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용서를 이유에 근거한 분노의 제거로 보는 용서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글은 우선 용서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파멜라 히에로니미(Pamela Hieronymi)의 견해를 검토하고 이 견해가 실제로 용서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관찰되는 용서 발화의 화용론적 현상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용서를 잘못된 행위로 인해 성립한 두 당사자 간의 피해자-가해자 관계가 청산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기존의 견해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들어가는 말 마지막 문단)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2절에서는 용서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와 이를 바탕으로 용서가 일어나는 방식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한 파멜라 히에로니미(Pamela Hieronymi)의 견해와 그 장점을 살펴볼 것이다. 3절에서는 히에로니미의 견해가 갖는 두 가지 난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히에로니미가 제시하는 설명이 용서와 관련된(정확히는 용서 발화와 관련된) 화용론적 현상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서의 다양한 측면들을 포섭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4절에서는 3절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용서를 가해자-피해자 관계를 청산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고 이 견해가 용서에 대한 기존의 견해보다 더 설득력 있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용서를 할 때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제가 약 2년 전부터 짬짬이 다뤄왔던 주제입니다.
용서라는 주제로 발표도 두 번 정도 했었는데, 참 까다롭기 짝이 없는 주제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번 논문은 2년 동안 용서에 대한 저의 입장을 수정해가며 내어놓은 잠정적인 결과라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용서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주제연구를 해나가고 싶네요. 재밌기도 하고 실존적인 문제들도 있는데다가 저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학의 논의나 기독교 성경을 철학적 자료로서 활용할 수 있는 영역처럼 보여서 특히 흥미가 생긴답니다.
세 번째 논문인데도 쓸 땐 잘 쓴 거 같은데 지나고 보면 아쉽기 짝이 없는 걸 보면 좋은 논문을 쓰는 건 아직 요원한 일인가 봅니다 ㅎㅎ
잘 읽었습니다. 초견적으로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읽으면서 정말 많이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몇몇 인상적인 구절들을 뽑아 보았어요.
(1)
"그런데 이와 같은 [히에로니미의] 견해는 우선 앞서 설명한 용서 발화의 화용론적 현상을 잘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앞서 제시한 가정대로 용서 발화가 단순히 피해자의 심적 변화, 즉 어떤 판단을 했었는데 그 판단을 수정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뿐이라면 구태여 상대방이 특정한 전제를 받아들여야만 적절해지는 말로 전달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183쪽, 인용자 강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는 너를 용서해"가 단순히 "너에 대한 내 심적 상태가 변화되었어."라는 일종의 사실 전달에 불과한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Raccoon님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하시는 것처럼, "나는 너를 용서해."라는 선언 자체가 용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선언적 화행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2)
"우선 ‘선언적 화행’은 어떤 발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발화의 명제적 내용이 실제로 참이 되게 하는 발화 행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오늘부로 당신은 해고입니다”라는 발화는 적절하게 발화되었다면 실제로 당신은 그 직장에서 자리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용서 발화가 선언적 화행이라고 할 때, 그 발화를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명제적 내용은 무엇인가? 논자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볼 것을 제안한다. 용서 발화를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내용은 발화 시점으로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가해자-피해자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188쪽, 원저자 강조)
인상적인 내용입니다. 저로서는 용서 발화가 가해자-피해자 관계를 청산하는 효과를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내가 피해자고 너가 가해자인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를 원한다." 정도의 선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긴 하지만,) 용서가 선언적 화행이라는 요지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3)
"말하자면 분노를 누그러뜨리거나 가해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그 자체로 용서는 아니지만, 피해자가 용서를 하고자 결단하기까지 필요한 심리적 준비절차의 한 부분이자 적절한 용서를 위해 갖춰져야 할 요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견해와 히에로니미는 용서가 일어나는 전체 과정에서 중요한 측면을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심리적인 선행과정이 없다면 죄를 사한다는 선언 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제시된 견해가 설득력 있다면 이들은 용서에 으레 동반되는 심리적인 과정을 용서 자체와 혼동한 것이라 생각된다." (191쪽, 인용자 강조)
마지막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종종 윤리적 당위의 문제와 심리적 사실의 문제가 윤리학자들 사이에서조차 너무 쉽게 혼동되는 경향이 있다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질 때가 있는데, 논문에서 히에로니미에 대한 소개와 비판을 통해 이 점을 잘 긁어주시니 시원하네요!
"그리고 이러한 관계 청산은 과거로 소급해서 이루어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는 게 아니라 용서를 한 시점부터 미래를 향해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한편으로 과거에 벌어졌던 잘 못에 대해 여전히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는 스스로와 상대방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과거에 벌 어졌던 일로 인해 겪었고, 또 겪고 있는 고통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할 수 있다." (188-189쪽 인용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