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의사소통의 해석학으로서 기독론 -비테킨트의 종교적 의사소통의 이론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서구 유럽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세계에서 학문은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흐름 속에서 전개된다. 이는 신학 역시 피해갈 수 없는 흐름이다. 특히 기독교 신학은 동로마의 붕괴 이후에 종교개혁이 등장하기 전까지 로마 카톨릭이라는 거대하고 통일된 종교적 정치적 제도 아래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 다원주의적 세계에 대해서 매우 이질감을 느낀다.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로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론에서 비기독교 종교에 대한 차이인식을 구성하기 전까지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제도적 교회의 권위 아래서 잘 이해된 성서에 기초하여 단일한 종교문화를 구성했고, 계몽주의 신학자 요한 자몰로 제믈러 역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사적 종교체험을 그리스도교적 단일 문화 안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서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 세계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만남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고, 신학은 다양한 문화만이 아니라 비기독교 종교와의 만남을 가져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적 진리요구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종교 다원주의 신학은 기독교 종교의 배타적 구원확신을 거부하고 타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동일하게 인정하면서 다양한 종교의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하지만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타종교에 대한 구원확신성을 개방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학에 기독론적 중심을 포기와 신중심주의적 전환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존 힉은 추상적인 실재-형이상학적 하나님 이해를 통해 다양한 종교를 신관념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오늘날 종교신학은 더 이상 각각의 종교에 대한 동일한 가치평가에 기초한 종교이해를 포기하고 개별적 종교의 독특성과 타종교에 대한 인정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러한 점에서 존 힉은 다양한 종교를 하나의 추상적 기획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실질적 대화의 원리를 구성하지 않았다. 종교는 결코 추상적인 이론적 구성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과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교의 안과 밖의 상호의사소통을 방법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본요소로서 기독론의 재구성의 의미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하여 현대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종교가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뒤스부르크-에센 대학교 조직신학자 폴카르트 비테킨트(Folkart Wittekind)는 오늘날의 이 문제사적 지평 안에서 역사적 예수의 재질문을 의사소통과 관련된 맥락 안에서 살펴본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론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배타적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시그리스도교 이후 전개된 기독론의 역사적 형성과 오늘날의 기독론의 과제는 원시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다양한 의미존재들의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기독론은 오히려 예수 자체보다 그리스도교의 수용자적 입장에서 형성된 종교적 이론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1.언어와 종교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구성된 개신교 신학 안에서 언어와 종교라는 두 단어는 매우 어울려 보이지만 신학사적으로 이 두 단어는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다. 종교개혁 이후 17세기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학을 교회 권위 아래 잘 이해된 성서 문자에 대한 습득으로서 파악했다. 신학의 목적은 성서의 문자를 인식(notitia)하고 동의(assensus)하고 신뢰(fiducia)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은 성서해석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교 본질로서 이해된 성서의 재현을 지향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구프로테스탄트의 문자적 이중영감론이 붕괴된 이후로 개신교 신학은 학문으로서 신학의 방법론으로 종교개념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성서언어의 재현이 아니라 종교적 이념의 묘사 또는 실현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신학과 철학은 종교개념이 인간의 소질인 이성, 행동 그리고 감정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신칸트학파 철학자 빈델반트는 종교개념을 이성, 행동 그리고 감정의 근본구조인 초월성에 분류시켰다. 하지만 20세기의 전환기에 이 인간학적 종교개념은 소위 변증법적 신학의 하나님 말씀 신학에 의해 거부되었고, 다시 언어적 인식이 신학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특히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 I/1에서 1장의 제목을 “하나님 말씀론. 교의학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으로 시작하면서 교회적 언어를 신학적 인식론의 중심으로 다시 제시하였다. 바르트가 이렇게 다시 신학을 교회적 언어론으로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종교적이고 다문화적인 신학적 환경 안에서 교회적 언어론으로서 신학은 다른 문화적 언어와의 대화를 차단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적 상황은 소위 문화적 전환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종교와 문화의 의미이론적 관계에 집중한다.

