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에 대한 단상

"[……] 비난은 매우 빈번하게 비난받는 자를 '글렀다고 포기할'뿐 아니라 '윤리' 운운하며 비난받는 자에게 폭력을 가하려는 행위이다."(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84쪽.)

(1)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책인데도, 철학과 내부에서는 그다지 활발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애초에 버틀러가 철학에서보다는 비평이나 여성학에서 주로 인용되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버틀러처럼 프랑스 철학의 논의를 독창적으로 재전유하는 학자가 철학과 바깥에서 더 많이 읽힌다는 사실은 다소 의아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리적 폭력 비판』이 버틀러의 대표작인 『젠더 트러블』보다 더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고 평가하다 보니, 버틀러를 퀴어 이론가이기 이전에 윤리학자로 독해하는 편이 그의 철학이 지닌 의의를 더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버틀러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타자의 요구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하게 된다. 타자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설명하라!"라고 명령하기 이전에 '나'가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타자와 구별되는 단단한 자아성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나는 ……한 사람이다."라고 타인에게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형성할 뿐이다.

(3) 여기서 버틀러는 우리 자신을 특정한 규범에 따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즉, 설명을 종결짓는 최후의 토대는 어디에도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기성의 규범을 사용하여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나'를 설명하고자 해야 한다. 그런데 기성의 규범은 애초에 '나'를 설명하기 위해 맞춤 제작된 도구 따위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작업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빠져 있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만들지 않았고, '나'에게 무관심한 법, 윤리, 관습, 질서에 필연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인정을 수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며, 내가 그 용어들을 단독으로 고안해내거나 정교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말하자면 내가 제공한 언어에 탈취당한다."(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48쪽.)

"우리는 자기 밖에서, 자기에게 외적으로 발생하는 매개를 통해서, 자신이 만들지 않았던 규범이나 관습──이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저자나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의 작인agent으로 식별할 수 없다──에 의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헤겔식 인정의 주체는 상실과 엑스터시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진자 운동을 하는 주체인 것이다. '나'의 가능성, '나'를 말하고 알 가능성은 그 '나'가 조건짓는 1인칭 관점을 탈구시키는 관점이다."(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52쪽.)

(4) 가령, 나는 며칠 전에 평소 즐겨 보던 게임 유튜버 K가 자신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다른 유튜버들을 고소하여 소송에서 승소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K는 자신이 주변의 비방에 맞서 법적으로 무고함을 증명해내기 위해 1년동안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야 했는지를 45분 길이의 영상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즉,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범을 사용하여 타인에게 '나'의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설령,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의 정당성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를 설명하라는 타자의 요구에 맞추어 그가 인정할 수 있는 기성의 규범으로 나를 재조직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법적 증거를 제출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료들을 긁어 모아야하고, 타자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도 주의해야 하며, 제시되는 반론에 대응하기 위해 치밀한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 '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활동은 이전까지의 평온한 일상을 중지시켜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윤리', '법', '정당성'이라는 이름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압박할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5) 버틀러의 독창성은 '나'라는 존재가 타자에게 응답하는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형성된다는 통찰을 '윤리적 폭력'의 문제와 결부시켰다는 점에 있다. 사실, 자아의 사후성 자체는 버틀러 이전에도 현대철학의 중심 주제 중 하나였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레비나스 같은 현상학자들부터,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를 거쳐, 들뢰즈 같은 니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자아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고 강조한 철학자들은 수없이 많다. 버틀러가 잘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주제는 헤겔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기도 했다. 다만, 윤리적 폭력의 근원이 자아의 사후성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 것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버틀러가 처음이다. 나로서는 "당신 자신을 설명하라!"라는 얼핏 정당해 보이는 요구가 우리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버틀러만큼이나 날카롭게 지적한 인물을 아직 알지 못한다.

(6)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연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도 윤리적 폭력의 메커니즘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설명하고자 하여도 우리는 결국 궁극적 설명에는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실패는 우리의 윤리적 결함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작업이 지닌 근본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것이 아닌 규범을 사용하여 타자가 인정할 수 있는 '나'를 직조하려는 작업이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허황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보라는 요구는 우리 자신을 설명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도록 몰아붙일 뿐이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서 주인공이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개 같이" 처형당할 수밖에 없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7) 그러나 버틀러의 주장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몇몇 핵심적인 부분에서 요점이 다소 불분명한 것 같기도 하다. 가령, 규범이 '나만의 것'도 '내가 만든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쪽도 기성의 규범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정확히 왜 문제가 되는지를 짚어내지는 못한다. 즉, (a) 규범이 단순히 우리 자신보다 '발생적으로' 앞선다는 주장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작업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도출되지 않는다. 설령, 궁극적 설명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성의 법과 윤리를 사용하여 타자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일에 성공하기도 한다. 게임 유튜버 K의 승소도 그가 기성의 법과 윤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작업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b) 규범이 우리 자신을 '추론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러한 주장은 기성의 규범이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새롭게 해명하고 있지 않다. 단지, 기성의 규범은 우리를 정당화하는 작업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선언되고 있을 뿐이다.

(8) 나는, 버틀러와 달리, 규범이 우리의 사회적 실천에 언제나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 윤리적 폭력의 문제에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규범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규범은 더 이상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는 근본 토대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할 뿐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설명하라!"라는 요구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따르던 규범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다. 그동안 우리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던 규범이 의식적 비판의 대상이 됨에 따라 우리는 더이상 그 규범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가 없다. 이제 모든 행위가 그 규범에 자의적으로 끼워맞춰질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게리멘더링), 모든 물음이 그 규범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무한퇴행) 같은 비일상적 회의가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는 규범에 대한 수많은 '해석' 사이에서 왜 하필 우리의 해석이 규범을 올바로 따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에 직면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런 토대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정초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즉, 우리가 그동안 올바르게 규범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더 이상 그 규범 자체에 의존하지 않고서 설명해야 하는 역설에 빠진다. 규범의 역설은 정초할 수 없는 것을 정초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이 바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라는 작업이 근원적으로 결함을 지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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