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서 철학적 감수성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는데요. 상식적인 결론에 상식적인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 의심이 결여됐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귀납은 러셀이 칠면조의 사례에서 설명했듯이 그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원이 결여돼 있습니다.
그래서 귀납 자체를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이후 귀납 자체를 옹호하기 위한 여러 논증이 개발됐는데요.
이런 학문적 성과들로 힘입어서 비로소 결정론이 학문적 주제로 정립됐는데요. Whynot님은 그 전 단계의 것들로 논의를 진행하니 논의가 철학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줍니다
애매어의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과거의 모든 사건은 현재에 와서 확정되었다."라는 말은
(a) "실현될 수도 있고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던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실현되었다."라는 말로도 읽힐 수 있고,
(b) "미리 결정되어 있던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실현되었다."라는 말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a)는 결정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상적 주장일 뿐이고, (b)는 결정론적 주장입니다. Whynot님은 (a)라는 일상적 주장과 (b)라는 결정론적 주장을 혼동하여서 (a)로부터 (b)를 도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위의 Thesocial님도 Whynot님에게 (a)가 상식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귀납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일 뿐, (b)를 함의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yhk9297님의 조언처럼 결정론이나 자유의지와 관련된 기존 철학의 논의들을 먼저 살펴보시고 생각을 전개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덧붙이자면, Whynot님이 빠진 오류는 '미끄러진 양상사의 오류'라는 문제와도 유사합니다. 가령,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주장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a) 필연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이라면, 그 일은 일어난다.)
(b)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일은 일어난다.)
위의 두 문장은 '필연적으로'라는 의미의 양상사 '□'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a') □(P → P)
(b') P → □P
그리고 이 둘 중에서 (a')은 일상적인 주장이지만, (b')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결정론적 주장입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몇몇 철학자들은 일상언어에서 양상사 '필연적으로'의 위치가 문장에서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a')와 같은 형태의 주장에서 (b')와 같은 형태의 주장을 도출하려는 오류를 범하였죠. 이것이 '미끄러진 양상사의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