최근 독일어권 신학이 언어보다 종교와 문화의 의미론적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언어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언어, 의미체계 또는 의미적 코드를 통해 자기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한다. 오늘날 상황 안에서 나타나는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은 바르트가 교회라는 매우 개별적 공간 안에서 신학적 언어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문화적 상황 안에서 종교문화 또는 종교이론과 언어에 대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에버하르트 융엘은 20세기 후반에 신학의 언어성을 해석학적으로 탐구했다. 물론 그는 언어를 종교이론적 구성 안에서 탐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1969년 그의 논문 “Gott- als Wort unserer Sprache(우리의 언어로서 하나님)”에서 일반언어성과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언어의 관계를 살펴본다. 융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어사건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통해 신앙의 언어와 세계의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우리의 언어로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진술 가능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며 언어 상실은 기독교 신앙의 위협이다. 이런 점에서 융엘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기 위한 시도이다. 융엘은 방법론적으로 언어의 기능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파악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게르하르트 에벨링이 이 단어를 보편적 인간경험의 장소에서 언어사건으로 제시한 생각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에벨링은 말씀을 언제나 시간적 상황과 연관해서 고려한다. 그에게 인간의 말씀상황이 하나님 진술의 가장 의미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인간의 경험지평에서 다루어져야 만했다. 그러나 융엘은 하나님의 자기정체성이 인간의 말씀 또는 언어 상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융엘은 에벨링과 다르게 하나님이 언어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이미 구체적인 언어 사건이다. 에벨링에게 실존적 상황으로서 인간의 말씀상황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언어적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어의 전제이지만, 융엘에게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언어사건에 상응한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사건으로서 언어의 상응으로 인하여 하나님 말씀은 단순한 정보전달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 말씀은 우리의 언어와 세계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고, 우리 언어의 한계를 통해 해석된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융엘에게 사건으로 진리는 언어와의 관계 안에서 접근 가능하며, 하나님 말씀의 사건은 인간적 언어의 관계 안에서 성립한다.

융엘은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언어를 경험지평 또는 문화적 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계시사건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언어사건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으로 침투함으로써 언어적 신-진술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에서 인간에게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담화행위이다. 하나님이 계시 가능한 존재라면 그때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말씀 안에 현존하며,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인식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객관적 존재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게 된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입술로 언급되는 사건이 신앙이다. 이제 융엘은 신앙과 하나님 진술가능성을 일치시키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오직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오직 신앙에 의한 진술 안에서 하나님은 입증되며, 따라서 신앙 밖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말 할 수 없다. 융엘에게서 이 신앙 안에서 계시, 언어 그리고 사유는 일치 또는 상응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을 통해 인식되는 신인식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제한되며,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융엘에게 신앙 안에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융엘에게 있어서 언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신앙의 현실성의 일치를 의미한다. 융엘의 이와같은 언어이해는 근본적으로 신앙 안에서 하나님 존재의 자기계시로부터 형성된 계시와 언어의 일치를 의미함으로써, 언어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적 언어로 이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인간적 언어적 기능 안에서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융엘은 언어와 하나님의 존재를 일치시킴으로써 언어는 근본적으로 신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인간적 언어 안에서 기능함에도 불구하고 일상 언어적 기능을 가질 수 없다. 융엘의 종교적 언어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 언어를 통해 표현가능하지만 언어의 기원와 속성은 인간적 언어를 넘어서 탈세계적(überweltlich)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선포사건에서 출발하는 바르트 신학을 사색적으로 전환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융엘의 종교적 언어는 사색적 특성으로 인해 다양한 의미집단들 사이 의사소통의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최근 뒤스부르크 조직신학교수 비테킨트는 자신의 책 ”Theologie religiöser Rede“에서 융엘처럼 언어를 계시개념 또는 신앙개념에서 다루지 않고 종교이론적이고 문화신학적 틀 안에서 구성한다. 비테킨트에게서 언어는 계시신학 또는 하나님-말씀의 신학과 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신진술에 대한 인간적 언어의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에게 체험된 계시가 다양한 상황 안에서 언어적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이해는 종교적 진술이 문화적 상황 안에서 기능함을 강조한다. 물론 비테킨트는 19, 20세기 문화 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처럼 종교가 문화의 보편적 근거이거나 문화 전체를 해석하는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245)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문화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의 논문 „Über die Idee einer Theologie der Kultur“에서 무조건적인 것의 경험으로서 종교를 정의한다. 여기서 그는 내용을 의미하는 Inhalt라는 단어와 구분되는 Gehalt라는 독특한 종교적 실체를 의미하는 단어를 통해서 „형식(Form)의 도움으로 종교적 실체(Gehalt)가 내용에서 파악되고 표현된다“고 말했다. (Tillich 32) 다른 말로 하면, 종교 안에 내포된 근원적 종교적 실체(Gehalt)는 문화라는 형식에서 파악가능하고, 문화와 종교는 필수적인 상호 관계를 가진다. 이와 달리 비테킨트에게서 종교는 다양한 문화 양식 가운데 하나이며, 종교가 문화에 필수적인 양식은 아니다. 종교는 문화 안에서 다양한 언어적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임의의 한 언어가운데 하나이다. 종교적 의미가 없어도 문화 안에서 인간은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45) 임의의 언어로서 종교는 자신의 고유한 종교적 진술을 가지고 문화 안에서 다양한 언어들과 의사 소통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 안에서 종교적 진술은 끊임없는 변화 과정을 경험한다. 소위 종교없는 공적 사회라는 세속화를 경험한 현대문화 안에서 종교는 문화의 필연적 기초가 될 수 없으며, 문화는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단일성 구조로 형성될 수 없다. „문화는 단일하고 본질주의적 대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동시에 일방적은 지시체가 아니다. 그래서 문화는 해석들의 매우 복합적인 생산물이다. “(Danz 135) 따라서 오늘날 문화를 이해하는 기초는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다원화된 사회의 분화과정 안에서 형성된 조건이 새로운 종교적 언어이해의 출발점이다. (246-247) 신학은 다원화된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종교적 진술의 독특한 자기 이해의 학문적 형식으로서 전체지식에 대한 통합적 일치를 요구하지 않고(247),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 종교적 진술의 기능을 서술할 뿐이다. „신학은 교회론 안에서 의사소통화하는 종교적 공동체의 관계를 문화적 현재 안에서 수용하고, 이를 종교적 진술의 이론 안에 도입한다. “ (247-248) 종교의 생동성은 단지 교회 또는 개별 공동체 안에서 현대적 언어양식을 단순히 수용하기 보다는 다른 언어양식의 수용과 함께 생산되는 종교적 진술 또는 종교적 의사소통에 달려있다. (248-249) 즉, 단일성 또는 보편성이라고 언급되는 추상성에 근거할 때, 문화신학은 이 단일성 구조에 적절한 표현방식을 지속적으로 찾고, 신학의 목표를 이 단일성 구조를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한 그 시대의 보편적 학문양식 또는 문화양식으로의 조정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보편적 단일 구조는 현대문화에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신학의 목적 또는 방법은 보편성으로의 적응 또는 조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와 언어의 만남 또는 의사소통을 통해 형성되는 종교적 생산성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테킨트는 근본적으로 기능론적 종교개념을 거절한다.

