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작품 속 아름의 입장에 공감이 되네요. 칸트의 '사물 자체' 개념에 대한 야코비의 비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다음 부분이요.
아름: 근데 실체가 뭔데요? 정말로 실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라면, 사실은 없는 거 아닌가요? 그 없는 걸, 안다고 아는 양 전제하는 게, 그게 거짓말 아닌가요, 오히려?
봉완: 없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거지 느낄 순 있는 거야, 그게.
아름: 느끼세요, 실체를?
봉완: 그럼
아름: 그게, 그 느낌이 실체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영상에 나오는 저 대화는 확실히 철학사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다루어진 주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실재론과 관념론의 논쟁, 토대론과 정합론의 논쟁,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를 둘러싼 칸트와 칸트 이후 세대의 논쟁 등과 말이에요. 심지어, 오늘날 상관주의 진영과 사변적 실재론 진영 사이의 논쟁도 큰 흐름에서는 저 대화 속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 아름의 입장이 매우 흥미롭네요. 봉완은 실체와 상관 없는 믿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아름은 오히려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네요. (a) "믿음은 실체에 대응해야만 의미를 지닌다"라는 봉완의 생각에 대해, (b) "믿음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의미를 지닌다"라고 아름은 답하는 거죠. 저는 이런 대답이 게임의 판을 완전히 바꾸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 로티의 신실용주의, 바티모의 니힐리즘은 모두 아름과 같은 입장을 강조합니다. 전통적 철학이 이때까지 '실체', '사물 자체', '실재', '객관성', '합리성' 등으로 불러온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동안 '신앙'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키에르케고어),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한 모든 것들이 '기표'의 끝없는 놀이로 드러나게 되고(데리다),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짐으로써만 진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고(로티), 우리가 쌓아올린 과학, 예술, 윤리 등은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해석'의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고요(바티모). 아름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야말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지반으로 드러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퀑탱 메이야수 같은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저 입장들을 싸잡아서 '신앙주의fideism'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은 종교철학과 신학에도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실제로, 오늘날 포스트모던 신학은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니까요. 즉, 포스트모던 신학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실체의 형태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이 아무런 객관적 토대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신앙'이야말로, 결코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이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죠. 최근에 이 입장들을 소개하는 아주 훌륭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는데, 여기도 올려봅니다.
그러나 저는 아름의 마지막 주장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고 싶은대로 만든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무엇인가를 믿게 되는 것은,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칼 융이 리차드 에반스와의 1957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아주 잘 지적하고 있죠. 융의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터뷰이지만, 저는 이 인터뷰가 '믿음'이나 '종교'의 아주 본질적인 부분을 잘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상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신은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갑작스럽게 감정이나 매력에 의해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전혀 예기치 않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상당히 낯선 어떤 것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Carl Jung, Conversations with Carl Jung and Reactions from Ernest Jones, R. I. Evans (ed.), Van Nostrand Reinhold Company, 1964, 51)
자, 원형은 힘입니다. 그것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갑작스럽게 당신을 사로잡을 수 있죠. 마치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죠. (Carl Jung, Conversations with Carl Jung and Reactions from Ernest Jones, 51)
저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사로잡힘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 믿음이 허구적이고 거짓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무엇인가를 믿으려면, 그 믿음에 '사로잡히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이구나! 신뢰할 만한 것이구나! 내 삶을 걸어도 좋겠구나!"하는 경험 말이에요. 이런 점에서, 저는 단순히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것"을 그냥 담담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홍상수 감독의 자기 합리화가 드러나는 부분 같아서 별로 좋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것"이 저를 '사로잡기' 전까지는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