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 후>의 한 장면 입니다.

권해효와 김민희가 분한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가 다분히 철학적이어서 전공자분들께서 실제 이론과 접목시켜 해석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올려보았습니다.

왜 사는가, 믿음, 실체, 실체는 있는가?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무엇을 믿는가. 세상을 믿는다. 이런 대화들이 나오네요.

권해효와 김민희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어떤 철학들과 유사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가볍게라도 코멘트를 주시면 영화 속 일상의 대화같은 장면 속에 들어있는 철학적 의미들을 좀 더 즐겨볼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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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품 속 아름의 입장에 공감이 되네요. 칸트의 '사물 자체' 개념에 대한 야코비의 비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다음 부분이요.

아름: 근데 실체가 뭔데요? 정말로 실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라면, 사실은 없는 거 아닌가요? 그 없는 걸, 안다고 아는 양 전제하는 게, 그게 거짓말 아닌가요, 오히려?
봉완: 없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거지 느낄 순 있는 거야, 그게.
아름: 느끼세요, 실체를?
봉완: 그럼
아름: 그게, 그 느낌이 실체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영상에 나오는 저 대화는 확실히 철학사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다루어진 주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실재론과 관념론의 논쟁, 토대론과 정합론의 논쟁,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를 둘러싼 칸트와 칸트 이후 세대의 논쟁 등과 말이에요. 심지어, 오늘날 상관주의 진영과 사변적 실재론 진영 사이의 논쟁도 큰 흐름에서는 저 대화 속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 아름의 입장이 매우 흥미롭네요. 봉완은 실체와 상관 없는 믿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아름은 오히려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네요. (a) "믿음은 실체에 대응해야만 의미를 지닌다"라는 봉완의 생각에 대해, (b) "믿음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의미를 지닌다"라고 아름은 답하는 거죠. 저는 이런 대답이 게임의 판을 완전히 바꾸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 로티의 신실용주의, 바티모의 니힐리즘은 모두 아름과 같은 입장을 강조합니다. 전통적 철학이 이때까지 '실체', '사물 자체', '실재', '객관성', '합리성' 등으로 불러온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동안 '신앙'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키에르케고어),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한 모든 것들이 '기표'의 끝없는 놀이로 드러나게 되고(데리다),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짐으로써만 진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로티), 우리가 쌓아올린 과학, 예술, 윤리 등은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해석'의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고요(바티모). 아름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야말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지반으로 드러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퀑탱 메이야수 같은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저 입장들을 싸잡아서 '신앙주의fideism'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은 종교철학과 신학에도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실제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신학은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니까요. 즉, 포스트모던 신학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실체의 형태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이 아무런 객관적 토대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신앙'이야말로, 결코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이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죠. 최근에 이 입장들을 소개하는 아주 훌륭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는데, 여기도 올려봅니다.

그러나 저는 아름의 마지막 주장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고 싶은대로 만든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무엇인가를 믿게 되는 것은,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칼 융이 리차드 에반스와의 1957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아주 잘 지적하고 있죠. 융의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터뷰이지만, 저는 이 인터뷰가 '믿음'이나 '종교'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을 잘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상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신은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갑작스럽게 감정이나 매력에 의해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전혀 예기치 않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상당히 낯선 어떤 것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Carl Jung, Conversations with Carl Jung and Reactions from Ernest Jones, R. I. Evans (ed.), Van Nostrand Reinhold Company, 1964, 51)

자, 원형은 힘입니다. 그것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갑작스럽게 당신을 사로잡을 수 있죠. 마치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죠. (Carl Jung, Conversations with Carl Jung and Reactions from Ernest Jones, 51)

저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사로잡힘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 믿음이 허구적이고 거짓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무엇인가를 믿으려면, 그 믿음에 '사로잡히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이구나! 신뢰할 만한 것이구나! 내 삶을 걸어도 좋겠구나!"하는 경험 말이에요. 이런 점에서, 저는 단순히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것"을 그냥 담담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홍상수 감독의 자기 합리화가 드러나는 부분 같아서 별로 좋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것"이 저를 '사로잡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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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는 별개로 언급하신 내용을 정리한 일련의 책들을 추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실제로,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 로티의 신실용주의, 바티모의 니힐리즘은 모두 아름과 같은 입장을 강조합니다. 전통적 철학이 이때까지 '실체', '사물 자체', '실재', '객관성', '합리성' 등으로 불러온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동안 '신앙'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키에르케고어),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한 모든 것들이 '기표'의 끝없는 놀이로 드러나게 되고(데리다),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짐으로써만 진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로티), 우리가 쌓아올린 과학, 예술, 윤리 등은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해석'의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고요(바티모).