기능론적 종교개념은 종교를 일반 사회와 구분되는 고유한 실재로서 이해하는 실재론적 종교개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실제로 종교와 사회와의 연관성을 배제한 20세기 초 변증법적 신학과 세속화이론에 기초한 초기 사회학자들은 이 실재론적 종교이해에 기초하여 종교와 사회를 이분법으로 나누었다. (루크만 77) 그러나 이 종교와 세속사회의 이분법은 금욕주의적 그리스도교적 종교이해에 기초한 이론으로써 다양한 종교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현대사회에 적절한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기능론적 종교개념은 한 사회체계 안에서 종교가 다른 문화적 사회적 양식들과 공존하는 이해를 시도했다. 이러한 종교의 사회적 공존성에도 불구하고 기능론적 종교개념은 상징적 보편자와 사회적 의미체계를 결합함으로써 사회개념을 보편적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루크만, 80) 루크만은 종교를 개인의 사회통합으로 주제화하고, 그로 인하여 종교의 고유성은 상실되었다. (Danz,111-112) 따라서 실재론적 종교이해가 종교의 고유성의 강조를 사회적 체계와의 대립 안에서 추구하고, 기능론적 종교이해는 종교를 단일한 사회적 상징체계의 사회통합을 위한 기능으로 봄으로써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양식과 공존하는 독특한 종교적 진술 또는 종교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실현하지 못했다. 종교적 진술의 언어는 이와 같이 보편성에 근거한 진술의 내용에서가 아니라 다원화된 세계 안에서 종교적 진술의 독특한 기능과 종교적 실체(Gehalt)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250-251) 이는 종교적 진술의 구성 또는 종교적 의사소통의 사건은 어떤 특정한 내용을 기반으로 참과 진리의 구분으로 구성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영역 안에서 다양한 해석의 상호소통적 기능화로 이해된다. 종교적 진술의 기능화는 보편적 사회 구성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언어들로서 사회적 대상 간의 의사소통 기능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에서 비테킨트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종교는 초세계적 금욕인가 아니면 문화에 대한 적응인가? 전자는 종교를 사회 또는 문화로부터 분리하고, 후자는 통일된 문화 안에서 보편성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는다. 이 양자는 신학사적으로 대립적인 입장을 표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소위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단일구조의 관념을 전제한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하는 고대교회의 전통은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단일점에서 이 문제를 적용하였고, 트뢸치와 틸리히의 문제제기도 이 단일한 해석점의 구조를 문제시하였지만, 계몽주의와 19세기 정신철학의 단일성 개념을 통한 새로운 문화와 종교의 통합을 지향했다. (253) 19세기와 20세기 종교의 본질 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외적 형식과 내적 근원의 관계를 탐구한다. 몰론 슐라이어마허가 이 본질탐구를 상위개념에서 도출하지 않고, 역사적 지평의 전제에서 비판적 해석학적 규정을 통해 그의 비판적 본질 규정을 현상의 역사적 전체관계의 상호 공존 안에서 검증함에도 불구하고(Laube 41-42), 바우러, 리츨, 하르낙 그리고 트뢸치로 이어지는 본질탐구는 „전체 역사적 구성“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해석의 전제로서 단일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비테킨트에게도 역사적 대상으로서 그리스도교 종교는 인간성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이 종교는 각각의 문화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254) 하지만 그는 종교의 본질을 통일적 관념으로서 판단하지 않고, 역사적-문화적 조건의 의존성을 다양한 분화된 현실에 대한 이해의 열쇠로 보았다. 개별적 종교는 다양한 개별적 문화에서 형성된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폐쇄적이고 통합적 문화 개념은 유럽문화 국가 안에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신학은 문화 안에서 다양한 임의의 한 언어로서 의사소통을 통해 전개되어야 한다. (254)

