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회 서산철학강좌는 1년 전에 돌아가신 연세대의 헤겔 연구자 남기호 교수님에 대한 추모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남기호 교수님과 생전에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조대호(연세대 철학연구소장), 연효숙(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김원식(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선생님께서, 남기호 교수님과의 추억들을 이야기해 주시고, 남기호 교수님의 헤겔 연구와 독일 고전철학 연구가 지닌 의의에 대해 소개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남기호 교수님의 지도 제자이신 마준석 선생님의 발표가 참 공감이 많이 되면서 인상적이었네요.
남기호 교수님은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연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 시험을 치를 때, 영어 독해 시험의 지문이 케네스 웨스트팔(Kenneth Westphal)의 헤겔 논문 중 일부였어요. 그때 그 텍스트를 제가 독해하고 나자, 남기호 교수님께서 저에게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저는 남기호 교수님의 철학적 입장도 모른 채 별 생각 없이 “관념론으로 독해될 수 있는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있네요.
지금 돌이켜 보면, 남기호 교수님이 자비롭게 제 이야기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무사히 입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헤겔의 철학을 단순히 ‘관념론‘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사실 남기호 교수님의 입장에 이제 더욱 공감이 되기도 하고요. 칸트가 초월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듯이, 헤겔도 결국 개념에 매개된 모든 것이 실재라고 강조하는 입장이니까요. 그 면접장에서 관념론과 실재론이 헤겔에게 있어서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남기호 교수님의 『정신현상학』 강독 대학원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습니다. ‘힘과 오성‘ 장을 주로 다룬 수업이었는데, 독일어로 헤겔을 읽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번역을 한 뒤에 교수님께서 내용을 해설해 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된 수업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헤겔의 독일어를 독해해야 하는데, 교수님께서 독해가 끝나면 “여기서 das가 뭘 가리키는 거예요? die는 뭐인 것 같아요?“라고 하나하나 집요하게 물어보셔서 긴장을 바짝해야 했던 수업이었어요. 독일어에 능숙하지 못한 저로서는, 일주일 내내 이 수업을 위해 헤겔 텍스트를 번역해야 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높은 난이도로 수업이 진행되었던 만큼, 수업에 꾸준히 참석한 남기호 교수님의 지도제자분들은 정말 일취월장하더라고요. 한 학기 수업을 들었던 저는 ‘정통파 헤겔 연구는 이런 거구나!‘하고 맛만 본 정도였지만, 몇 학기를 연속으로 수강한 분들 중에서는 처음과는 달리 몰라 볼 정도로 실력이 향상된 분들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어학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저보다 독일어 해석에 능숙하지 못한 분이었는데도 어느 순간 저보다 훨씬 독일어를 잘 하시게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거든요.
여하튼 남기호 교수님의 주요 논문과 저작 목록을 살펴 보고 있으니 다시 의욕이 생기네요. 남기호 교수님은 평소에 공부방을 벗어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신 분이라고 하고, 독일 유학을 가기 전에도 헤겔 전집을 다 훑어보셨을 만큼 대단히 열정적으로 공부하신 분이라고 하는데, 요즘 들어 놀고 먹고 자면서 인생을 방만하게 낭비한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