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후설의 '본질직관'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올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유튜브 영상에 어떤 분이 댓글을 남겨주셨네요. 저는 '본질직관(Wesensanschauung)'이 우리의 일상적 대상 지각 속에서도 언제나 수동적으로 수행된다고 해석하는데, 댓글을 써주신 분은 본질직관이 능동적 의식작용에 한정되는 용어라고 말씀하시네요.

제가 후설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제 이해가 일반적인 것인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본질직관'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1) 수동적 발생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작용도 '본질직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니면 (2) 능동적 발생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작용만 '본질직관'이라고 한정해야 하는지 말이에요.

댓글 1

ja ra : 약간 부정확한 내용이 있어서 댓글 답니다. '형상적 환원'은 우연적인 사실에 관해 판단을 중지하고 오직 선험적인(a priori) 것만 다루는 절차입니다. 가령 내 마음 속에 사과에 관한 의식이 있다고, 그 의식이 여러 특징들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의식에 관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사과에 관한 의식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런저런 특징을 갖는다는 것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우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형상적 환원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사과에 관한 의식이라면 필연적으로(선험적으로) 이러저러하다.' '어떤 것이 물체에 관한 의식이라면 필연적으로 이러저러하다.'와 같은 선험적 명제들만 말합니다. 이처럼 형상적 환원은 '사실학'을 '본질학'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그래서 현상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물리적 사건에 대한 보고에 형상적 환원을 적용하면, 물리적인 것에 대한 존재론, 형이상학이 생기게 됩니다. 영상에는 이 점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또한 본질직관은 우리가 매순간 아무 대상이나 의식할 때마다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는 보편자(플라톤적 의미의 형상), '물체는 연장되어 있다'라는, '의식은 시간적이다'라는 명제 같은 '선험적인 것'을 대상으로 만들 때만 수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과를 '사과'로, '물체'로 의식하게 만드는 어떤 틀이나 규칙이 의식 안에 있겠습니다만, 그런 규칙이 우리가 사과를 의식할 때 바로 그 의식의 대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점들을 제외하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잘 소개하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영상 많이 올려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댓글 2

오징어의 철학 노트: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이 영상에서 '수동적 발생(passive Genesis)' 혹은 '수동적 종합(passive Synthesis)'에서 일어나는 본질직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흔히 형상적 환원은 '자유변경'을 통해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상상하여 그 중에서 본질형식을 의식적으로 구별해내는 작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후설은 의식적인 자유변경 없이도 우리의 일상적 지각이 언제나 본질직관을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사과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과'라는 대상의 본질을 어렴풋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자유변경'과 같은 의식적인 형상적 환원의 작업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파악한 본질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과정으로서 수행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 제38절 '능동적 발생과 수동적 발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후설은 "[……] 어떠한 경우에도 능동성의 모든 구축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미리 부여하는 수동성을 가장 낮은 단계로 전제하며, 능동성의 구축을 추적해가면, 우리는 수동적 발생에 의한 구성에 직면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남인 교수도 『현상학과 해석학』이라는 책에서 형상적 환원을 해설하며 이 점을 강조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남인 교수는 개별적 대상에 대한 경험인 '개별적 직관(individuelle Anschauung)'과 본질에 대한 경험인 '본질직관(Wesensanschauung)'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우리의 의식이 개별적인 경험적 대상에 대한 개별적 직관을 수행하고 있을 경우에도 우리의 의식은 비록 막연한 양상에서나마 비주제적으로 본질을 향하면서 본질직관을 수행하고 있다."(55쪽.)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영상의 분량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제가 형상적 환원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다루지 못한 문제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댓글 중에도 형상적 환원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이 있어서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좀 더 설명을 보강하여 영상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댓글 3

ja ra: 사실 본질직관은 능동적 발생에 속합니다. 데카르트적 성찰의 해당 절 152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집합작용에서는 집합이, 셈하는 작용에서는 수가, 나누는 작용에서는 부분이, 진술하는 작용에서는 술어 또는 술어적 사태가, 추론하는 작용에서는 추론 등이 산물로 나타난다. 근원적인 보편성 의식도 보편자가 대상적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활동이다."

후설은 이런 활동들을 통틀어 "범주적 직관"(152)이라 부르는데요. 후설에게 범주적 직관은 예외 없이 능동적인 사건에 속합니다. 그것은 153쪽의 "특수한 의미에서 이성의 그와 같은 능동성과 이와 상관적으로 이성의 산물(이념적 대상)이라는 높은 단계의 형태"에 해당합니다. 수, 사태, 집합, 보편자 같은 것들이 바로 이념적 대상입니다.

해당 절의 취지는 수동적 발생이 능동적 발생에 "질료"(153)를 제공한다는 것, 지각이나 감각 등 '수동적' 의식이 "논리적 이성"(152)의 '능동적'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동적 발생 자체가 본질직관이 아니라, 본질직관의 전제 혹은 근거, "낮은 단계'(153)를 마련해 주는 거예요.

