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철의 정체성?

동양철학이나 동양종교학 등의 학문적 정체성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엄밀히 말해 철학보다는 문헌학, 인류학, 역사학 등에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현대 동양 사상 중에 주목할 만한 분야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현대 신유학이나 세속적 불교 등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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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은 인지과학에서 주요한 원천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좀 된 것이기는 하지만 프란시스코 바렐라, 에반 톰슨, 얼레노어 로쉬가 쓴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 1992)가 그 예입니다. 이 책과 함께 시작된 체화된 인지의 흐름에서 불교철학은 주요한 원천이 됐습니다.

또 용수와 같은 불교철학의 대가들을 현대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원으로 삼는 경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elf, No Self?>(2013) 이 책은 불교철학을 현상학과 결합해서 분석철학적 문제를 푸는 방식입니다.

유학은 정치철학적, 윤리학적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의 경향은 모르겠지만 국내에서는 나종석 교수님이 이 방면으로 연구를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2017, 20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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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인지과학>이나 <Self, No Self?>(<자아와 무아>(2022)로 번역됨)는 읽어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네요. 동양학은 다른 학문과 연계해서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 같네요. 나종석 교수님의 연구도 흥미로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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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는 표현이 참 모호한데, 기실 옛 서양 "철학"(으로 분류된) 문헌을 연구하시는 분들과 별 차이 없습니다.

교정본을 만들거나 새로운 번역본을 내는 것 같은 문헌학에 가까운 작업부터, 오늘날 (분석 철학이든 뭐든) 더 논의된 (철학적) 개념으로 옛 문헌을 해석하거나, 철학사 혹은 사상사 같은 더 넓은 스코프로 보기도 하죠.

차이가 있다면,

서양에서는 "철학"으로 분류되는 문헌의 오래된 역사가 있는만큼, 어떤 문헌이 철학인지 큰 논쟁은 이제 드뭅니다. 논쟁이 있어도 뭐 공유된 상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죠.

반대로 비서양에서 "철학"은 빨라도 19세기, 늦으면 20세기 후반에서야 나름 받아드리게 된 학문 분류 체계입니다. 그만큼 어떤 문헌이 철학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이게 종교인지 주술인지 신학인지 그 자체로 논쟁이 되고, 각자의 접근법과 편견이 있는 듯 합니다. (사실 이 세 개념조차, 굉장히 서양적이기에 철학이 무엇인지만큼 논의할 내용이 있겠죠.)

다만 요즘 영미권 철학계에서는 서양 철학 문헌뿐 아니라, 비서양의 오래된 학문 전통들 (불교든 이슬람이든 힌두교든)도 철학의 연구 영역으로 삼는데 별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예전이라면 철학 문헌으로 보지 않았을 신비주의 문헌이나, 연금술과 옛 과학사적 문헌들, 유사 학문적 문헌들까지도 다룹니다. 뭐 물론 서양 철학사의 코어한 부분으로 여겨지진 않지만요.)

나아가 1970-80년대라면 인류학의 역할이라고 보았을, 개별 민족의 신화/구전 개념에 대한 연구조차 이제 나름 "철학"으로 다룹니다. (이는 사실 제 입장에서도 격변입니다. 90년대 언저리에 태어났는데...)(그리고 물론 새로운 흐름인만큼, 이게 유용한지 아닌지 뭐 그런 평가는 아직 좀 이른 것 같고요.)

게다가 (분석이든 대륙이든 뭐든) 철학의 기본이 개념 분석이라는 점에서, 서양이든 비서양이든, 철학 문헌에서 나왔든 과학 연구에서 나왔든 신조어든 밈이든, 개념 분석이 치밀하기만 하다면 이제 철학 연구로 받아들여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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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제가 예전에 썼던 글과 다른 분들이 쓴 글이 있으니 링크를 타면서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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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요즘처럼 학제 간 장벽이 낮아지는 상황에선 학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개념 분석이 관건이란 말씀도 새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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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사상이 해체주의와 종종 연결점이 있는 것으로 논의되긴 합니다. 약간 오래된 주제이지만, 국내에서도 2000년대 무렵에 노장사상과 해체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 무렵에 아직 대학에 입학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때 노자 도덕경에 대한 해체적 해설들을 접하고서 매우 감명을 많이 받아 철학과 진학을 더욱 희망하게 되었거든요.) 아마 서강대의 고 김형효 교수님이 이런 논의를 처음 촉발시키시면서 여기에 대해 많은 호응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형효 교수님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이 이런 연구의 시발점에 있는 책입니다. 『노자에서 데리다까지』가 그에 관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전공자들이 반응한 후속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고요. '해체'라는 키워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서강대 최진석 교수님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도 동양철학 전공자의 관점에서 김형효 교수님의 해석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쓰인 책입니다. 율곡연구소장 박원재 교수님이 노장과 해체주의 사이의 비교철학적 연구의 발전사와 전망에 대해 쓰신 「노장철학과 해체론: 그 만남에 대한 성찰적 회고」라는 논문의 링크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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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사상과 해체주의를 연결할 수 있군요. 동서철학 비교연구는 산발적이고 일회성인 경우가 많다고 느꼈는데 후속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기대가 됩니다. 추천하신 책과 논문들 잘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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