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윤병렬 교수님 댁에서 책들을 받아왔습니다

한국하이데거학회장이셨고 홍익대 교양과에 재직하셨던 고 윤병렬 교수님의 댁에서 책들을 받아왔습니다. 제 지도 교수님이신 이승종 교수님과 윤병렬 교수님이 절친한 사이셔서, 윤병렬 교수님의 남은 책들을 저를 비롯한 이승종 교수님의 제자들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금요일(7월 26일)에 이승종 교수님과 함께 윤병렬 교수님의 댁을 방문하여 윤병렬 교수님의 가족분들을 만나고 책을 가져왔습니다. 저희가 책을 수월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짐수레와 박스 등을 가족분들이 미리 준비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저는 윤병렬 교수님의 책장에서 우선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과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긴 철학적 세계관』을 챙겼습니다. 귀한 책들을 받는 만큼, 책뿐만 아니라 윤병렬 교수님이 남기신 지적 유산까지도 받고 싶어서요. 특별히,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긴 철학적 세계관』은 이승종 교수님께서 극찬하신 책이기도 해서 궁금하였습니다. 이승종 교수님은 종종 하이데거의 사방세계(Weltgeviert) 개념과 고구려 고분벽화 속 사신도(四神圖)에 반영된 세계관이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인간이 단순히 수리물리학적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과 사신도의 세계관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라고 하시면서요. 이 이야기가 윤병렬 교수님의 책에서 나온 것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이전에 도서관에서 읽어보았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직접 구매는 하지 못했던 책들도 가져왔습니다. 하피터 교수님의 『하이데거의 사회존재론』, 장 그롱댕(Jean Grondin)의 『철학적 해석학 입문』, 존 매쿼리(John Macquarrie)의 『하이데거와 기독교』, 이기상 교수님이 편집하신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입니다. 모두 매우 좋은 연구서들이라 보는 순간 손이 갔습니다.

헤겔과 관련된 책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저는 헤겔의 『논리의 학』 주어캄프 문고판과 장 이뽈리트(Jean Hyppolite)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챙겼습니다. 만프레드 리델(Manfred Riedel)과 한스 프리드리히 풀다(Hans Friedrich Fulda) 등 저명한 연구자들이 쓴 헤겔 연구서도 몇 권 더 있었는데, 이 책들은 가져와서 헤겔 스터디 진행자분들에게 나누어드렸어요. 저보다는 헤겔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유익하게 책을 사용하실 것 같고, 또 제 독일어는 어차피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보니 제가 독일어 책들을 능숙하게 읽기에는 무리가 많아서요.

이번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의 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겐트하트는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이자, 하이데거의 마지막 제자들 중 하나로서 현상학에서도 잘 알려져 있고, 비트겐슈타인과 스트로슨 등에 대한 연구로 분석철학자로도 명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특별히, 분석철학을 통해 현상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독특한 시도를 하는 철학자이기도 해서 '분석적 해석학'을 지향하는 저로서는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 철학자에요. 지난 몇 개월동안 저는 투겐트하트가 쓴 Traditional and Analytical Philosophy라는 책과 그의 언어철학 논문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는데, 사진 속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sprachanalytische Philosophie이 바로 그 책의 독일어 원본 텍스트입니다. 또 제가 읽고 있는 투겐트하트의 언어철학 논문들은 사진 속 Philosophische Aufsätze에 독일어와 영어로 수록되어 있기도 하죠. (투겐트하트는 몇몇 논문을 영어로 직접 썼습니다.) 그동안 투겐트하트의 영어 번역본을 읽다가 의문이 나는 부분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저 책들을 빌려 대조를 해 보았는데, 이제 제가 책을 갖고 있으니 훨씬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네요.

윤병렬 교수님은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재에 신학 서적들도 정말 많았어요. 그 중에서 저는 칼 바르트(Karl Barth),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의 책들을 보이는대로 긁어서 가져왔습니다. 모두 20세기 신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직신학자와 성서신학자거든요. 독일어를 능숙하게 해내지는 못하는지라 이 책들을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일단 쌓아두면 언젠가는 읽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신학책들 중에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책들은 번역본이 있더라고요. 특히,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는 판넨베르크의 초기 주저로 유명한데, 저는 이 책의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전 세대의 뛰어난 성서학자셨던 고 전경연 교수님의 번역본이니 믿고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과 철학』의 경우 평소에 갖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마침 윤병렬 교수님의 서재에서 눈에 띄어서 곧바로 집어들었습니다. 다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1권은 발견할 수 없더라고요. (결국 짝을 맞추기 위해 1권을 알라딘으로 따로 주문하였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의 원리』도 귀중한 책이라 가져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큰 영향을 준 책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서 언젠가는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책들 중 하나입니다. (열린책들에서 2004년에 『희망의 원리』의 번역본이 나왔는데, 지금은 절판되어서 도서관에서만 번역본을 읽을 수 있습니다. 대략 5년 정도 전에 제가 직접 열린책들에 전화해서 이 책의 재고가 없는지 물어보았는데, 그때 새 판본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라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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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얘기를 듣거나 겪을 때마다 뭐랄까요 아직 한국 사회에 ‘정’ 같은게 남아 있어서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곤해서 좋으면서도 씁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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