이남인 교수님의 해석은 '본질직관'이라는 말의 의미를 과도하게 넓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상학과 해석학 56쪽에서 인용된(41번 주석) 구절도 경험에 이미 본질직관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인용구는 경험과 판단 477쪽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맨 처음 부각된 보편자"인데, 이 말은 보편자에 관한 의식에서 처음으로 보편자가 경험 사물로부터 분리된다는 뜻일 뿐입니다.

감각적 경험이 낮은 단계, 본질직관(기타 모든 범주적 직관)이 높은 단계라는 점은 후설의 지속적인 기본 전제입니다. "보편자는 산출하는 자발성 속에서 구성"(경험과 판단 454)됩니다. 논리연구 6연구 2부('감성과 지성'), 경험과 판단 2부 2장과 3부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이념들』 제1권 제22절의 다음 구절도 후설이 수동적 발생에서 수행되는 구성작용을 '본질직관'으로 보았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하네요. 후설은 우리가 '이념들'과 '본질들'을 언제나 보고 있다고 주장하니까요.

"참으로 모든 사람은 '이념들'과 '본질들'을 보며, 이른바 언제나 보고, 사유 작용 속에서 이것들로 조작하고, 본질판단들──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 본질판단들을 [잘못] 해석하지만──도 수행한다. 명증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끈기 있고, 자신들에 관한 이론들이 어떻게 논의하든 내버려두지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그대로 남아 있다. 주어진 것들로 향하는 것은 이론의 사항[임무]이고, 주어진 것들의 근본종류를 구별하고 이것들의 고유한 본질에 관해 기술하는 것은 인식론의 사항이다."(에드문트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제1권,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09, 103쪽, 인용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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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저도 현상학 전공자도 아니고 또한 후설의 원전을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이남인 교수님은 <현상학과 해석학>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동적 발생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작용‘까지 넓은 의미의 본질직관이라고 당연하게 전제하고 말씀하신 것 같거든요.

게다가 설령 후설이 원전에서 본질직관을 그리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 개념사용을 반드시 따를 필요도 없어보입니다. 이미 현상학계에서는(적어도 제가 수업을 듣거나 사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듣게 된 현상학 전공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본질직관’을 이남인 교수님처럼 넓은의미로 쓰는 것 같거든요. 오히려 그렇게 개념을 확장하는 편이 더 유용해보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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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본질직관'이 당연히 지각에서 수동적 형태로도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후설의 텍스트를 이런 관점에서 독해하면서도 별다른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보니, 유튜브 댓글에서 제시된 의견이 다소 낯설게 다가왔네요. (그나저나 이남인 교수님 같은 세계적인 현상학 연구자의 직강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라니, 참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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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남인 교수님한테 수업을 들은 건 아니에요 ㅎㅎ 저도 그럴 수 있는 환경이라면 정말 부러울 것 같네요. 다른 신진 현상학 전공자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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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 후설에게 본질직관은 반드시 개별자에 대한 직관에 근거하고, 그래서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아마 이남인 교수님은 이전에 일어난 본질직관이 '습관화'되고, 그래서 개별자에 대한 지각에서 본질이 '암묵적인' 방식으로 함께 의식되는 경우를 가리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본질을 의식한다는 것이 반드시 지금 막 상상 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돌려 보고 변양하는 '형상적 변경(eidetic variation)'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일어났고 기억 속에 가라앉은 본질에 관한 의식이 함께 작동하는 것까지 포괄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단 후설이 '본질직관'이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후설은 '직관(Anschauung)'이라는 말을 거의 언제나 '명확한(klar)' 의식에 한정하거든요. 그리고 '본질직관'은 전문용어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후설의 용례를 따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본질직관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본질에 관한 암묵적인 의식이 함께 작동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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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사합니다. 일단 '본질직관'이라는 표현을 쓸 때 가급적이면 명확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본질에 대한 의식에 한정하는 게 오해를 피하기에는 좋을 것 같네요.

(2) 도서출판 b에서 나온 현상학 사전을 찾아보니, 이남인 교수님의 설명처럼, 대상에 대한 지각 활동에서 '본질직관'과 '개체적 직관'을 서로 분리시키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개념적으로는 둘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개체를 직관하는 활동에서 언제나 본질 역시 직관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올바르다고 생각되네요.

"[본질직관은] 개체적, 경험적, 감성적 직관과 같은 사실적인 것에 관계하는 직관과 분리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각적 직관을 떠난 수준에서도 성립하는 "원리적으로 고유하고도 새로운 종류의 직관"[Ideen Ⅰ 15]도 의미한다. [……] 이와 같이 개체적 직관은 본질직관으로 전화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후자를 토대로 하여 본질에 대응하는 개체가 범례적으로 의식화되는 것도 가능한바, 양자는 원리적으로 구별되는 한편,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기도 하다."

