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카트라이트
과학철학자 낸시 카트라이트(N. Cartwright)의 논문 제목이 도발적이네요. "신이 없이는, [자연]법칙도 없다(No God, No Laws)."라니요?! 그러나 카트라이트는 유신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신이 이 세계에 '자연법칙' 따위를 부여했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에요.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만큼이나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대상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이죠.
"나의 테제는 나의 제목으로 요약된다. '신이 없이는, 법칙도 없다.'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은 신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이 테제는 겉보기만큼이나 극적이지는 않다. 나는 근대과학의 기획이 신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고 논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 기획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과학을 자연법칙의 발견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 없이는 어떠한 법칙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N. Cartwright, "No God, No Laws", Dio, la Natura e la Legge. God and the Laws of Nature. Sindoni, E & Moriggi, S Milan: Angelicum-Mondo X.)
저는 카트라이트의 테제에 동의합니다. 사실, 카트라이트의 글을 거의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과학철학자인 반 프라센(B. van Fraassen)이 이와 상당히 유사한 주장을 하거든요. 반 프라센은 경험주의와 진화론을 우리가 정말로 철저하게 받아들일 경우, '자연법칙' 따위에 근거해서 과학을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자연법칙은 경험의 대상이 아닐 뿐더러, 과학이란 서로 경쟁하는 가설들 중에서 진화론적으로 살아 남은 가설들의 집합일 뿐이니 말이에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경험주의와 진화론을 내세우는 반 프라센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저는 종종 '자연법칙'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서 묘한 형이상학적 향수병 같은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특별히, 과학을 예찬하면서 '자연법칙'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묘한 패러독스 같은 것을 목격해요. "정말로 과학적으로 사고한다면, '자연법칙'이라는 놀라우리만큼 형이상학적인 대상을 저렇게 과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에요. "과학주의자들은 과학을 하는 것일까, 형이상학을 하는 것일까?"하고요.
그렇지만, 저의 생각과 달리, 철학자들 중에서는 여전히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대부분이죠. The 2020 PhilPapers Survey에서도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한다는 입장은 72.35%나 되고요. 저한테는 이런 결과가 좀 당혹스럽더라고요. 제가 현상학-해석학 배경에서 철학을 시작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이 실재의 구조나 법칙에 대한 탐구라는 생각이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 이후에도 살아 남아 있다는 점이 오히려 저에게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https://survey2020.philpeople.org/survey/results/all
물론, 구시대적인 실증주의적 사고를 수용하여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장 The 2020 PhilPapers Survey만 보더라도,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한다는 72.35% 중에서, 과학적 실재론을 확실하게 받아들인다고 답한 사람들은 36.71%이고, 과학적 실재론에 기울어져 있다고 답한 사람들은 35.64%이거든요. 과학적 실재론 내에서도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입장이 절반이나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점 때문에 더 궁금하기도 하더라고요.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의 이론적 근거가 무엇일까 하고요. 과학이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을 제공한다는 점 이외에는,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할 만한 근거가 더 있을까요? 그렇지만 문제는, 과학이 단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제공한다는 사실만으로 '과학적 실재론'을 뒷받침할 충분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같거든요. 반 프라센처럼 과학에 대해 일종의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고도 과학이 자연세계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라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애초에 '최선의 설명'이라는 것 자체가 '실재'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과학적 추론을 통해 제공된 설명이 '최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과학적 실재론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