오늘날 신학적 담론의 상황이 다원화된 세계를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비테킨트는 신학적 단일표상이 여전히 신학적 교리를 통해 잔존한다고 말한다. 이는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종말론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256) 예를 들어 오늘날 가톨릭 신학자 헬무트 호핑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 안에서 현재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앙고백 또는 자기서술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이 차이는 결국 하나님 선택의 종말론적 모델을 통해 미래적 단일성 구조를 전제한다. (Hoping 149-150) 이 종말론적 전제는 그리스도교의 자기고백으로서 교의학적으로 진술할 수 있지만, 신학이 근본적으로 학문적 담론 안에서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상호 관계 안에서 현재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종말론을 통한 구조적 통일성의 전제는 의사소통적 상황에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신학은 이제 단일한 통합구성으로 소급될 수 없는 다원화된 환경에서 다양한 문화적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외적 양식과의 만남을 통해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에 단일구성의 전제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제 종교적 자기정체성 형성에 방해가 된다. (256) 비테킨트는 역사적 문화와의 연관 속에서 교회가 종교적 의도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로서 종교적 언어의 가능성은 종교적 의사소통의 상황을 통해 인식된다고 말한다. (259) 이 언어 또는 전통의 언어는 문자적 고정이 아니라 모든 시대 안에서 확장과 변화를 의미하며, 확장과 변화 안에서 의사소통의 사건 안에서 새로운 의미지평이 만들어진다. 문화신학 또는 문화 안에서 언어로서 의사소통되는 신학은 인간적 의사소통 안에서 사용된 모든 내용의 형식들을 그리스도교적-종교적으로 해석되는 추상적 주장이 아니라, 문화신학은 종교적 의사소통 안에서 상호교환되는 언어적 기능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260)

종교적 언어의 변화는 종교를 사회의 예외현상으로 보는 변증법적 신학이나 초기 사회학적 이론과 같이 수도원같이 외부와 단절된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발전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260) 이 종교적 언어 또는 진술의 신학으로서 문화의 교의학적 작업은 문화와 종교의 상호교환 과정을 서술하고, 의미를 종교적으로 해석한다. (261) 따라서 신학은 종교적으로 간주하는 의사소통의 살아 있는 자기사건의 반성적 학문이다. (262) 이런 점에서 특정한 실체의 종교적 이해들의 해석학적 행위는 교회의 실존과 결합된다. 언어는 이처럼 교회의 실존과 결합되어 다양한 의미집단과의 상호 의사소통을 통해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에게서 핵심은 이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 언어가 작동하는 기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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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세기에 정말 종교 다원주의는 큰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종교 다원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여러 문맥에서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요)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를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와 동시에 범-기독교 교파와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 혹은 '에큐메니즘'도 큰 과제로 대두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가톨릭의 경우, 외적으로는 다원주의적인 태도를, 그리고 내부로는 일치를 추구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특히 개신교 교단들에서 모순적인 자세라고 비판하거나 이단성의 문제까지 거론이 되고 있기도 하죠. 비테킨트의 정교한 이론은 이런 상황에서 좋은 참고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드려요^^ 이 글의 2편, 3편도 읽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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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한 것이긴 한데...

„문화는 단일하고 본질주의적 대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동시에 일방적은 지시체가 아니다. 그래서 문화는 해석들의 매우 복합적인 생산물이다. “(Danz 135)

아마도 '일방적은...'는 '일방적인 지시체가 아니다'의 오타겠죠.

그리고 제 어설픈 생각입니다만, 부정신학적인 방법에 의하여 '하느님은 언어가 아니다', '하느님을 언어적 표현에 의하여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와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언어적 진술에 의하여 하느님을 파악하려는 것은 근원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비테킨트의 초점은 언어 자체와 하느님의 일치성의 여부가 아니라, 종교적 의사소통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 기독론 이론의 구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만......언어라는 수단은 결국 한계가 있되 이 이외에 다른 수단도 없으니 그러한 점을 겸허히 인정한 후에 조직신학적 이론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것이 차선책으로서 불가피하다는 '의사소통적 합의'가 신학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런 합의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