이론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적 해석학은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논제를 끝까지 유지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내재된 가장 근본적인 역설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판결을 집행할 수밖에 없고,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주기 위해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 지능을 정보체계의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법도 정의에 대한 완결된 규정이 될 수 없고, 어떠한 상담 프로그램도 삶의 의미를 완전히 해명하지 못하며, 어떠한 정보체계도 인간 지능을 알고리듬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해석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란 대단히 까다롭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해석의 연속인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해석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우리의 해석을 보증하는 궁극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해석을 해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티와 바티모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해석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일종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possibility of the impossible)’을 지향하고 있다. 정의든지, 삶의 의미든지, 인간 지능에 대한 알고리듬이든지,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들이란 결코 특정한 해석 속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어떠한 해석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편안한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해석이란 매 순간 새롭게 수행되는 모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해석의 모험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희망을 위한 여지를 드러낸다. (a) 우리가 현재 수행한 해석들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b) 그 해석들이 미래에 극복될 가능성이 언제나 남아 있다는 사실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해석을 초월한 진리란 주어진 현재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도래할 미래에 대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카푸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삶은 기호 독해와 해석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해석의 모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해석학은 약속/위협 앞에서 사실상 희망의 해석학이다. (Caputo, 2020: 266)
카푸토는 바로 이러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종교들을 통해 ‘신’이라는 상징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에 대한 고백이 우리의 삶에 숨어 있는 희망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어떠한 이론이나, 체계나, 방법이나, 기술도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장악할 수는 없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현실의 질서조차 도래할 미래에는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는 해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철학적 해석학은 우리의 삶에 언제나 내재해 있는 해체의 지점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들은 도래할 미래에 대한 희망의 가능성이 우리의 삶에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의 왕국’이나 ‘좋은 소식(복음)’이라고 표현한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 해석학과 ‘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두 가지 용어는 서로 표현은 다르더라도 같은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다만, 여기서 ‘신’이란 초자연적 세계에 거주하는 전능자가 아니다. 오히려 신을 전능자의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은 낡은 고대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신화적’이고, 무한한 신을 유한한 존재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적’이다. 신화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신의 이미지가 걷어내어질 때에야 비로소 종교들이 말하고 있는 ‘신’이 철학적 해석학이 강조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카푸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서두에서 말했던 해석학적 실수는 이것이다. 기독교의 계시가 계시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자들과 거주할 다른 세계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구체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 계시는―신화적이고 반쯤 신성모독적인 입장에서처럼―시공 밖에서 하늘로부터 온, 세계에 관한 초자연적 간섭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세계에 관한 계시는 인류에게 비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종종 전령인 천사의 도움을 받아―죽을 자들이 결코 자체적으로 알아낼 수 없었던 신비를 여는 열쇠를 전달하는 초행위자(Superagent)의 행위로 생각되지 않는다. 대신에 계시는 삶의 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요구되는, 존재에로의 길로 침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Caputo, 2020: 294)
따라서 카푸토의 책은 놀랍게도 철학적 해석학을 전제로 삼아 신학적 해석학을 결론으로 도출한다. 하이데거로부터 바티모와 로티에게 이르는 철학적 해석학의 ‘이론적’ 논의들은, 단순히 법, 보건의료, 정보기술의 영역에 ‘실천적’ 방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삶에 대해 ‘신학적’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신화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신의 이미지가 제거된 상황에서는 철학과 신학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종교인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현실의 권력과 폭압에 대해 저항할 때, 그들은 모든 기성의 질서 속에 내재된 해체의 지점에 대한 확신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앞에서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고 강조할 때, 그들은 어떠한 암울한 현실에서도 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신앙을 붙잡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일치의 맥락에서는 진정한 철학과 진정한 신학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두 가지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근본적 진리를 계시하고 있다. 모든 것은 해석될 수 있고, 모든 것은 해체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은 재해석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철학과 신학은 둘 다 더 깊은 샘에 의해서, 선-철학적이고, 선-신학적이고, 심지어는 선-논리적인 무엇에 의해 부양되는 것이다.”(Caputo, 2020: 298-299)
Ⅲ. 누구의 종교이고, 어떤 신인가?
