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정치의 공통 목적에 관하여 (전쟁론과 군주론)

약 5개월간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군주론을 중심으로 읽다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게 되었습니다. (관계불명... 사실, 전술론을 읽다가 언제나처럼 digress한 결과입니다.) 전쟁론의 "알리는 말" 부분에 관련된 짧은 생각입니다.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의 종류는 적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것과, 적 국경의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고자 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적을 쓰러뜨리려는 것이라면, 정치적 파괴를 원할 수도 있고, 단순한 저항 불능 상태를 만들어 어떤 평화 조약에도 순응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적국의 영토를 일부 점령하려는 것이라면, 지역을 진짜로 가지기를 원할 수도 있고, 협상 테이블에 올려 놓을 수단 중 하나로서만 가지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일은 있어야 한다.

적을 없애려는 것이든, 영토를 얻으려는 것이든, 전쟁의 공통 원인이 있다. 그 모태가, 사람들이 적이나 영토를 redeem하게 한다. 그것은 명예이다. 전쟁에 관여하는 명예 역시, 때로는 사소하다. 군주가 아닌 자가 군주가 되려고 할 때 추구하는 명예만큼이나 말이다. 그나마 전쟁의 명예는 그보다는 상황이 아주 조금 낫다. 왜냐하면 전쟁을 통해 추구되는 명예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명예를 얻게 된 군주들 간에 명예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반면 군주가 되기 위할 때의 명예는 그가 찬탈자라면 아직 사인(privato)일 적에 추구한 명예이므로, 전쟁에서 예상되는 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이것은 그러나 군주가 하는 전쟁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누차 강조했지만 현대에는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그런 군주가 없다. 이제는 오직 사인뿐이고, 모두가 사인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이 추구하는 명예는 더 이상 비교적 높고 비교적 고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인 간의 지저분한 명예를 놓고, 사인에게 전혀 허락되지 않은 지저분한 폭력으로, 승자도 패자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패자가 되게 하는 지저분한 무엇이다.

Prima facie 이해되지 않은 것은 "한 종류의 전쟁에서 다른 종류의 전쟁으로 넘어가는 일은 있어야 한다."(Clausewitz 2016, 44.)라는 말이었다. 영토의 획득에서 적의 제거로 넘어가는 일이 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설득적이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비교적 단순하게도 땅만 얻고 후퇴하려던 계획은 어그러진다. 처음에 기껏해야 호승심이었던 무엇은 전쟁의 기간 앞에서 상대에 대한 증오까지 간다. 증오 아래, 목표는 영역에서 상대 자체가 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어떠한가? 적을 전유하는 데서 구역을 전유하는 데로 넘어가는 일이 있는가? 반드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발언을 자비롭게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피로해져서 적국을 망하게 한다는 기존의 입장과 목적을 철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그의 명언이 등장하는데, "전쟁이 다른 수단으로 국가의 정치를 계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45.) 그의 말이 옳다면 "국가의 정치란 무엇인가?"에 답할 수 있을 때 "전쟁이란 무엇인가?"에도 답할 수 있다. 그리고 추후의 논의가 더욱 잘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국가의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문장을 render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정치란 국가 내적으로 어떠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국가 외적으로는 어떠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누가 성립시키는가; 무엇에 대하여 성립시키는가 (즉 대상이 무엇인가); 궁극적인 목적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내가 명시하지 못한 다른 문장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먼저 국가 내적인 의미에서 국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다양하다. 민주주의, 독재, 군주정, 귀족정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안에서도 국가 정치는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심의, 법에 대한 투표, 장관에 대한 투표 등이 있다. 국가 외적으로는 비방중상 (네거티브 전략)과 선동 같은 부정적인 것들도 사용된다.

'민주주의'가 명시적으로 그런 것들을 포함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민주주의 자체로는 그런 것들을 암시하지 않는다) 대외적인 문제를 어떤 '주의'로 통칭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보인다. 따라서 비난과 선동이 대외적으로 더 많이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배제하면서 어떤 '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국가를 아우르는 어떤 사조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의, 보는 대로 믿고 쉽게 속는 성격 탓에, 비난과 선동은 심지어 민주주의가 암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대내적인 데까지 마수를 뻗친다.

정치를 성립시키는 사람은 군주와 신민, 현대의 입장에서는 지도자와 동료 시민이다. 그것은 국가의 명예를 향했고, 지금은 국가의 보이는 것, 즉 금전과 이득을 향한다. 현재의 인간들이 국가적인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정치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그들이 그런 것을 위한다면서 타인에 대해 험담을 한다면, 말이 되지도 않는다. 네거티브 전략은, 타인 즉 상대를 낮추고 degrade하지만, 그 결과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국가)의 숭고함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녕 그들이 명예를 위한다면 그들은 차라리 직접 고결함을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타인을 deny한다고 해서 자신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명예인가? 명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겠지만, 정치 자체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것은 아마 각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를 정의하는지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목적이 승리에 있다면, 승리하려는 목적은 이득과 명예에 있기 때문에, 정치의 궁극 목적은 명예에 있다기보다, 명예와 이득 모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한편, 나는 이득의 추구 자체도 명예에 근거 지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명예라고 할 것이다.

요컨대, "내적으로는 각국이 채택한 방식에 따라, 외적으로는 중상모략과 가면놀이에 따라; 내적으로는 지도자와 시민 동료가, 외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명예를 위하여" 정치를 성립시킨다. 국가 정치의 다른 형태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국내에 대하여 또는 대외적으로 말(그것이 얼마나 좋은 말이든 반대 방향이든 상관없다)로 진행되었던 방식과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전쟁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행된 논의를 숙고해 보면, 전쟁과 정치는 동일하게 명예를 목적으로 한다. a와 b의 목적이 동일할 때, a가 달리 현현하면 b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문이다. 하지만 오직 이 이유만으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정치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을 기대한다. 그의 논의가 진행될수록, 나는 그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 근거에 대해 나의 근거로부터 찬성하거나 반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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