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한 학기가 끝났네요. 저는 이번 학기에 연세대에서 철학과 이승종 교수님과 함께 해석학 강의를 맡았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우기(Learning by Teaching)'라는 취지로,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 지도교수님과 공동으로 강의를 진행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인 LT 과목에 강사로 참여하였거든요. 이 과목 자체가 철학과에서는 처음 개설된 것이다 보니,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새로 개척하느라 강의를 준비하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대학의 정식 교과목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기회인 동시에 커다란 모험이었으니까요.
특별히, 이 강의가 영어 강의라는 점이 저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승종 교수님은 모든 대학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셔서, 저 역시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토종 한국인인 제가 매 주 여러 사람들 앞에서 3시간 동안 영어로 말을 해야 했다 보니, 거의 일주일 내내 영어 스크립트를 만들고 수정하는 데 시간을 쏟아야 하였습니다. 강의 시간에도 그 스크립트를 토종 한국어 발음으로 떠듬떠듬 읽고 설명하느라 고생을 하였네요. 수강하신 분들이 제 영어 발음과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언제나 걱정하였습니다. (심지어, 강의실에는 독일인 학생도 있었는데, 독일인 학생 앞에서 영어로 하이데거의 괴랄한 독일어 조어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대학에서 한 첫 번째 강의는 영어 강의가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이런 강의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승종 교수님께서도 이번 강의가 이후 커리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에게 조언을 해주셨어요. 지도교수님과 LT 과목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은 결코 흔하지 않은 데다, 영어 강의 경력도 졸업 이후의 구직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으니까요. 이승종 교수님의 배려 덕분에, '가르치면서 배우기'라는 LT 과목의 취지 그대로, 강사였던 제가 강의를 통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의 전반부(3월 8일~4월 19일)는 이승종 교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제2부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제32절을 강독하면서,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해석학의 현상학적 전회란 무엇인가?', '이해와 해석이란 무엇인가?' 같은 '이론적' 주제들을 다루셨어요. 영어 텍스트를 발췌해서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이승종 교수님이 보충 설명을 하시면서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조지아 원키(G. Warnke)의 Gadamer: Hermeneutics, Tradition, and Reason 1장에 수록된 "Phenomenological Turn"이라는 절이 중요한 2차 문헌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어요. 저는 해석학을 전공하다 보니 이 텍스트들을 이미 모두 읽어보았는데도, 강독 수업을 통해 다시 공부하니 그 내용들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더라고요.
강의의 중반부(4월 26일~5월 17일)는 제가 담당하였습니다. 저는 해석학의 통찰들이 오늘날의 철학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 주제들을 다루었어요. 20세기의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의 논의에서 '해석학'이라는 분야가 왜 부각되었고, 그 분야가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그 분야가 결과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소개하였습니다.
제가 다룬 내용들은 그동안 제가 런어스(LearnUS) 전문과정과 성천아카데미 추계강좌 등을 통해 이승종 교수님과 대담을 진행하였던 내용을 제 방식대로 새롭게 소화해서 재구성한 내용이기도 해요. 저는 제 부분을 '대화의 해석학(hermeneutics of dialogue)'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a) 대표적인 해석학자인 가다머가 이해의 해석학적 구조를 기술하기 위해 '대화'라는 키워드를 강조하였기도 하고, (b) 오늘날 해석학의 전개 양상 자체가 대륙철학/분석철학, 해체주의/자연주의, 철학/문학을 넘나드는 학제 간 '대화'를 지향하고 있기도 하고, (c) 무엇보다 제가 다루었던 내용들이 이승종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획득된 결과물이기도 해서요.
강의의 후반부(5월 24일~6월 14일)에는 런어스 전문과정과 성천아카데미 강좌에서 진행되었던 이승종 교수님과의 대담 내용 중 일부를 영어로 재시연하였습니다. 그 강좌들은 '영미철학', '대륙철학', '비교철학', '한국철학',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어서요. 철학의 구체적인 여러 영역들에 해석학을 실제로 적용하였을 때 나오게 되는 결과들이 무엇인지가 그 강좌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었거든요.
사실, 저는 이번 강의가 과연 수강생 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 그다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내용 전달이 제대로 되었는지부터가 불확실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강의를 마치고 수강생 중 한 분이었던 심리철학 전공 대학원 박사과정생 J 선생님이 저에게 갑자기 "해석학적 심리철학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이번 강의에서 다루어졌던 내용들이 자신이 전공하는 심리철학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요. J 선생님과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제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강의 내용과 강의에서 사용된 교재 내용을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계셔서 내심 놀랐습니다. 아마, 제 전달력은 부족하였지만, 이승종 교수님의 전달력과 글이 좋아서 내용에 꽤나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어요.
이번 학기 해석학 강의 내용들은 올해 8월 말이나 9월 초에 단행본으로 정식 출판됩니다. 원래 제가 다룬 강의 중반부 내용과 저와 이승종 교수님이 함께 진행한 강의 후반부 대담이 1부와 2부로 묶여서 '대화의 해석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예정이었는데, 원고의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대담 부분만 따로 출판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강의 중반부의 내용 역시 언젠가 이승종 교수님과의 공동 작업물로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판이 이루어지면 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홍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해석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이승종 교수님과 해석학을 주제로 대화하면서 배운 내용들을 다른 많은 분들과도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