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초월론적 사유에 대한 의문점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는 우리의 인식 일반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조건을 제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칸트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인식 일반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식에는 초월론적 조건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이 우리 인식에 대한 조건을 제시한다면, 이와 같은 작업이 기존의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른지가 궁금합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플라톤은 우리 인식의 조건으로써 이데아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참된 인식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참된 인식에는 이데아로의 관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플라톤이 인식 일반이 아닌 억견과 참된 인식을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적어도 그는 참된 인식은 이데아라는 조건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와 플라톤의 사유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데, 그래서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가 형이상학적 배후세계를 전제하고 있지는 않은지가 의문입니다. 물론 플라톤과 달리 칸트는 초감성적인 세계를 자신의 초월론적 탐구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칸트는 객관적 인식이 경험의 제약에 한해서 가능하다고 보니까요.

그러나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 자체, 그러니까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 자체가 이러한 의문에서 자유로울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초월론적 사유가 지닌 과제는 주관의 선험적 표상이 어떻게 경험의 대상과 관계 맺게 되어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지를 보이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초월론적 사유를 통해 인식 일반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그의 초월론적 사유 자체는 경험적 대상과 관계 맺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초감성적인 세계를 거부하고자 하는 칸트의 비판이 그의 초월론적 사유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러한 저의 의문이 정당한 것일까요? 아니라면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칸트도 잘 모르고, 플라톤도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이해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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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초월론적 논증(transcendental argument)‘은 이런 형식을 포함하죠.

“X는 Y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Y가 사실이라는 점을 고려할 경우, X가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R. Stern, “Transcendental Arguments

그러나 이 논증 자체가 아주 엄격한 형식논리를 바탕으로 성립한 것은 아니죠. 또 애초에 “X가 Y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다.“라는 대전제를 받아들여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고요. 가령, ’X’ 자리에 ‘강아지‘를 대입하고 ‘Y‘ 자리에 ‘고양이‘를 대입하면, “강아지는 고양이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다.“라는 거짓인 명제가 나오잖아요. 저 논증의 형식이 그 자체로 참을 보장하는 게 아닌 거죠.

그래서 저도 칸트의 초월론적 논증이 기존 형이상학의 가설 연역적 논증과 과연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칸트주의를 지지하는 분들은 초월론적 논증이 개념과 개념 사이의 필연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그 논증을 기존 가설 연역 논증과 구분하려는 것 같긴 한데, 저로서는 (a) 과연 개념들 사이의 필연적 관계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리고 (b) 그 관계에 호소하려는 시도는 기존 형이상학에서도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여전히 의문스럽더라고요.

  • 참고로, SEP의 ‘초월론적 논증‘ 항목을 작성한 로버트 스턴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네요. 유명한 칸트-헤겔 연구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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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칸트랑 플라톤을 잘 아는게 아니고, 특히 순수이성비판은 읽다가 언젠가 다시 읽겠다고 도중에 그만뒀지만, 그래도 아는 바 내에서 제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일단 가지고 계시는 의문이 두 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1)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는 형이상학적 배후세계를 전제하는가? (2) 초월론적 사유를 통해 인식 일반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가?

(2) 가 정당한 이유는, 제가 보기에 초월론적 사유가 개별적인 경험적 대상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조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이 현존하며 그렇지 않는가를 가르쳐 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며 다르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경험은 또한 우리에게 아무런 참된 보편성도 제공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러한 인식을 그렇게도 열망하는 이성은 경험을 통해 만족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의] 자극을 받는다. 동시에 내적 필연성을 성격으로 갖는 그런 보편적인 인식들은 이제,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자명하고 확실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인식을 선험적 인식이라고 일컫는데 반대로 오로지 경험에서 얻은 것은, 통칭 그러하듯이. 오직 후험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역 203)

