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 님의 의견에 공감하는 입장에서 볼 때, (Raccoon 님이 링크해주신) 이우창 교수님의 답변이 논지를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하 존칭 생략).
이우창 교수는 자신의 답변 2번 파트에서 Youn의 의견을 반박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 근거는 크게 2가지로 보입니다.
- 로크는 "형이상학"을 전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크가 근대적 "형이상학"을 제시했다는 Youn의 설명은 틀리다
- 로크는 인간의 감각 경험이 "확실한" 지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로크는 여전히 당대의 도덕신학적 맥락에 서 있고, 로크는 신이 부여한 의무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인간이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적어도 "로크가 관념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상정"했다는 Youn의 설명은 틀리다
1번에 대해: 이우창 교수는 Youn의 서술에서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에 꽂힌 것처럼 보이는데,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단어는 그리 과대해석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소 입장을 고려해볼 때,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는 그냥 "철학" 따위의 단어로 치환되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즉 핵심은
애초에 "형이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한 개념 중 하나일 뿐더러, 설사 로크가 "형이상학"을 전개하고자 하지 않았다는데 동의하더라도, 일반적인 철학사적 서술로서 하이데거와 Youn이 말하는 요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2번에 대해: 일단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이데거나 Youn이 의도하는 바는 애초에 도덕형이상학 내지 도덕신학적 맥락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Youn 역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주장되는 것은 "도덕신학적 지식에서 인간이 중심에 서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인상 내지 관념이 중심에 서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성"은 이 경험적 지식의 맥락에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지식을 참이라고 주장할 때, 그 근거 (확실성의 근거)는 경험에서 주어진 바 (즉 인상 내지 관념)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경험론의 핵심 교리를 말하는 것이죠. 이 교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로크는 명백히 경험론의 전통에 서 있고, 동시대 근대철학자들의 인식론적 논의에 있어서 로크가 중점적으로 호명되는 배경도 바로 이 경험적 확실성 입니다. 예를 들어 로크는 어떤 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그 관념이 경험에 주어져야만 한다고 보았지만, 칸트는 경험에 주어지지 않고도 확실한 참인 명제(선험적 종합명제)가 있다고 보았던 것처럼요.
(여담이지만, 로크 및 17/18세기 근대철학자들이 도덕신학적 전통에 서 있다라는 점은 현대 철학사가들에게도 이미 알려진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로크에 대한 스탠포드 백과 항목에도 이 점이 나와 있습니다. 이우창 교수의 서술은 마치 철학사가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핵심은 로크가 도덕신학적 맥락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로크가 동시대 철학자들에게 호명되는 맥락이 항상 도덕신학적 맥락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
따라서 이우창 교수가 제시한 근거들은 "하이데거 및 Youn의 도식이 로크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라는 점을 논변하는 근거로서 부적절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트 3에서 이우창 교수는 "모든 철학 연구가 지성사 연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로크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는 식의 서술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철학전공자들, 적어도 과거의 철학텍스트를 다루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자명하게 사용하는 개념/범주의 역사성에 대해 자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런데 철학사를 다루는 철학 전공자들 중 이것에 반대하는 이가 있을까요? 이우창 교수는 하이데거 식의 철학사 도식이 "틀린" 이유가 마치 이들이 (지성사가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개념의 "역사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진단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이데거의 도식이 "틀린" 것인지를 차치하고, 저는 이 진단이 너무 단순하다고 봅니다. 저는 논쟁의 근원이 지성사적 해석과 철학적 해석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 역시 당연하게도 모든 철학 연구가 지성사 연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거나, 반대로 모든 지성사 연구가 철학 연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상대의 접근이 "틀렸다"라고 쉽게 반박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지성사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어떤 철학적 해석이 "틀렸다"라고 반박하거나, 철학사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어떤 지성사 연구가 "틀렸다"라고 반박하는 것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박하는 것이 당연히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당신이 철학에서의 연구성과를 모르니 이러한 주장을 한다"라거나 "당신이 지성사에서의 연구성과를 모르니 이러한 주장을 한다"라고 "쉽게" 반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지성사 연구 역시 해당 시대의 지성사적 맥락을 복원하기 위해 여러 텍스트들과 그에 대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지성사 뿐만이 아니라 철학사에서도 연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의 독일 지성사를 분석 및 복원할 때 칸트의 텍스트들을 참조해야 하겠죠. 그러나 지성사가가 이렇게 해석/복원한 결과를 두고, 철학사가들이 "이 사람은 칸트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하고 말하는 광경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칸트 철학 연구자가 제시한 칸트 철학을 두고, 지성사가들 (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사가들 역시) "이 사람은 칸트 철학의 동시대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하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도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핵심은, 부분과 전체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처럼, 지성사적 맥락과 철학적 텍스트 해석이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우창 교수는 하이데거가 지성사연구의 성과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틀린" 해석을 한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은 로크의 텍스트에 대한 이우창 교수와 하이데거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지성사적/철학사적 설명도 달라지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크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성사가들이 철학자들보다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우창 교수가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죠),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설명을 이우창 교수의 지성사적 설명을 토대로 "간단히" 반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다 생산적인 것은 서로가 "상대적" 우위를 가진 부분을 토대로 서로의 해석을 비교해보면서 논쟁을 하고 서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나의 작업을 너가 모르고 있다"가 아니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