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과연 학문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안녕하세요, 평소 철학 분야에 관심이 많아 올빼미를 자주 애용하는 한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오늘 어느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쇼츠를 하나 보았는데, 그 쇼츠에서 유튜버가 말하는 주장이 되게 흥미롭기도 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어보여 그것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쭙고자 글을 올립니다.

출처: 유튜브, 리히트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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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나 후설이 어떻게 말했는지가 가물가물해 논자의 발언만을 고려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학문은 체계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심히 모호할 뿐더러, 그 근거가 마땅히 나와 있지 않아 주장을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굳이 이 주장을 자비롭게 해석한다면 (1) ‘철학은 이를 정초짓는 메타 이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학문이 아니다’ 또는 (2) ‘철학적 이론 결정을 위한 방법론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철학은 학문이 아니다’를 주장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1)과 (2) 중 어떤 말을 하는 것이건, 그 귀결은 ‘세상에 학문이란 없다’입니다.

(1)에 대해. 어떠한 학문이건 그 메타 이론은 그것이 학문으로 승인된 뒤에야 (대부분 철학자들에 의해) 구성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메타 이론인지는 좀처럼 확정되기 어렵습니다. 가령, 우리는 아직 귀납적 정당화의 원리조차 모릅니다.

(2)에 대해.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학의 방법이 무엇인가? 어느 시대에는 기하학적 방법을 생각했고 어느 시대에는 대수적 방법을 생각했겠죠. 오늘날에는 수리논리학을 통해 어느 정도 바탕이 마련되었겠지만, 괴델 증명을 통해 시사된다고 주장되듯, 수학조차도 전적으로 절차화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해하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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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드립니다.

어... 오류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서 여러 오류가 보이는데요. 데카르트는 철학의 토대를 수학으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는 첫번째 성찰에서 모든 것, 심지어 수학적 사실마저도 의심한 후 두번째 성찰에서 코기토라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만들죠. 그리고 코기토에 기반해서 세번째 성찰과 다섯 번째 성찰에서 신의 증명을 하면서 수학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즉, 데카르트는 철학을 수학으로 기반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수학을 철학으로 기반하려고 한 겁니다. 스피노자 역시 기하학적 방법론을 철학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긴 했습니다만, 그게 철학의 기반을 수학으로 둔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토대를 다지기 위해 수학의 방법론을 빌린 것 뿐이지요.

또, 이 분이 주장하시는 것 중 하나가 "철학의 토대는 수학과 물리학으로 잡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학문이 아니다" 입니다. 일단 앞서 말했듯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이 분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철학의 토대를 수학과 물리학으로 잡으려하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였죠. 하지만 이와 별개로, 철학의 토대가 수학과 물리학이더라도, 왜 그것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수학과 물리학이 토대가 잘 잡혀있고, 철학이 수학과 물리학의 토대를 빌린다면, 철학의 토대가 잘 잡혀있는것이겠죠. 하지만 철학의 토대가 잘 잡혀있다면, 왜 철학이 학문이 될 수 없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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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학문이나 야니냐를 토론하는 이 활동 자체가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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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문이라는 것을, 어떤 정보들의 정리된 다발들에서 아름다움을 감지한 사람이 기꺼이 자기 인생을 바쳐다 비슷한 정보들을 정리해 두는 활동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볼 때 충분히 학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영상을 만든 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마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이나 후설의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칸트와 후설은 철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학문으로서 정초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후설은 책 제목에서부터 철학을 '엄밀한 학문'이라고 적고 있는데, 왜 저런 식의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인물로부터 직접 인용을 해보죠. 먼저 칸트입니다.

"내가 보증하거니와, 이 『서설』에서나마 『비판』의 원칙들을 천착하고 파악한 이는 어느 누구도 두 번 다시 저 낡고 궤변적인 사이비 학문(기존 형이상학 일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모종의 희열을 가지고 이제야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고 어떤 준비적인 발견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비로소 이성에게 지속적인 충족을 줄 수 있는 하나의 형이상학을 내다볼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형이상학 서설』,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2, 313쪽.)

즉, 칸트 자신의 『비판』과 『서설』의 원칙들을 파악하고 나면, '사이비 학문'을 넘어서는 진정한 '하나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이 정초된다고 하는 말이네요. 후설도 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학문—그 엄청난 범위에 대해 현대인들이 아직 어떤 상상도 해보지 못한 학문—즉 의식에 관한 학문이지만, 어쨌든 심리학은 아닌 학문에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의식에 관한' 어떤 '자연과학'에도 대립해 있는 '의식의 현상학'이다." (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이종훈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38쪽.)

즉, 후설은 자연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는 구별되는 '의식의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하네요. 바로 이 학문이 철학이라는 거죠. 게다가 후설은 아래처럼도 말하네요.

"'이제까지' 어떤 학문적 철학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마저 역사학으로서는 결코 정초할 수 없다. 역사학은 다른 인식 원천에 입각해서만 그런 주장을 정초할 수 있다. 그것은 명백히 실로 철학적 인식원천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비판도 실제로 참된 타당성에 대한 요구를 주장해야 하는 한에서 철학이며, 그 의미상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체계적 철학의 이상적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즉 만약 철학적 비판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논박할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한다면, 이때 그 무엇을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정초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이 또한 거기에 존재한다." (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99-100쪽.)

그러니까, 학문적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마저도 '엄밀학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게 후설의 논지입니다. 그런 식의 주장은 일종의 '철학적' 주장이고, 철학에 대해 비판하는 그런 철학적 주장의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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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칸트와 후설은 잘 몰라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 대해서만 코멘트를 했는데, 칸트와 후설에 대해서도 오류를 범하셨군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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