가령 우리의 감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이 어떻게 인식되는 지 알아보기 위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첫쨰 장에서 '초월론적 감성학'을 개진하고 있고, 감성론에 따르면 이런 인식 조건은 시간과 공간입니다.
여기서 칸트는 논리 전개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왜 시간과 공간이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조건인지를 설득하려 합니다. (초월적 감성학 제 1절, 제 2절 참고) 그런데 여기서 ojh 님이 문제 제기를 하셨 듯이, 이런 인식의 조건에 대한 논리 전개가 기존의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르냐는 겁니다. 플라톤도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조건인 이데아의 존재를 설득하려고 하지요. 두 설명이 방법론에서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저는 칸트와 플라톤이 갈라지는 부분이 방법론에 있다기 보단 실체의 인식이 가능한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 보았고, 나아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한 이들이 현실정치를 해야한다고 믿었죠. 더 나아가 '이데아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확실히 배후 세계를 전제해 놓습니다. 반면 칸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인식 조건들에 따라 주어지는 현상일 뿐, 그 실체인 '물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명시하죠. 우리의 경험 밖에 있는 인식 조건들을 다룬 다는 점에서 칸트의 기획이 '형이상학'은 맞지만, 그 너머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후 세계를 전제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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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제일 수 있겠습니다만, 두 철학자의 변별점을 실체의 인식이 가능한지의 여부로 설정하면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칸트에게 "실체"는 사물 자체에 귀속되는 개념이 아니라 인식 가능한 실재적 대상들에 대해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실체는 12개의 범주들 중 관계 범주 "내속성과 자존성의 관계(실체와 우유)"에 속해 있으며(A80/B106), 또한 원칙의 분석론에서도 경험의 제1유추로 실체 고정불변성의 원칙, 즉 실체는 현상들의 모든 변화 속에서도 존속한다는 원칙이 제시됩니다(A182/B224). 여기서 칸트는 실체를 시간 관계 및 이에 따른 현상들의 변화가 지각되도록 해주는 불변의 기체(基體)로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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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 어떻게 가능한가? (how possible?)" 로 요약되는 칸트적인 질문 (예컨대 언급하신 "인식 일반은 어떻게 가능한가?")은 생각보다 미묘한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를 들어 "무엇이 있는가?"와 같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질문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1. A가 있다 -> 따라서 B가 가능하다.
  2. B가 어떻게 가능한가? -> A가 선험적-종합적이라면, B가 가능하다.

언급하신 플라톤적 사유는 1번과 같은 꼴을 가집니다. 어떤 존재론적 대상, 형이상학적 속성이 있다고 주장한 뒤, 이 존재론적 대상과 형이상학적 속성이 예화하는 것으로서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칸트적인 대답은 2번과 같은 꼴을 가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과 범주라는 개념의 형식이 선험적-종합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인식이 아무런 문제없이 가능하다고 해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공간이나 범주와 같은 (2번에서의 A에 해당하는) 것들에 대하여 칸트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진술이었다면, 시/공간이나 범주 등이 세계와 실재에 존재한다고 진술해야 합니다. 이 경우 칸트의 사유는 세계 및 실재에 대한 대상언어적 진술을 시도하는 "선험적 실재론"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론적 진술은 그러한 개체가 실제로 있는지의 문제 (흄의 회의주의), 그러한 진술이 신비주의나 미스테리한 설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의 문제 (라이프니츠의 독단주의)에 시달리게 됩니다.

반면 칸트는 시/공간이나 범주 등이 이미 "우리" (=인간)이 수행하고 있거나 이미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즉 인식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일종의 메타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 메타적 진술은 외부 실재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 대한 진술이고 따라서 "선험적 관념론"이 됩니다. 또한 이 메타적 진술은 시/공간이나 범주를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실체적 존재로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흄의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비주의적 개체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수행/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기에 라이프니츠적인 독단주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메타적 진술 자체가 어떻게 정당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위에 Youn님의 답변에 덧붙여, 이에 대한 제 부분적 답변은 다음에 게시한 바 있습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관념론의 체계 자체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아닌게 맞을까요? - Herb 님의 게시물 #2
그러나 이 방법론적 질문 이전에, 칸트의 사유가 플라톤의 사유와 어떻게 구별되는가의 문제는 선험적 관념론과 선험적 실재론의 구별에 따라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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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항상 그렇지만, 모두들 덕분에 흥미롭고 유익한 주제들 많이 알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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