(3) 제가 본질직관과 개체적 직관을 별개의 활동처럼 설명하지 않으려 한 이유 중 하나가, 사실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개체적 직관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야 본질직관이 수행된다고 한다면, 이런 주장은 '감각 자료(sense-data)' 혹은 '소여(the Given)'가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야 개념적 지각이 수행된다는 근대 경험주의의 입장과 똑같은 난점에 빠진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대 경험주의가 비개념적 감각 자료에서 개념적 지각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해명하지 못한 것처럼, 후설도 개별적 직관에서 본질직관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해명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후설이 이런 '소여의 신화' 구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았어요. 현상학은 우리가 언제나 지향적 관계 속에서 의미가 부여된 대상들과 만난다고 주장하니,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나 '날 것 그대로의 경험' 따위를 인정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도, 현상학을 전공하면서 셀라스를 읽는 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후설과 셀라스(혹은 맥도웰)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욱 개별적 직관에 언제나 본질직관이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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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설에게 본질 의식과 개별자 의식은 명확하게 분리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으로는 개별자 의식이 언제나 보편자 의식을 동반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후설은 보편자 의식 없는 개별자 의식이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꽤 분명합니다.

후설은 거의 모든 주요 작업에서 보편자 의식이 개별자 의식에 근거함을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논리연구』에서 "감각적(sinnlich) 혹은 실재적(real) 대상"은 "가장 낮은 단계의 대상들", "범주적(kategorial) 혹은 이념적(ideal) 대상"은 "더 높은 단계의 대상들"이고( 6연구 46절), 『이념들 1』에서 "종합들"(여기에서 '종합'은 능동적 종합을 말합니다)은 "높은 단계의 정립들"이고(120절), 『경험과 판단』에서 보편자는 "새로운 종류의 대상성, 즉 감성에 근본 토대를 두더라도 능동성의 근원적 원천으로부터 발생하는 오성의 대상성"입니다(81절).

반면에 후설이 그 역을 주장하거나, 양자가 동근원적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래서 개별자 의식이 '선험적'으로 보편자 의식을 동반한다는 해석은 상당히 무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현상학사전』은 학문적 권위가 없고 걸러 읽어야 합니다. 해당 부분을 읽어보았지만 양자가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없었습니다.

(2) '소여의 신화'에 관한 YOUN님의 우려를 십분 이해합니다. 그런데 셀라스의 비판이 정확히 어디까지 정당한지, 그것이 후설의 견해에 정확히 어떻게 해당하는지는 따져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큰 어려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단지 '~에 관한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가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경험과 판단』에서 후설이 하는 설명을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81절을 보면, 후설은 개별자가 처음부터 "유형적으로 이미 알려진 것"으로서 경험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보편자 의식이 이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을 통한 "연상적 깨움(Weckung)", 그러니까 닮은(gleich) 것과 닮은 것이 서로를 연상시키는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경험적 유형들이 선구성(vorkonstituieren)"되지만, 이것은 아직 보편자의 "근원적인 산출"은 아닙니다. 보편자는 이러한 유사한 개별자들의 연상에 근거하여, "산출하는 자발성"에 의해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81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닮은 것들 사이의 연상적 종합이 보편자를 의식하기 위한 어떤 핵심적 근거이기는 한데, 그것만으로는 아직 보편자에 관한 의식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러한 연상적 종합을 이미 '보편자에 관한 의식'이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푸들을 보고 웰시코기를 떠올리고, 웰시코기를 보고 진돗개를 떠올리는... 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이미 '개'라는 보편자를 의식한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설은 '~에 관한 의식'이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아직 보편자라는 새로운 대상에 관한 의식이 아니고, 연상적 종합에 근거하는 어떤 "능동적 파악"이 있어야 비로소 보편자라는 대상에 관한 지향성, 'aboutness'가 생깁니다.

이러한 구별을 고려하면, 개별자들에 대한 직관들이 보편자에 대한 직관을 동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떤 방식으로(특히 연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의미망' 속에 있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후설이 이러한 연결을 새로운 대상에 관한 의식으로 간주하지 않을 뿐이겠죠. 그래서, 비록 제가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이나 근대 경험주의의 난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후설에게 그 문제가 곧바로 적용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소여의 신화'와 후설의 관계는 꽤나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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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상세한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후설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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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도 모헌티처럼 본질직관에 대한 후설의 설명이 자칫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본질직관'이라는 용어를 유의미하게 유지하려고 한다면, 본질직관은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형상을 새롭게 발견해내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지각 속에 언제나 이미 '암묵적으로(implicit)' 내재되어 있는 형상을 '명시적으로(explicit)' 기술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륙철학에서는 투겐하트가 현상학적 '기술'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분석철학에서는 브랜덤이 화용론의 작업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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