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형식적 논리

뮤니츠의 <현대분석철학> 379쪽입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개론적인 설명을 보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논리적인 오류 - 함수들, 변수들, 형식적 개념들을 그들 자신의 값으로 간주하고 있는 오류 - 는 철학자들의 문헌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사이비 명제들 속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명제들 속에서 형식적 개념들은 마치 그것들이 개별적인 대상들, 관계들, 속성들 등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마치 뜻을 가지고 있고, 정보를 전해주고 있으며, 사실적인 진리를 전달해주고 있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이비 명제들 속에는 형식과 내용 간의 혼동이 존재하고 있다. 명료한 기호 속에 드러난 형식적 개념들과 속성들은 그러한 기호의 내용들로서 간주된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말할'수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적합한 언어 사용 속에서 보여줄 수만 있을 뿐이다. 명료한 논리적 언어와 기호를 가지고 그것을 사용하게 되면, 그 즉시로 어떤 철학적인 명제들을 형성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1. 형식적 논리를 변항 중 하나로, 마치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우연적인 대상처럼 다루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 '형식적 논리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그 순간에 형식적 논리를 초월한 자리에 서 있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칸트가 선험적인 것을 이야기하며 들었던 개념들, 이를테면 시공간 같은 것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선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시공간 바깥에서 시공간을 우연적 대상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기에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부분이 궁금합니다.

  2. 한계를 이야기하는 순간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는 오류.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주장들이 그런 오류를 담고 있어 무의미하니 사다리처럼 여기라고 말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의 한계 개념을 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헤겔이 칸트의 선험적 범주를 비판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득력이 있을까요?

질문이 한편으로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향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칸트를 향하고 있네요.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칸트는 오히려 시공간이라는 형식이 인식 주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아주아주아주 거칠게 말해서) 인식 주체의 "머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시공간을 "대상"처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시공간이라는 형식을 "초월한 자리에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은 칸트의 선험적 범주에 대한 헤겔의 어떤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르겠어서 답변을 드리는 것이 어렵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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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1번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2번은 질문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칸트에서 시공간이 인식 주체의 것이고 그 바깥에 사물 자체가 있다고 대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칸트를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 오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공간에 대한 지식을 얻는 주체는 그 순간에도 시공간적 범주 속에서만 사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험적인 인식 범주를 기술할 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선험적 범주에 구애받고 있습니다. 선험적 범주가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우리 정신의 한계인데, 우리가 그런 한계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게 모순적이지 않은가 합니다. 그렇게 되면 물 자체는 '한계를 벗어난 무엇'으로 논리적 공간을 이양받기에 더 이상 인식 불가능한 물이 아니게 됩니다. 무언가를 인식 능력의 한계라고 말하려면 인식 능력의 한계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일정 부분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순간 한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는가 했던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공간적 "범주"가 아니라 시공간적 "형식"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순 용어적 이슈는 패스하겠습니다.)

선험적 범주 그 자체는 물자체 문제와 무관합니다. 선험적 범주는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사유 형식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자체 역시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사유"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선험적 범주를 사용하여 "사유"하곤 합니다 (신, 영혼, 세계 등). 그러나 이 후자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사유"일 뿐 (사유할 수 있는 것일 뿐),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는 "인식"을 매우 좁게 한정합니다.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해당 대상에 대한 "직관"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선험적 범주를 무차별적으로 잘못 사용하여 얻어진 개념들(신, 영혼, 세계)은 따라서 이론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가짜 개념들입니다. (실천 철학적으로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다음을 참조: 칸트 연구자들은 "요청으로서의 신" 개념을 뭐라고 파악하나요? - Herb 님의 게시물 #4)

따라서 칸트에게 "인식"의 범위보다 "사유"의 범위가 항상 더 큽니다. 이것을 칸트는 감성의 영역보다 지성의 영역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유"가능 한 것들은 "인식"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식"의 한계는 "사유" 외부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내부에 놓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인식"의 한계 역시 "인식" 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그어지는 것입니다. "~~가 인식의 한계이다"에 해당하는 "직관"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깐요. (물론 깊이 들어가면, 인식의 한계를 긋는 이 "사유"의 정당성이 어디서 나오느냐의 문제에 빠지지만, 여기서는 패스하겠습니다.)

요지는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엄밀한 의미에서) 인식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인식"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유"의 영역에서 (더 좁은 영역인) "인식"의 영역을 한계지은 것입니다. 이것은 한계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 안에 울타리를 치기 위해 집 밖을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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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칸트의 인식과 사유의 차이를 몰라서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칸트에게서 그러한 사유의 한계가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논리적 법칙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특히 칸트는 모순율을 위배하는 경우 (A and not-A) "사유 불가능"하다는 기존 서양철학사의 논리학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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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칸트는 사유의 한계는 어떻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잘못 말했던 '인식의 한계'를 '사유의 한계'로 고쳐서 다시 질문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