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근심을 멈추고 당신의 삶을 즐기십시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장재호 교수님의 강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장재호 교수님은 종교철학과 과학신학 연구로 국내 신학계에서 유명한 분이시고, 영국의 「과학과 종교 포럼」에서 피콕 상(2015)을, 「과학과 신학 유럽학회」에서 ESSSAT 논문상(2018)을 수상하시면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으시는 훌륭한 학자이십니다. 영상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이 과연 서로 상충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다른 내용보다도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네요.

"제가 처음에 보여드렸던 사진입니다. 그런데 제가 두 단어를 지워봤어요. 처음은 '하나님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근심을 멈추고 당신의 삶을 즐기십시오(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라고 무신론자들의 광고가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봐요.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살기에, 어떻게 살고 다니기에, 신이 없어야만 하나요? '신이 있으면, 나 큰일 나는데 어떡하지?!'라고 하나요? '아, 신이 없대!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너의 근심을 멈추고 네 삶을 막 살아!'라니요? 도대체 어떤 삶을 살기에 저런 주장을 해야 할까요?

저는 반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그러니 근심을 멈추고 당신의 삶을 즐거워하십시오(There's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여러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의 가능성을 실현해 가십시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똑같은 말이죠. 근심을 멈추고 삶을 즐거워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신이 없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근심을 멈추고 삶을 실현해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이야기가 과학신학의 영역을 넘어서 아주 광범위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애초에 그리스도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같은 실존주의의 원형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우리는 기성의 제도, 고정관념, 권력, 억압을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언제나 지켜주신다."라는 사고 방식 때문이었으니까요. 신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지가, 동일한 그리스도교를 두고서도 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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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킨스는 저런 문구의 광고를 내었을까요? 적어도 제가 이해하고 인지하는 무신론은 전혀 저런 내용이 아닌데요...(저는 무신론자는 아니고 불가지론자입니다.)

YOUN님도 아시겠지만, 세상의 모든 무신론자들이 ‘자신의 죄를 책임지지 않기 위해, 또는 그 죄가 심판받을 두려움과 번뇌를 떨쳐내기 위해 신을 부정하는(또는 부정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떳떳한 사람들은 그 사람대로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죄가 있더라도 자기 스스로 속죄를 위한 길을 지향하고 감내하며 책임을 짊어졌으면 짊어졌지 알량하게(이런 워딩은 좀 완곡하지 않은 감이 있지만 잘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쓰겠습니다.) 구원받을 생각을 하거나 신에게 의존하지 않겠다는 스탠스가 크죠. 그만큼 저 버스 광고는 무신론자들의 생각을 왜곡하고 폄하하는 문구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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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일종의 ‘사기‘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저렇게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보이스피싱범들이 검찰을 사칭해서 통장을 압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종교도 있지도 않은 ‘죄‘나 ‘지옥의 불‘ 따위로 사람들을 협박하고 가스라이팅 하는 시스템이라는 거죠. 그런 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이라 말하는 거고요. 그래서 저는 저 구호가 사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저 구호를 쓴 사람들은 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려 했던 것이지, 인생을 막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던 것은 아닐 거예요.

다만, 이런 식으로 종교를 적대하려는 입장들을 볼 때마다, 가끔 다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정에서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부모‘라는 존재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아이 같은 모습이라서요. 세상에는 분명 나쁜 부모들도 존재하고, 불완전한 부모들도 존재하지만, 그런 부모들의 문제 때문에 ‘부모‘라는 존재 자체를 억압자나 폭군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안타까운 일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종교가 지닌 폐해가 있다는 것만으로 종교가 줄 수 있는 감동이나, 삶의 변화나, 사상적 깊이나, 통찰이나, 실천적 공동체 등이 모두 싸잡아서 ‘사기‘로 규정되어버린다면, 저는 그게 인생의 아주 중요한 측면을 영원히 놓치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와 같은 종교인들에게는 종교가 인생 전체를 다 걸어볼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는 게 너무나 분명한데, 누군가에게는 그 가치를 경험할 가능성 자체가 막혀 있다는 게 안타깝게 보이는 거죠.