개인적으로 최근 바티모와 카푸토의 종교철학에 관심이 생겨서 이쪽으로 글을 쓰고자하는데,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걸 느끼고 있어서요. 올빼미에서 언급되기도 했던 카푸토의 "포스트모던 해석학"이나 그롱댕의 "현대해석학의 지평"도 관련해서 읽어보기는 했는데, 추가적으로 더 어떤 책들을 읽어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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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어의 경우 『공포와 전율』을 추천드립니다. 흔히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의 차이에 대해 다루는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토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데리다의 경우 그를 유명한 사상가로 만든 논문인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와 그의 초기 대표작인 『그라마톨로지』에 ‘기표의 놀이‘라는 개념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라마톨로지』 1부에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로티의 경우 Truth and Progress라는 논문집과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관련 내용들을 찾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바티모의 책들 중에서 제가 저기 적은 내용에 가장 잘 대응하는 것은 Beyond Interpretation: The Meaning of Hermeneutics for Philosophy입니다. 로티와 공저한 책 중에서 종교에 대해 직접 논의하는 The Future of Religion도 있긴 한데, 이 책은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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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ture of Religion은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네요 ㅎㅎㅎ.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읽어봐야겠습니다.

전문적인 코멘트와 관련된 읽을 거리를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로 규정하려 하지 말라는 봉완의 입장이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과연 비트겐슈타인도 봉완처럼 실체라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것' 일 뿐 우리가 '느낄' 수는 있는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가 궁금해져서 검색을 좀 해보았지만 바로 찾지는 못했네요. 역시 공부를 해봐야 겠어요.

전 아름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떤 삶에 대한 '미학적'인 태도를 느꼈습니다. 실체의 존재와 상관없이 결국 유한한 이 인생에 있어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다 괜찮을 것이라는 어떤 허무주의적 낙관주의 같은 것이 느껴졌네요. 유한자의 믿음으로 의미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사르트르가 구토를 한 다음 맞이하는 평온함 아닐까 생각도 했어요.

(홍상수 감독이 봉완과 같은 입장으로 살아가다 아름처럼 생각하는 김민희를 만나 무언가 생각의 변화를 맞이한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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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는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P. M. S. 해커의 해석을 비롯한 교과서적 비트겐슈타인 해석들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바깥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휘파람‘이라도 불고자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봉완의 태도처럼, 말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느낄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어떻게든 보여주고자 시도한 것이죠.

https://blog.naver.com/1019milk/221606821661

하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시도가 언어와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는 더이상 사람의 ‘삶의 형식(Lebensform)‘과 사람의 ‘자연사(Naturgeschichte)‘ 바깥에 별도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상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신실용주의 같은 아주 급진적인 사유들도 나오게 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유는 아름에게 훨씬 가깝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름의 입장이 (더 나아가, 실존주의나 해체주의나 실용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입장들이) 그 자체로 어떤 ‘미학‘을 정당화해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 현실에 대한 단순한 기술(description)일 뿐이에요. 이 기술 자체는 아무런 가치평가나 세계관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실체에 대한 이전 형이상학적 가정이 틀렸다는 것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고, 그 가정을 포기한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해주고 있지 않은 것이죠. (그리고 이 점에서 저는 아름의 말로부터 홍상수 감독 본인의 불륜이 손쉽게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실체 형이상학 비판으로부터 곧바로 삶에 대한 어떤 ‘미학‘이나 ‘윤리‘ 같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식의 생각들이 논리적 비약이라고 평가합니다. 실체 형이상학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철학은 아무런 구체적인 대답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답이 존재한다면, 그 대답이야말로 ‘종교‘에서 제시될 수밖에 없죠. (혹은 그 대답이야말로 ‘종교‘라고 할 수밖에 없죠.) 우리 자신을 사로잡아서 대단히 구체적인 세계관과 실천에 개입하도록 자극하는 강렬한 상징 체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세계관이나, 윤리나, 미학이나, 삶의 의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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