철학적 해석학의 이론과 실천을 가로질러 마침내 신학적 해석학에까지 이르는 카푸토의 사유는 대단히 독창적이다. 특별히, 그의 책은 철학적 해석학이 어떠한 분야인지를 평이한 어조로 입문자들에게 소개해 주려는 목적에서 쓰인 개론서인데도, 단순한 ‘개론서’를 넘어 어떠한 ‘연구서’도 지니지 못한 수많은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울 정도이다. 하이데거에게서 바티모와 로티에게 이르는 철학적 해석학의 역사를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논제로 꿰뚫는 카푸토의 요약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에서 제시된 논의들의 본질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법, 보건의료, 정보기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적 해석학의 적용을 ‘약한 사유’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카푸토의 입장 역시 자칫 잡다한 방법이나 이론의 나열이 될 수 있는 주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다만, ‘신’이라는 상징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으로 풀어내려고 하는 카푸토의 시도가 (분명히 그 자체만으로 흥미롭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얼마나 정당성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비판적으로 따져보아야 하는 사안이 존재한다.
데리다와 카푸토
(1) 종교들로부터 신화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신의 이미지를 걷어내야 한다는 카푸토의 주장은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라고 일컬어지는 성서 해석 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5 이러한 해석 방법은 성서에서 ‘신화적 세계관’과 ‘케리그마’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가령,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 중에서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탈신화화를 내세우는 연구자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과학적 세계관을 지닌 현대인이 신화적 세계관에 따라 쓰인 복음서를 있는 그대로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에서 신화적 세계관을 벗겨내어 ‘케리그마’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탈신화화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 탈신화화에 근거한 해석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케제만(E. Käsemann)을 비롯하여 오늘날 예수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신약학자들은 복음서가 단순히 신학적 성격을 지닌 문서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성격까지도 지닌 문서라고 정당하게 지적한다.6 또한, 리쾨르(P. Ricoeur)와 밴후저(K. Vanhoozer)를 비롯하여 상징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가진 해석학자들은 신화로부터 순수한 의미만을 추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대단히 허구적이라고 비판한다.7 심지어 탈신화화가 전제하는 ‘역사/신학’과 ‘신화/케리그마’의 이분법이 과연 카푸토 자신 강조하는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논제와 정합적인지조차 매우 의문스럽다. 적어도, 탈신화화가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2)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으로 종교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카푸토의 주장은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사이의 고유한 차이를 너무나 손쉽게 없애버리고 만다. 가령, 계시종교 전통과 자연종교 전통에서 ‘신’이 지니고 있는 위상은 서로 크게 다르다. 계시종교 내부에서도 유일신교 전통과 다신교 전통에서 ‘신’이 과연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유일신교 내부에서도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종교학 연구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사이의 바로 이러한 차이에 주목한다. 특별히, 비교종교학에서는 종교들 사이의 차이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마치 공리처럼 여겨진다.8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단일한 본질 따위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은 종교학자들 사이에서 지난 세기 이후로 크게 비판받았다. 애초에 ‘종교’라는 범주로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조차 결코 자명하지 않다.9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과감하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 중에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통해 종교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3)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희망의 가능성조차 과연 카푸토가 말하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1세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받아들이고 있던 매우 구체적인 내러티브에 근거하여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포로기 이후로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에 의해 차례대로 지배받아야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야훼에게 죄를 범한 나머지 ‘신의 백성’의 지위를 박탈당하여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는 내러티브로 역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1세기 유대인들에게 희망이란 자신들의 죄가 정화되어 다시 ‘신의 백성’이라는 지위가 회복되는 날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이러한 희망은 단순히 현재와는 다른 미래가 언젠가는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언약’,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계명’이라고 표현되는 구체적인 정체성과 행동 강령이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1세기 유대인들이 획득하고자 한 ‘신의 백성’이라는 지위가 ‘교회’라는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새롭게 성취되었다고 공언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한 상태는 결코 ‘불가능한 것’으로만 남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10
따라서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논제에 근거하여 철학적 해석학이 지닌 신학적 함의를 강조하려는 카푸토의 시도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보이지는 않는다. 종교에 대한 그의 논의는 오늘날 더 이상 정당화되기 어려운 전제들 위에 성립되어 있다. 즉, ‘탈신화화’라는 단일한 방법을 통해 종교들로부터 신화적 세계관을 걷어내야 한다는 카푸토의 주장은 ‘역사/신학’과 ‘신화/케리그마’라는 의심스러운 이분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야말로 ‘신’이라는 상징이 가리켜 보이고 있는 사태라는 카푸토의 주장 역시 종교들이 단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막연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희망’이 카푸토 자신이 말하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조차 1세기 유대인들이 역사에 대해 지니고 있던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단일한 방법과 단일한 본질을 암묵적으로 상정한 상태에서 ‘신’이라는 상징을 풀어내려는 카푸토의 태도는 종교로부터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들을 제거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입장이 내세우는 ‘종교’란 결국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종교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religion)’에 지나지 않는다.11 철학자들의 사변 속에만 존재할 뿐,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어느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는 허구의 종교 말이다. “누구의 종교이고, 어떤 신인가?”12라는 질문이 진지하게 제기되지 않는 이상, 철학자들이 개념화한 종교란 언제나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Caputo, J. (2020) 『포스트모던 해석학』, 이윤일 옮김, 도서출판 b.