종교가 결코 모두에게 자명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같은 과감한 명제를 사람들이 믿으면서 자기 삶을 걸어본다는 것이 더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죠. 다만, 종교를 믿지 않을 수는 있어도,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이 피폐해진 것일 수 있다고 보여요. 인생에서 커다란 힘과 시간을 들여서까지 종교나 종교인과 싸우려고 한다는 것은, 뭔가 커다란 상처가 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 상처가 정말 종교나 종교인 때문에 생겨난 것이든지, 아니면 뭔가 오해에서 생겨난 것이든지, 저에게는 그런 식의 싸움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아 보여요. 더군다나, 그 싸움의 대상이 어쩌면 삶에 커다란 감동과 힘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싸움 자체가 삶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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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저 동영상에 나오는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100% 동의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하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고,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지 논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영상에서 나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써놓은 글에 토씨 하나도 딴지걸 부분이 없습니다. 왜냐면 정말 맞는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YOUN님이 저번에 쓰신 글처럼 자신이 실존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상기했듯이 이것은 논리와 증명의 영역이 아니고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또 그만의 삶에 대한 경험과 가치관에 의거해 믿지 않을 것임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YOUN님과 저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같지만 결론은 다르게 내려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직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다르게 진술하자면, 신이 존재한다고 제가 아직 결정내리지 않겠습니다.(또는 않았습니다.) 정말로 모르겠기 때문에, 아직 보류해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존중받아야하고, YOUN님의 생각도 존중받아야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한 모습들을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많이 목격해왔습니다.

특히 요즈음 시대에는 직접적인 면보다 간접적인 면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데, 직접적으로 강제 포교(?)를 하거나 따르지 않음으로서의 불이익에 대해서 협박한다거나 하는 것은 많이 사그라들었고 이제 종교를 부정적으로 비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만(그리고 저는 그런 식으로 아직도 일차원적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아직도 종교를 믿는 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이 세상에 어지간히 공리로서 인정된 사실인 듯이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넘어서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체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이타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오롯이 홀로 믿음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존중하지만(심지어 사이비 종교나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공표된 종교까지도요.) 무지하거나 독립심이 없는 타인들에게까지 그의 가치관을 심어주려고 하는 모습(솔직히 표현해서, 마수를 뻗치려하는 모습)을 보면 분개하고, 그렇게 형성된 집단에서의 종교적인 활동 혹은 모임에서 종종 일어나는 (지나친 일반화를 조심해야겠지만) 위선과 부정에 모순을 느끼기도 합니다.

고로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시각이나 태도를 갖고 있는 자들이 왜 그렇게 되어있는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의해 완전히 삶이 파괴되어버려 거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렸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물론 정말로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컨트롤하지 말아야 할 영역을 넘본다거나, 그것을 당연시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분개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믿음이 실존적 선택이라는 것은, 그것은 자유하고도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혹은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자유롭도록 저주받았기 때문에), 각자의 실존적 선택을 타인에게 ‘전가’할 수 있는 권리도 없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설파하거나 주장하는 것 자체는 무한정의 자유를 지니지만 그것을 강요하거나 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칸트가 이성의 월권 행위를 막았던 것처럼, 종교에 적대심을 드러내는 자들은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종교의 ‘선을 넘는 일들’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종교가 지금까지 믿음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벌였던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고, 자신의 월권 행위를 반성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YOUN님이 말씀하신 ’삐딱한 관점‘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종교가 삐뚤어져왔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에 반대하신다면 적어도 제가 바라본 종교가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일차원적인 거부 심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데도 종교를 적대시한다고만 해서 그 사람들을 상처받은 가여운 존재들로 간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버스 광고처럼 적대심을 드러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봐도 저 표어는 무신론자들이 분개할 표어입니다. 도킨스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저런 태도의 무신론을 견지해왔고, 또 그런 무신론이 소위 ‘주류 무신론’이라면 그런 무신론은 정말 지지해주고 싶지 않네요. 어쨌든, 위와 같은 점들에서 YOUN님과 저의 의견이 나눠지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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