윤동민. (2022) 「존 카푸토의 (신의) 약함의 현상학」,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92집, 29-61.
Eddy, P. R. & Beilby, J. K. (2014) 「역사적 예수 탐구: 서론」, 『역사적 예수 논쟁: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P. R. Eddy & J. K. Beilby 편집, 손혜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11-75.
Grondin, J. (2014) “Do Gadamer and Ricoeur Have Same Understanding of Hermeneutics”, The Agon of Interpretations: Towards a Critical Intercultural Hermeneutics, M. Xie (ed.),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43-63.
MacIntyre, A. (1988) 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 Notre Dame, Indiana: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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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 J. K. A. (2000) “Re-Kanting Postmodernism?: Derrida’s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Faith and Philosophy, Vol. 17(4), 558-571.
Smith, J. Z. (2009) 『자리 잡기』, 방원일 옮김, 이학사.
Smith, W. C. (1991) 『종교의 의미와 목적』,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
Vanhoozer, K. (2010) Remythologizing Theology: Divine Action, Passion, and Authorship,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필자 소개
서강대학교 학부 과정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 현상학, 해석학, 언어철학,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다.
- 위의 서평은 에라스무스 연구소 주간아카이브, 제16호, 2024년 5월 6일에 수록되었다. 에라스무스 연구소의 사전 안내에 따라 원고의 독점적 사용 기한인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서평을 블로그에 등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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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일은 국역본에서 “Interpretation goes all the way down.”을 “해석은 끝이 없다.”라고 옮겼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론이나 입장 중에서 해석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해석은 끝이 없다.”라는 번역도 카푸토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다만, 필자는 “all the way down”이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하는 관용어라는 점에서 “해석은 끝까지 간다.”라는 번역을 조금 더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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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사유’라는 표현 자체는 바티모를 통해 제시된 것이다(Caputo, 2020: 1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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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카푸토가 말하는 ‘약함’의 의미는 (특별히, 신의 ‘약함’의 의미는) 형이상학과 해석학 사이의 대비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되기 어렵다. 그가 제시한 ‘약한 신학(weak theology)’의 맥락에서 ‘약함’이란 강제적이 힘이 없이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적 사건의 고유한 특징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윤동민, 2022: 47-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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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리쾨르(P. Ricoeur)는 이러한 비판을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 제기하였고, 그롱댕(J. Grondin)은 이러한 비판을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 다시 제기하였기도 하다(Grondin, 2014: 49-50; 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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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트만의 첫 발걸음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는 쉽지 않다. 일단 여러분이 성서를 탈신화화 해가기 시작하면, 그 일을 그만하기란 어렵다.”(Caputo, 2020: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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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70년대 사이에 제시된 이러한 연구 사조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 탐구(new quest)’라고 일컬어진다(Eddy & Beilby, 2014: 32-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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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후저는 신화적 세계관과 케리그마를 엄격하게 분리시키려는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 이론에 반대하여 그 두 가지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 이론을 내세우기도 한다(Vanhoozer, 2010: 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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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가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공리와도 같은 것이리라.”(Smith, 2009: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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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의는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를 통해 20세기 후반의 종교학에서 주용하게 제기되었다(Smith, 19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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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자 맥나이트(S. McKnight)는 성서가 말하는 ‘신의 백성’ 혹은 ‘신의 왕국’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의 이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성립한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McKnight, 20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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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없는 종교’란 데리다와 카푸토가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표어이다. 그러나 카푸토의 제자이기도 한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그들이 제시한 ‘종교 없는 종교’가 대단히 공허한 표어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a) 개별적 종교는 보편적 윤리의 ‘운반자’ 이상의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b) 신앙과 지식은 언제나 서로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종교로부터 모든 구체적 내용을 제거하여 ‘종교 없는 종교’만을 따로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Smith, 2000: 565-5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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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질문은 매킨타이어(A. MacIntyre)의 유명한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누구의 정의인가? 어떤 합리성인가?”를 변형한 것이다(MacIntyre, 198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